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3
울딘은 갑작스레 나타난 기병들의 모습에 놀랐다.
주변에 또 다른 적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지라 굉장히 놀란 울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돌진해오는 가이세리크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저놈은 뭔가?”
“어···. 스스로를 고디기젤의 아들 가이세리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가이세리크? 그건 뭐 하는 놈이야.”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수가 적다고는 해도, 적 기병대의 장비와 기동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으음···.”
울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이세리크는 거의 반쯤 눈을 까뒤집은 채로 훈족 대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이세리크의 휘하에 있던 중기병 2000명은 막시무스의 부대를 향해 달려가는 훈족 기병대의 뒤를 따라갔고, 말이다.
“뒤에 적이다..!”
“막시무스 장군을 구해라!”
이윽고 훈족 기병대가 말머리를 반전하여 게르마니아 기병대와 맞붙었지만, 이미 한껏 기세가 오르고 품질 좋은 장비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중무장한 게르마니아 기병대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의 접전으로 훈족 기병대의 기세가 꺾였고, 두 번째 접전에서 승부가 갈렸다.
“지원군이다! 아군을 도와라!”
“와아아-!”
뒤에서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던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가이세리크와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모습에 환호하면서 싸움에 끼어드니, 기세가 꺾인 훈족 기병대가 패퇴했다.
한편,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3000명의 경기병은 울딘이 있는 훈족 보병대열까지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대며 격하게 저항하는 적의 모습에 별다른 피해도 못 주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이, 일단 이대로 물러난다.!”
나름 용맹하게 울딘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갔던 가이세리크지만, 적의 거센 저항에 별다른 재미는 보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그러다가도 다시금 말머리를 돌려서 울딘의 진형을 살짝 찔러보는 것을 반복하던 가이세리크는 울딘 부대의 빈틈을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쫓을까요?”
“루카고는 어디 있지? 내 기병대는 어디 갔어!”
“어, 음···. 지금 뒤로 물러나서 전력을 재정비하는 모양입니다.”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
“아, 알겠습니다!”
완벽하게 전투의 승기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던 울딘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는 전장을 뒤집어놓는 가이세리크의 모습에 언짢음을 느끼고 있었다.
훈족이 자랑하던 기병 전력도 수적으로 여섯 배 정도 차이나는 게르마니아 기병대에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그의 화를 자극했고 말이다.
물론 적의 중기병들은 마리우스가 있는 돈, 없는 돈을 발라가면서 만든 정예병들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기병대를 이끌던 루카고의 패배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전하···.”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네가 잘 알고 있을 테니, 내 입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가서 저 어린놈과 늙은 놈을 잡아 와라. 그게 네가 살 길이다.”
“알겠습니다···.”
루카고는 굉장히 굳은 표정으로 군영을 떠났다.
울딘은 병사들을 둘러보고서는 곁에 있던 부하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이대로 립스크까지 진군한다. 오늘 밤은 그곳에서 머물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아그리피넨시스까지 단숨에 진군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부대를 움직이겠습니다.”
“부상자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게 해.”
추가적인 지시까지 마친 울딘은 저 멀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로마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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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드레스덴이 뚫렸다고 합니다.”
“쯧쯧···. 적당한 때 길을 열어주라고 했더니만···. 그러지 못한 모양이군.”
“예? 처음 듣는 명령입니다만···.”
“각하께서 깜빡하고 말을 안 하신 게 아닙니까? 막시무스 장군께서 각하의 말을 무시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지요.”
“크흠···. 이봐 데키무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깜빡했을 리가 있겠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데키무스와 두런두런 떠들고 있을 때, 조용히 있던 파라몬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드레스덴에서 이곳 립스크까지는 하루 거리가 아닙니까? 지금쯤이면 울딘이 근처까지 와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막시무스와 가이세리크에게서부터 연락은 오지 않은 건가?”
“아직 아무런 연락도···.”
“흠···.”
잠시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파라몬드에 툭 던지듯이 물었다.
“당장 립스크에서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몇 명이나 있나?”
“근위대 8000명과 돌격대 300명, 급하게 소집한 민병대 4000명까지 총원 1만 2300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필요하다면 인근에서 예비군을 소집하면 3만 명 정도는 더 모일 것 같습니다.”
“민병대? 민병대까지 소집한 건가?”
“아, 일단 민병대로 분류하기는 했지만···. 인근에 거주하던 예비군이 다시 모인 겁니다.”
“뭐? 예비군?”
“근무 일수를 채우고 전역한 이들이 전하를 돕고 싶다고 무기를 챙겨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 그거 고마운 말이로군···.”
마리우스의 지휘 아래 개편된 게르마니아의 동원체제가 몇 년 동안 굴러간 결과 지금의 게르마니아에는 예비군전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마을마다 웬만한 성인 남성들은 훈련소에서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이수하고 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이는 새롭게 게르마니아의 영토로 편입된 라인강 너머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게르마니아는 이들을 무장시킬 장비와 급여로 나눠줄 돈이 모자랐을 뿐이지, 군인으로 쓸 수 있는 인적자원은 흘러넘쳤다.
거기에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인기가 좋은 마리우스를 돕겠다고 스스로 무장하고서 나타나는 민병대들이 속속 합류하고 있었다.
“일단은 저녁을 먹고 나서 드레스덴 쪽으로 출발하도록 하지,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돕고, 혹시나 다가오고 있는 훈족들의 위치를 파악할 겸 말이야.”
“이미 반달족이 주변을 정찰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곧 고디기젤이 정보를 물어다 줄 텐데요.”
“데키무스, 자네도 내 성격 잘 알지 않나? 나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이야.”
“어쩐지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습니다.”
