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4
파라몬드가 립스크로 돌아올 때쯤에는 이미 해가 기울고 달이 뜬 한밤중이었다.
그때까지 잠도 자지 않고서 전군을 대기시켰던 마리우스는 파라몬드를 크게 반겼다.
“파라몬드, 무사했군!”
“전부 전하의 도움 덕분입니다.”
“나는 여기 가만히 있었는데···?”
마리우스의 물음에 파라몬드가 돌격대원 한 명을 불러서 마리우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흠···.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횃불을 가져와라!”
파라몬드는 돌격대원의 갑옷에 난 흠집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말했다.
“이 흠집들이 보이십니까?”
“그게 다 뭔가?”
“이번 전투에서 레벤스라움이 튕겨낸 적의 화살과 창들이 만든 흠집들입니다.”
“성능 하나는 확실하구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키무스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출발할 때쯤에 레긴이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몸이 괜찮았으면 좋겠습니다. 각하.”
“그래, 더 써먹으려면 멀쩡해야지···. 레긴을 돌보는 의사에게 신경 써서 돌보라고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마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벤스라움’ 갑옷을 다시금 둘러봤다.
여기저기 긁히고 흠집이 생기기는 했으나, 어딘가가 깨지거나 부서진 곳은 없었다.
그만큼 잘 만든 갑옷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풀 플레이트 갑옷의 여유분이 얼마나 있지?”
“아마 보급 수레에 오백 벌 정도 더 있을 겁니다.”
“오백 벌이라···. 레긴이 쓰러질 만도 하군···. 아무튼 그걸 다른 병사들에게 착용시킬 수 있겠나?”
“어···. 글쎄요···? 이건 돌격대의 여유 물품이라···.”
데키무스가 슬그머니 파라몬드의 눈치를 살피자, 파라몬드가 별문제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야 문제없을 겁니다. 이번 전투에서 갑옷의 강도를 확인해봤는데, 몇 주 정도는 별다른 정비 없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군요. 각하.”
“그래도 여유분은 있어야 할 테니, 이백 벌만 남겨두고 나머지 삼백 벌로 다른 이들을 무장시키게.”
“근위대로 말입니까?”
“아니.”
마리우스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보이는 미소를 짓기 시작하자, 데키무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병들한테 입히면 좋을 것 같은데, 기병 전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도 있고 말이야.”
“어차피 수적으로는 밀려도 질적으로는 이쪽이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병들에게 입히시는 게···.”
데키무스의 반대에 마리우스가 곁에 있던 가이세리크에게 물었다.
“가이세리크, 네가 이끄는 부대가 훈족 기마대와 정면으로 붙었다고 했지?”
“예? 그···. 정면으로 붙은 것은 아니고, 적의 뒤를 들이친 거긴 한데···.”
“아무튼, 그게 그거지, 그래서 아군피해는 어느 정도라고 했었지?”
“게르마니아 기병대에서···. 훈족 기마대와 맞붙었던 중기병 대는 서른 명 정도가 크게 다치긴 했지만, 자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정도였고, 경기병들은 부상 37명의 사망자 2명입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군. 이게 다 좋은 장비 덕분이겠지 데키무스?”
데키무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장비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는 기병보다는 보병전력의 확충으로 가는 것이···.”
“기병이 좋다니까 그러네.”
“각하, 아무리 봐도 보병 쪽이 더 효율이 높습니다.”
“어허, 통계가 말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저 훈족 놈들을 상대로도 기병 전력이 우위를 보이잖아?”
“그거야 적이 아군의 약점을 모르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적들도 대응책을 찾는다면 다시 뒤집히겠지요.”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데키무스와 마리우스 간의 의견충돌이 이어지자, 파라몬드가 조심스레 둘 사이를 중재하며 말했다.
“당장 돌격대를 확충한다고 해도···. 그동안 합을 맞췄던 이들이 아닌지라 손발이 맞지 않아서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은 듯싶습니다.”
“내가 뭐랬어!”
“으음···. 당사자가 그렇다면야···.”
“그럼 갑옷은 기병들에게 돌리는 거로 하고···. 다른 이들과 연락은 했겠지?”
“예, 인근에 있는 게지카와 브레누스에 전령을 보내놨으니, 조만간에 움직일 겁니다.”
******
브레누스는 립스크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야영지를 차리고서는 훈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데키무스가 보낸 전령이 작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언제 움직이냐가 문제였다.
“일단은 여러 번의 전투로 적도 피곤할 테니, 내일 아침쯤에 움직이면 되려나?”
“에이···. 설마 적들이 쉬지도 않고 전투를 치렀는데, 사방에 정찰병을 뿌려서 우리를 찾아내기라도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병사들을 쉬게 하고 내일 아침에 훈족들을 찾아 나선다.”
“예!”
브레누스의 판단은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다만, 그 상대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울딘이 이끄는 훈족은 유목민족이었다.
유목민족들은 초원을 떠돌면서 소소하게 농사를 짓거라 가축을 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는 하는데, 이러다 보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고, 항상 움직이는 삶 속에서 말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말과 함께했고, 덕분에 기마술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면···.
“마리우스가 립스크에 자리 잡았다고?”
“예,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력은 2만 명에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그래? 이건···. 한번 들어와 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이로군···.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이 정도로 대놓고 함정을 파놨다는 건···. 이곳에서 싸우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스쳐 지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울딘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상관없긴 하지만···. 사방에 퍼져있는 게르만 놈들이 그걸 눈뜨고 지켜볼 리가 없다. 우리가 이곳까지 오면서 본 숲과 늪지대가 몇 개인가?”
