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5
“흠···. 훈족 놈들에 대한 소식이 안 들어오고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날이 밝아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런가?”
마리우스는 머리를 긁으면서 지도를 살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건만, 마리우스는 괜스레 불안함을 느끼면서 지금 있는 자리가 영 불편했다.
“흠···. 뭔가 이상한데···.”
“각하, 이제 일어나신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무엇이 이상하시다는 겁니까?”
“으음···. 뭔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마리우스는 다시금 눈을 부라리면서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지도에 집중했다.
게지카가 이끄는 부르군트군과 브레누스가 이끄는 프랑크 군이 위치한 곳과 고디기젤이 이끄는 하스딩기 반달족의 주둔지를 둘러보던 마리우스는 이들 간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점을 눈치챘다.
“뭐야···. 왜 다들 따로 놀고 있는 거야?”
“예? 뭐가 말입니까?”
“프랑크 군과 부르군트군 간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연계가 전혀 안 되는 데다가, 반달족은 너무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어.”
“전부 전하께서 명령하신 게 아닙니까?”
“내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나는 셋이서 유기적으로 잘 연계해서 움직이기를 바랐지, 전부 따로따로 노는걸 원했던 게 아니라고!”
“으음···.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젠장···. 일단은 브레누스와 게지카에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라고 전하고···. 고디기젤은 군을 한 데 모아서 립스크로 돌아오라고 전해.”
“정찰은 관두고,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이곳에 있는 가이세리크의 기병대로 정찰을 돌려도 충분해.”
마리우스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명령을 내려보내!”
“예, 각하!”
데키무스가 황급히 집무실을 뛰쳐나갔지만, 마리우스의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스멀스멀 퍼져가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던 마리우스는 결국 갑옷을 챙겨입으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소리쳤다.
“당장 병사들을 소집해!”
******
브레누스는 3000명의 병사만을 거느린 채로 수만 명이나 되는 울딘의 병사들 앞에 섰다.
뒤쪽에서는 프랑크 군과 루카고가 이끄는 훈족 기병대 간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있었고 말이다.
“게르만 놈들은 항상 저런 식이지, 쓸데없는 저항으로 굳이 안 맞아도 되는 매를 번단 말이야.”
“적이 단단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고슴도치처럼 단단한 방진을 만든 것을 보아하니, 제법 많은 피가 흐를 것 같습니다.”
“어차피 흘릴 피라면, 기왕이면 적의 피를 더 흘리게 만들어야지.”
“공격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적을 에워싼 다음에 항복도 받지 말고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훈족의 진영에서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보병들이 앞장서서 브레누스의 진형으로 먼저 달려나가면 그 뒤를 다른 병사들이 뒤따르라는 식이었다.
등에 있는 가시를 들이미는 고슴도치처럼 단단하게 진형을 꾸린 브레누스의 부대는 적들의 화살과 투창도 굳건히 버텨냈다.
“생각보다 더 단단한 것 같은데···.”
“경보병들로 들쑤시는 건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병사들을 투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
예로부터 기동성을 잃은 기병은 보병의 먹잇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병이 보병보다는 그 위용이나 위력이 어마어마했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배나 되는 보병대와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동성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 자리에서 보병들을 상대하는 기병들은 밀려오는 보병의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자그마한 틈을 열어주고 그쪽으로 병사들이 몰려든다면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양옆에서 들이칠 생각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상황은 루카고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어, 어어···.”
“너무 많이 몰려옵니다!”
“이, 일단 막아···. 물러나!”
거대한 댐이 작은 틈 하나로 무너지듯이 루카고의 포위망도 작은 틈으로 몰려드는 프랑크 군에 의해 순식간에 돌파당했다.
양옆을 찌르고 말고 할 틈도 없이 프랑크 군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훈족 기병대를 뚫고 들어갔고, 그대로 숲속으로 도주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눈이 돌아간 루카고는 프랑크 군을 쫓게 하였고, 숲속에서 도망치는 프랑크 군과 뒤를 쫓는 훈족 기병대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돼!”
“장군, 이미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전부 사로잡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미 눈이 뒤집혀버린 루카고에게는 부하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부하의 멱살을 잡으면서 소리쳤다.
“안된다. 안된다만 하지 말고 놈들을 쫓아!”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훈족 기병대는 프랑크 군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숲속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모름지기 게르만인이라면 광대한 게르마니아의 숲과 함께 자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흙길은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했고, 밤만 되면 자신들을 노리던 맹수들의 반짝이는 눈과 함께했던 곳이지만, 그들에게는 커다란 나무가 지붕이었고 무른 땅이 바닥이었다.
그만큼 나무가 빽빽한 숲은 게르만 인들에게는 집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곳으로 훈족 기병대가 들어왔다.
“후우···. 후우···. 길이 좁은데···. 다들 어딘간 거지?”
“나는 저쪽을 둘러볼···. 저기! 저기 적이다.!”
“어디? 어디!”
“오른쪽 말이야!”
프랑크 군은 나무와 잽싼 다람쥐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달리면서 훈족 병사들을 어지럽게 만들면서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놈들이 멈춰서면은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있던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뛰어내리거나 흙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사이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튀어나와서 말 고삐를 휘어잡으니, 말들과 사람이 놀라서 바닥에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놈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죽여라!”
“모두 잡아!”
한창때에는 전성기 로마군단도 잡아먹었다는 숲과 게르만 인들의 조합에 훈족 병사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연신 두들겨 맞고 있었다.
루카고는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이 수천 명의 병사가 희생된 후였다.