병사들은 때아닌 야간행군에도 앓는 소리 한번 없이 묵묵히 마리우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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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길을 따라 행군하던 마리우스의 부대와 길을 따라서 도망가던 막시무스와 가이세리크 부대가 중간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대열이 뒤엉켰지만, 마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부터 챙기고, 모두 전투태세를 유지해라.”
“길 한복판에서 싸우시려는 겁니까?”
“그래, 아마 쫓아오는 적들이 있을 터···. 최대한 빠르게 떨쳐내고 립스크로 돌아간다.”
마리우스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막시무스와 가이세리크의 뒤를 쫓아오던 훈족 기병대와 맞닥뜨렸다.
조금 전에 게르마니아 중기병 대와의 전투에서는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기세가 꺾였던 훈족 기병대였지만, 이번에는 제대로였다.
루카고가 이끄는 훈족 기병대는 바람처럼 마리우스의 부대에 접근하더니, 툭 쏘는 벌처럼 화살과 창을 날리고서는 뒤로 물러났다.
물론 병사들도 잘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훈족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훈족의 공격이 계속될수록 병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파라몬드는 마리우스에게 퇴각을 건의했다.
“전하, 아무래도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본격적인 싸움은 아직이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만, 아군이 싸울 준비가 덜되 있습니다. 적 또한 그리 오랫동안 공격을 지속하지는 못할 테니, 본대가 합류하기 전에 물러나야 합니다.”
“으음···. 그래, 자네 판단이 맞겠군.”
훈족 기병대의 공세가 조금 시들시들해졌을 무렵.
마리우스는 후퇴를 결정했고, 파라몬드가 뒤에 남아서 적을 막는 동안 마리우스가 부상병들을 먼저 데리고서 립스크까지 물러났다.
“적이 물러난다.! 지금이 기회야!”
“장군, 아직 적들이 전부 물러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기세가 올랐을 때 적을 쳐야지 무슨 소리인가!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루카고가 이끄는 훈족 기마대는 순식간에 파라몬드로 달려들었다.
돌격대와 소수의 근위대만을 데리고서 뒤에 남은 파라몬드는 다급하게 대형을 짜면서 적을 맞이했다.
“최대한 밀착해서 적의 돌파를 막아라! 날아오는 화살이나 창들은 피하지 말고 방패로 막아서!”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돌격대가 방패처럼 앞장섰고, 그 뒤를 근위대가 받쳤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던 훈족 기마대는 돌격전에 활을 쏘고 창을 던져서 대열을 흩트리려 했지만, 돌격대는 갑옷을 믿고 굳건하게 버텼다.
레벤스라움에 닿은 창과 화살은 갑옷을 뚫기는커녕 닿자마자 부러지거나 빗겨나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본 루카고는 병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게 하고서는 주변을 돌면서 연신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활을 쏘고 창을 던져도 적은 아무런 피해 없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었고, 보다 못한 루카고가 거의 영 거리에서 쏘아낸 화살도 튕겨내자 오히려 훈족이 지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달려오고 격렬한 전투를 두 번이나 연이어서 하려다 보니, 말들이 퍼져버렸는지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고, 말들 못지않게 지친 병사들 또한 어느샌가 활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둔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파라몬드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고향을 짓밟은 훈족 놈들을 혼내줘라!”
“우오오오!”
기동성을 잃은 기병은 곧 보병들의 먹이였다.
수적 차이는 몇 배나 났지만, 가만히 진형을 짜고 적의 공세를 맞받아치던 파라몬드의 병사들은 창을 내질러서 훈족 기병들을 말 위에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 이거 놔···!”
“끄, 끌려간다.!”
동료가 끌려가는 모습에 다른 병사들이 도우려고 했지만, 그들 역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뿐이었다.
병사들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본 루카고는 다시금 병사들을 수습하려 했지만,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말발굽 소리와 무기들이 갑옷을 긁는 소리로 시끄러워진 전장에서 병사들을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쯧···.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영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니까 전하께서도 이해해 주시겠지.”
“물러나는 겁니까?”
“그래, 뒤로 물러난다. 퇴각 나팔을 불어!”
퇴각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훈족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뒤로 물러났고, 파라몬드와 병사들은 그런 훈족의 뒤를 쫓았지만, 그들은 들이닥칠 때만큼이나 재빠르게 도망친 뒤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전투가 끝나고, 파라몬드는 전장을 아직 수습하지도 못하고 최대한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서 립스크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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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졌다고?”
“졌다기보다는···. 교전 끝에 서로 물러난 게···.”
“그게 진 거지 뭐야!”
울딘은 루카고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오늘 하루에만 몇 번째인가! 이런 덜떨어지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전하, 진정하시고 제 말도 들어주십시오···.”
“끄응···. 그래, 어디 변명이라도 해보아라.”
울딘이 화를 삭이면서 묻자, 루카고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이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제가 적을 맞닥뜨렸을 때는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뭐?”
“그런데···. 놈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우리의 모든 공격을 튕겨냈습니다!”
“쯧···.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는구나! 루카고.”
울딘의 말에 루카고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핑계가 아닙니다! 정말로 놈들의 갑옷이 화살과 창을 튕겨내면서 어떤 공격도 먹히질 않았습니다!”
울딘은 신뢰가 가지 않았는지, 침음성을 흘리면서 루카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루카고는 절박하게 울딘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의 새로운 무기는 아군 병사들을 말 위에서 순식간에 끌어내렸습니다.”
“말 위에서 끌어 내렸다고?”
“예, 아군이 잠시 뒤엉켜서 멈추어 서자마다, 적들은 강변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듯이 병사들을 말 위에서 끌어 내리고서는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전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군에게도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으음···.”
루카고의 말에 울딘은 고민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