“아···. 그렇군요. 게르만 놈들이 숲에 숨어서 우릴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여기서 한번 마리우스를 꺾어버리고 갈 필요가 있어, 운이 좋다면은 마리우스를 사로잡아서 단번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겠지.”
“흠···. 그렇다고는 해도···. 말하기 죄송스럽지만, 적의 기병 전력이 아군보다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주변에 매복한 병사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부하의 말에 울딘이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 아니라 자신감이 가득 찬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건 괜찮아, 마리우스 녀석은 나름대로 함정을 파둔다고 준비해뒀겠지만···. 함정을 파뒀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역으로 놈들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
“오오···. 역시 전하십니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정찰병들을 널리 퍼뜨려서 매복 중인 적 병사들을 찾아라!”
그렇게 루카고가 이끌고 있던 병사들은 연이은 전투와 행군 뒤에도 쉬지도 못한 채로 정찰에 나섰다.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주변을 정찰하던 그런 병사들이 브레누스의 야영지를 찾아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지, 역시 함정이었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병사들을 움직여서 야습을 거시겠습니까?”
“아니지, 일단은 병사들이 많이 지쳤으니···.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역으로 함정을 파서 적을 유인해낸다.”
“오오···. 각개격파하실 생각이 시로군요.”
“그래, 조각난 녀석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서 마지막에 마리우스를 잡는다.”
울딘의 명령 아래 훈족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울딘의 야영지에서 기병들이 빠져나갔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보병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한창 야영지를 정리하고는 훈족을 찾으러 출발하려던 브레누스와 그의 병사들은 숲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먼 거리에서 서성거리는 훈족 병사 하나를 발견했다.
“훈족 정찰병 같은데요.”
“그럼 사로잡아야지!”
“아군 기병들이 따라붙었는데, 놈들의 기마술이 보통이 아닌지라 그냥 놓쳐버렸습니다.”
“그럼 이곳도 노출된 게 아닌가? 흠···. 일단 계속 이동하는 거로 하지.”
브레누스는 바쁘게 병사들을 움직이면서 훈족 병사들을 찾기 시작했으나, 보이는 것은 정찰병들뿐이었고, 본대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브레누스는 울딘이 살살 흔들고 있는 정찰병이라는 꼬리를 따라서 숲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쯤에 서야 언덕 아래 평원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울딘의 본대와 마주쳤다.
평소에 복잡한 명령은 내리지 않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하는 마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브레누스는 훈족을 유인하는 것에 집중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루카고, 너는 적의 퇴로를 막아라.”
“예, 전하!”
훈족의 기병대가 재빨리 평원을 가로질러서 숲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으려 하자, 브레누스가 당황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퇴로가 끊기면 전멸이다! 놈들을 막아!”
브레누스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적 기병대를 따라나섰고, 이를 지켜보던 울딘은 브레누스 진형을 혼란스러움을 보며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움직인다. 우리도 적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움직인다.”
울딘의 병사들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뒤로 움직이는 적의 모습에 브레누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현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했으나, 그의 머리로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브레누스는 결국 검을 뽑아 들면서 소리쳤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 중앙에 힘을 집중해서 숲속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려면···. 뒤에서 몰려오는 훈족 병사들을 막을 사람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히 내가 가야지.”
브레누스의 말에 부하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장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이끌어주셔야지 왜 장군께서 뒤에 남으신다는 말씀입니까? 부디 말을 거둬주십시오.”
“맞습니다. 장군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프랑크족은 누가 이끈단 말입니까?”
이에 브레누스가 거칠게 콧김을 뿜으면서 말했다.
“프랑크족이야···. 게지카와 파라몬드가 있으니, 둘 중의 한 명이 알아서 잘 이끌 것이야! 그리고 이번 일을 벌인 게 나인데,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장군! 장군께서 이곳에서 험한 꼴을 당하신다면···. 마리우스 전하께서 크게 슬퍼하실 겁니다···.”
브레누스는 마리우스라는 이름에 흠칫했지만, 한숨을 내쉬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고, 책임을 져야 해. 그렇기에 전하께서 프랑크 공작이라는 직위까지 내려주시지 않았는가? 더는 말리지 말게.”
“장군···.”
“그리고 내가 여기서 죽는 것도 아닌데, 다들 너무 걱정만 앞서고 있군.”
브레누스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모두 살아서 립스크에서 보도록 하지···. 자네들은 무조건 립스크까지 달리는 것만 생각하게나.”
“예, 장군!”
프랑크 군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루카고는 혀를 차면서 병사들을 끌어모았다.
“쯧···. 역시나 이쪽으로 몰려드는군.”
“장군···. 말에서 내려서 싸워야 할까요?”
“아니, 모름지기 사냥을 할 때도 사방을 전부 틀어막아 버리면 사냥감이 난폭해지는 법.”
“그럼 어떻게···?”
“한쪽 길을 터주고 녀석들이 그쪽으로 유도한 다음에 놈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거지.”
“그럴듯하긴 한데···. 전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까?”
“아니, 내 생각이다.”
“예? 전하께 말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셨다가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부하의 지적에도 지난 여러 번의 전투에서의 실수들로 울딘의 눈 밖에 난 루카고로서는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워서 만회하고자 했고, 이에 부하의 말을 무시했다.
“일단은 내 말대로 하게.”
“예, 알겠습니다···. 부대 정렬!”
루카고는 병사들을 움직여서 포위진의 간격을 재조정했고, 프랑크 군은 루카고가 이끄는 기병대의 대열사이에 난 조그마한 빈틈을 주목했다.
“저곳으로 빠져나가면 되겠군요.”
“일단 빠져나간 다음에는···. 장군도 모셔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브레누스 장군을 데려가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다들 저마다의 생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