오랜 동지들 - 6
마리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이후였다.
게지카가 이끄는 부르군트군이 전장을 말끔하게 정리하고서는 흩어진 프랑크 군을 다시 불러모으고 있었고, 어느샌가 도착한 고디기젤도 그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프랑크 군은? 내 병사들은 어디 갔나?”
“으음···. 브레누스가 울딘의 함정에 속아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병사들은 어디 있나? 설마 전부 전멸한 것은 아니잖은가.”
“그것이···.”
“전하, 주변에 흩어진 프랑크 군을 끌어모아 봤지만, 그 숫자가 지금까지 삼천 명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디기젤의 말에 마리우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허어···. 일단은 병사들을 잘 수습해서 최대한 다시 부대를 재건해보게.”
“그러고는 싶지만···. 훈족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쉽사리 움직이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가이세리크를 보내서···.”
“가이세리크는 주변에 정찰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를 불러온다면···.”
“아, 그렇지···.”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왼팔 하나가 통째로 뜯어져 나가버린 상황인지라 오른팔 하나만으로 팔이 네 개쯤 달린 상대와 복싱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점이라면은 그동안 신경 쓰고 있던 훈족의 기병 전력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연이은 전투에서 적 기병대의 손실이 누적되고 있었고, 이는 아군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이를 뒷받침해줄 보병전력에 구멍이 생겨버렸다.
“일단은 립스크로 돌아가야 하나?”
“립스크는 뒤편이 강으로 막혀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멸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냥 이대로 가만있자는 건가? 뭔가 뾰족한 수가 없냐는 말이야.”
“지금으로서는···.”
데키무스를 비롯한 게지카, 고디기젤까지 아무도 쉽게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골치 아프게 흘러가고 있었다.
수적인 측면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아군과 훈족 간의 균형이 무너졌고, 이제는 회전에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브레누스는 좀 괜찮나?”
“예,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병사들을 잃은 탓에 크게 침울해져 있습니다.”
“쯧···. 뻔한 수에 걸려들어 가서는···. 일단은 최대한 인근의 병사들을 끌어모아야겠어.”
단호한 마리우스의 말에 데키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추가징집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때는 긴급동원이라고 해야겠지···. 인근에 있는 군소부족들도 가리지 않고 싹싹 긁어모아서 게르마니아의 모든 예비역을 총동원해.”
“그들을 지휘할만한 장교가···.”
“지난번에 귀족들도 훈련소에 입교시키지 않았나, 그들도 장교교육을 받았으니 제 몫을 해야지.”
“그, 그럼 귀족들까지 전부···?”
“그래, 필요한 자금은 청어조합에서 내 이름을 대고 빌려서라도 마련해.”
“음···.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리우스의 말 한마디에 게르마니아 전역에 임시 동원령이 떨어졌고, 라인강 너머의 게르만 부족들에게는 비상 동원령이 떨어졌다.
“아들아, 가서 반드시 공을 세우고 와야 한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아버지 아들 아니겠습니까? 가서 훈족 놈들을 단단히 혼내주겠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라···.”
나름 부족 내에서 귀족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이들은 동원령에 응해서 전장으로 향했고.
“아잇 씻팔!”
“올해만 지나면 예비군도 끝인데···. 왜 하필···.”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프랑크 군이 아예 괴멸당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이렇게 다들 끌어모으는 거라고···.”
“거기!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하도록.”
각자 생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은 마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립스크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울딘은 생각보다 빠른 병력보충에 크게 당황했다.
“아니, 지난 전투에서 삼만 명이나 되는 부대 하나를 궤멸시켰는데, 이틀 만에 이만 명이 보충되었다고? 일주일 내로는 오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정찰병들이 관측한 바로는···. 곳곳에서 수백 명 단위의 병사들이 립스크로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전투가 끝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피해를 복구했다고?”
게르마니아의 회복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어제 삼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날려 먹었어도, 그다음 날에 그에 따르는 병력을 새로 징집했다.
제아무리 유목집단인 훈족이라도 하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는 게르마니아의 모습에 울딘은 완전히 질러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곳이로군.”
“전하, 일단은 놈들의 전력이 집중되기 전에 단 한 번의 전투로 기를 꺾어놓아야 합니다.”
“그다음엔? 다시 수십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몰려오는 걸 지켜보면 되는 건가?”
“전하께서 아그리피넨시스로 가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장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서 머리를 쳐낸다면···.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부하의 설득력 있는 말에 울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몇 명이 몰려오든 간에 전부 때려 부숴버리면 문제가 없지.”
울딘은 구석에서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던 루카고를 불렀다.
“루카고.”
“부, 부르셨습니까? 전하···!”
“지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정말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줬더구나, 내 말이 맞느냐?”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네놈의 목을 치고 싶지만···. 그동안 너의 아버지와 네가 해온 일이 있으니 오늘까지는 참겠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은 없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루카고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울딘은 검지로 지도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곳 립스크 주변에는 빼곡한 숲과 여러 호수가 있어서 땅이 질척질척하고 굉장히 무른 곳이다. 따라서 기병이 활약하기에는 그리 좋지 못한 땅이야.”