훈족 병사들은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주변의 전우들과 하나둘씩 뭉치기 시작했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프랑크 군은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고서는 적들을 숲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몰아붙여라! 브레누스 장군을 구하러 가자!”
“모두 원위치로!”
병사들이 한곳에 뭉쳐서 훈족 기병대를 숲 밖으로 밀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고, 브레누스를 구해내겠다는 일념하에서 무질서하게 뛰쳐나온 프랑크 군을 맞이한 것은 울딘의 병사들이었다.
잘 준비된 병사들에게 무질서하게 뛰쳐나온 프랑크 군이 들이받았지만, 브레누스를 구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손해만 본채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냥 도망가라니까 바보 같기는···.”
“장군···. 이제 끝인 것 같습니다.”
“쯧···. 괜히 나 때문에 귀한 병사들만 피해를 보게 생겼구나···.”
“장군 탓이 아닙니다. 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이지요.”
“아닙니다. 제가 장군에게 놈들을 쫓지 말자고 했다면···!”
브레누스는 저 멀리 도망가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살폈다.
길어지는 전투에 아무리 잘 무장한 병사들이라도 적의 창칼에 쓰러져갔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서 악착같이 훈족 병사들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늘어졌지만, 예정된 죽음을 유예할 뿐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에 브레누스의 부대는 하나둘씩 쓰러져서, 종래에는 그의 주위로 서른 명의 병사들만이 살아남았다.
“쯧···. 게르마니아 놈들은 하나같이 끈질기단 말이야. 어떻게 한 놈도 항복하는 법이 없는 거지?”
“으음···. 생각보다 병사들의 피해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인근에서 새로 노예병들이라도 끌어와야 할 것 같은데···.”
“후우···. 일단 놈들에게 항복 권유라도 해봐.”
“살려주실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병사들을 준비시켜서 놈들이 다 죽을 때까지 화살을 퍼부어버려.”
“알겠습니다.”
이런 울딘의 생각도 모른 채로 브레누스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긴말은 하지 않겠다. 모두 함께해서 즐거웠고, 죽어서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먼저 간 형제들의 복수를 하려면 지옥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히히히.”
“하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로구나.”
“장군과 다른 이들은 천국으로 가면은···. 저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으음···. 그건 그렇구나.”
되지도 않는 농담 따먹기로 몸의 긴장을 푼 브레누스와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병사의 모습에 잔뜩 긴장한 채로 창을 겨눴다.
“누구냐!”
“우리의 왕께서 당신들에게 보내셨다.”
어눌한 게르마니아식 라틴어로 말하는 병사의 모습에 브레누스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훈족의 왕이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로군.”
“당신이 지휘관인가?”
“그래, 예의라고는 진흙탕에 처박은 녀석아.”
“예의? 어려운 말 모른다. 전하께서 당신에게 전하기를 항복하라고 하셨다.”
“그래, 너희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말이 안 통하는군.”
“너희와 나눌 것은 창칼뿐이다. 너희들도 전사라면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기보다는 창과 검으로 대화해야지 않겠나?”
브레누스의 축객령에 전령은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서는 물러났다. 전령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훈족 병사들은 일제히 활을 쏠 준비를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레누스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하하하! 저놈들이 우리가 두려워서 활로 끝장을 낼 생각이로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유쾌하게 한참이나 웃어대던 그들이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니 그마저도 오래가질 못했다.
“쯧···. 그냥 먼저 도망갈 걸 그랬나···.”
“그러니까 먼저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지는 것 같군.”
“장군께서 그런 철학적인 말을 하실 줄이야···.”
“철학은 무슨···. 저 언덕 너머에서 떡하니 지원군이 등장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에이···. 그런 일이 가능하겠···???”
“???”
브레누스가 가르친 손끝 너머에 있는 언덕 위에 사람의 형상이 올라오자 브레누스와 부하들은 오히려 당황하면서 눈을 비볐다.
“아니, 이게 무슨···.”
“프랑크 군이 완전히 박살 난 것 같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네···. 전하의 명령으로 움직이긴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원···.”
“어, 저기 브레누스 장군 아닙니까? 적들에게 포위당한 것 같은데···.”
“쯧쯧···. 곰 같은 놈이라고 놀려대다 보니, 이제는 진짜로 곰처럼 사냥당하고 있군.”
게지카는 브레누스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일단 브레누스만 구해서 이곳을 벗어난다. 가볍게 친구나 만나러 왔더니만···. 이게 무슨 일인지···.”
게지카가 끌고 온 병사들은 고작 기병 오백 명이 끝이었다. 마리우스의 명령에 다급하게 군영의 위치를 바꾸고서는 브레누스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자 찾아왔던 것인데···. 정작 당사자는 훈족과 피나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울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게지카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지원군이 왔다고? 인근에 있던 부대와 주기적으로 주고받던 연락책이 있었던 건가? 그게 끊기니 찾아온 것이고?’
‘그렇다면 적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터···. 하지만 이 모든 게 나를 함정에 끌어들이려는 마리우스 놈의 작전이라면?’
‘이곳에서의 승부는 우리의 승리로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전략적인 목표는 시작도 전에 엎어지게 생겼군···. 이대로 물러나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나?’
하지만 울딘의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물러난다.”
“예? 적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이대로 몰아붙이면···.”
“아니, 일단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본다.”
“예, 알겠습니다···.”
부하들은 조금 아쉽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울딘은 개의치 않고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훈족 병사들이 물러나기는 했으나, 단숨에 물러나지는 않았고 전장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갑옷과 장비들을 벗겨가는 여유까지 부리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덕분에 죽다 살아난 브레누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게지카와 울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