“그렇다는 건···. 기병대는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네가 기병대를 이끌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립스크까지 들어가거라.”
“예···? 하지만 조금 전에 그곳은 기병이 활약하기 힘든 곳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에 기병대를 몰아넣어야지.”
루카고는 울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에는 위험한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자신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것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니면 이해하고서도 인정하기 싫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말이다.
“쯧···. 내가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하는 건가? 자네가 미끼가 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미끼라면···. 제가 적들의 이목을 끌 동안에 전하께서 놈들을 치실 생각이 신 겁니까?”
“그래, 네가 앞에서 오래 버텨줄수록 아군이 이길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루카고는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저, 전하 귀한 기병들을 고작 이런 일에 희생시키실 생각입니까? 다시 한번···.”
“귀한 기병대니까 하는 생각이지, 적의 목을 치려면은 이쪽도 가슴을 내어줘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루카고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동안의 실수를 무마하지 못한다면, 이번 전쟁이 끝나고서 제일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따르겠습니다···.”
“그래야지.”
******
마리우스는 립스크에 보인 병사들을 내려다보면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야 기억해낸 사실이지만, 바로 전역 날에 행보관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로마에 떨어진 지 어언 10여 년 동안 이뤄낸 성과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 전시상황만 아니었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감동적인 상황이었다.
“이제 여름인데 왜 찬바람이 부는 거야.”
오랜만에 옛 생각에 잠겨있던 마리우스는 불어오는 찬 바람에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마리우스에게 동원현황을 보고하러 오던 데키무스가 우연히도 그 모습을 지켜봤고, 말이다.
“각하를 위해서 먼 길을 달려온 병사들을 보고 있다니, 절로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지요.”
“아니, 이건 찬 바람이 불어서···.”
“하하하, 괜히 쑥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다 이해합니다.”
“진짜로 찬바람 때문이라니까?”
“다른 이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감수성이 좀 풍부할 수도 있지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마리우스가 버럭 성질을 냈음에도 데키무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동원현황을 보고하겠습니다.”
“진짜 운 거 아니라니까?”
“훈련소 명부에 기재되어있는 라인강 너머의 게르만인들 중에서 열에 두, 세 명 정도가 동원 완료했습니다. 나머지는 조금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동원 완료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아니, 전부 동원에 응했군.”
“늘 그렇듯이 교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교회라는 말에 마리우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데키무스를 쳐다보며 설명하라는 듯이 눈치를 줬다.
그러자 데키무스가 방긋 웃으며 설명했다.
“동원령이 떨어지자마자 교회 사람들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고 하더군요.”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동안 각하의 이름을 팔아먹었으니, 슬슬 알아서 기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골치 아픈 사람들이야.”
“하하하···.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전체적인 동원은 일주일 후에 끝날 것이고 각자 복무 당시의 원 소속부대로 합류하기보다는 새롭게 부대를 만들어서 엮으려고 합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편이 좋겠지.”
하지만 훈족은 멍청하게 마리우스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이들이 아니었다.
“전하! 정찰병들이 알리기를 립스크 외곽에서 훈족 기병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쯧···. 승기를 잡았을 때, 끝내버리겠다는 거로군.”
“파라몬드를 내보낼까요?”
“아니, 일단은 게지카와 부르군트를 선두로 보내고 그 뒤를 고디기젤과 반달족이 뒤에서 지원하게 해.”
“예,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가만히 앉아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지금 상황에서 적 기병들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은 울딘이 별도의 명령을 내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평소에도 질척거리는 늪지대인 립스크까지 기병을 들이밀었다는 것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울딘 녀석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은데···. 뭐지?”
한참이나 말들을 움직이면서 울딘의 수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들여다 본다고 한들 알아낼 수 있는 건 지도를 양피지가 아니라 종이로 만들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도 나가봐야겠군.”
******
“이게 맞나···.”
루카고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되도록 천천히 립스크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늪지대를 피해서 최대한 단단한 땅을 골라서 진군하고 있었음에도 말들의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전투는 힘든 곳이었다.
“이건 그냥 죽으라고 떠미는 게 아닌가···!”
“장군, 그래도 따르셔야 합니다. 이미 전하께 단단히 찍히셨으니···. 뭐···.”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렇다고 대놓고 죽으라고 보내는 건 너무한 게 아니냐고 하는 거지···.”
“그래도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확실하게 죽는 것보다는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가 낫지 않습니까? 좋게 생각하시지요.”
“후우···. 이놈의 날씨는 한여름인데 찬 바람이나 불고 말이야···. 젠장!”
기분이 울적해진 루카고는 괜스레 날씨를 탓하면서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루카고는 마리우스가 보낸 병사들과 마주쳤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하기 싫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살아서 돌아갈 거란 생각은 마라.”
“돌아버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