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2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서 훈족의 병사들에게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놈들이 성문으로 간다! 놈들을 막아라!”
“장군, 이제는 예비대도 없고 전선은 계속해서 밀리는 중입니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물러나면은 미처 대피를 마치지 못한 피난민들이 몰살당한다. 최대한 적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젠장···. 알겠습니다!”
막시무스는 온 힘을 다해서 저항했다.
그는 제법 유능한 장군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게르마니아의 국경을 지키면서 그 능력을 입증한 이였다.
지난 마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정복 당시에는 후방에서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썼던 이였다.
중앙의 어떤 지원도 없이 수십 년 동안 게르마니아를 지켜온 막시무스와 그의 군대는 훈족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놈들이 장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라!”
“올라온 놈들은 그냥 밀어서 떨어트려!”
로마군이 죽을힘을 다해가면서 저항하고 있을 때, 밑에서 벽을 넘어가는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던 울딘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막시무스와 그의 군대의 모습에 적잖이 감탄했다.
“고작 저 정도의 군대로 우리 대군을 막아서고 있다니, 지휘관이 뛰어난 인물인가 보군.”
“그래 봤자지요. 전하의 병사들이 용맹하게 장벽을 넘는 모습을 보십시오. 게르마니아는 이제부터 전하의 분노를 맛보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 장벽을 돌파하고 나서는 최대한 빨리 아그리피넨시스로 가서 그곳을 함락시킨다.”
“어···. 그대로 직행하면 퇴각로가 막힐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울딘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새로 사귄 친구가 도와줄 것이야.”
******
올리브리우스는 울딘으로부터 온 밀사를 만나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훈족의 지배자이시자 초원의 지배자이신 전하께서는 로마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황제인 올리브리우스 님의 도움을 얻길 원하십니다.”
“내가 당신네를 도와줘서 얻는 게 뭐지?”
“폐하께서는 스틸리코 장군을 치워버리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허···. 자네들이 나를 대신해서 스틸리코를 치워주겠다 이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밀사의 말을 들은 올리브리우스는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 정도도 하지 못해서 자네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흠···. 뭔가 더 원하는 게 있으신 겁니까?”
“그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자네들이 내 요구조건을 알아내야지 않겠나?”
“으음···. 갑자기 그렇게 나오시니 당황스럽군요.”
“당황스러울 게 있나? 협상이란 것은 상대가 뭘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그걸 이용할 줄 알아야지. 나는 자네들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데, 자네들은 내가 뭘 원하는지도 제대로 짚지 못하는군.”
올리브리우스는 태연하게 턱을 괴면서 말했다.
“자, 다 들었으면 말해보게.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밀사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올리브리우스를 바라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밀사의 모습에 올리브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후우···. 그래서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뭔가.”
“저, 저희는···. 아니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폐하께서 게르마니아로 들어간 훈족 병사들의 보급을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보고 로마의 적을 도우라는 건가?”
“저희는 마리우스의 적이지 로마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폐하의 적 또한 마리우스가 아니었는지요?”
그 말을 들은 올리브리우스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 전혀 아니군.”
“폐하? 폐하!”
“창고에 남아도는 무기들과 식량들이라면 싼값에 넘겨줄 수는 있네, 그건 엄연히 거래니까 말이야! 그 이상은 도와줄 수가 없군.”
“폐하, 그럼 길이라도 열어주십시오!”
“길을 열어달라고? 그건 무슨 말인가.”
“그것이···.”
한참이나 밀사의 말을 듣던 올리브리우스는 이전보다는 흥미가 생겼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들이 아그리피넨시스를 함락시키고서는 마리우스를 사로잡아서 내게 바치는 거로 무기와 식량에 대한 대금을 대신하겠다?”
“예, 그렇습니다···.”
“흠···.”
올리브리우스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대신에 내 동생은 무사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잘 돌봐주실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훈족의 밀사는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올리브리우스는 은밀하게 알라리크를 불러서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모두 비밀이니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게.”
“무슨 내용이시기에 그렇습니까?”
“훈족의 밀사가 방금 왔다 간 것은 잘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까? 처음 알았···.”
“내 주변에 감시를 붙여둔 건 다 알고 있으니, 괜히 변명하거나 말 돌리지는 말게.”
“크흠···. 제가 언제 그랬다고···.”
“쓸데없는 말은 여기까지만 하고···. 자네에게 시킬 일이 있네.”
올리브리우스의 말에 알라리크의 눈이 활기를 되찾으며 올리브리우스에 물었다.
“시킬 일이라면···. 또 제 병사들을 빌려달라고 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자네가 직접 가줘야 할 일이야.”
“직접이라면···. 로마를 벌어나야겠군요.”
“그래, 자네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플로렌스로 가주게나,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움직이는 걸 막아줘야겠어.”
“마리우스에게 가려는 지원군을 막는 것입니까?”
알라리크의 질문에 올리브리우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네는 마리우스가 질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본래 전쟁이라는 것이, 어떻게 굴러갈지 모를 일이니까요.”
“하하하···. 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여태껏 마리우스가 전쟁에 나가서 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이번이 그 첫 번째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건 모를 일이지. 아무튼, 자네는 플로렌스에 주둔하면서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막고, 게르마니아에서 도망쳐 내려오는 훈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훈족이 도망쳐 내려온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알라리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브리우스를 바라봤지만, 평소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
한편, 게르마니아 장벽의 남쪽인 드레스덴에서는 끝없는 혈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전투는 여덟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로마군은 여전히 저항 중이었다.
오히려 한창 공격 중이던 훈족의 병사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전하, 아무래도 오늘 저 벽을 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많이 지친 탓에 더는 투입할 병사들도 없습니다.”
“흠···. 적의 저항이 제법 매섭군. 고작 저만한 벽 하나를 넘는 것이 이렇게나 힘드니 말이야.”
“아무래도 공성전은 평지에서의 회전과는 굉장히 다르니까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일단은 병사들을 뒤로 물리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울딘의 전투 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메뚜기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어 있던 훈족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흩어져서 군영으로 돌아갔다.
전투가 끝나고 난 후에 군영을 둘러보던 막시무스는 부관의 보고를 들으면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남은 병사는 800명뿐입니다. 대부분이 죽거나 크게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피난민들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 무사히 후방으로 대피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전장에서 제법 떨어졌겠지요.”
“후우···. 슬슬 물러나야 할 때로군.”
“물러나려면 오늘 밤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가이세리크에게 전령을 보내게, 우리는 드레스덴에서 립스크로 물러난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여덟 시간 동안의 전투로 병사들이 많이 지친 탓에 어지간한 장비들은 전부 내버려 두고 후퇴해야만 했고, 부상병들을 실어나를 수레도 모자라서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걸어서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행군대열은 늘어질 수밖에 없었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행군했지만, 막시무스의 부대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도 립스크에 도착하지 못했다.
“후, 후방에 훈족이···!”
“후우···. 나름대로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따라잡혀 버렸군.”
“아무래도 아군 행렬이 많이 뒤처지긴 했지요.”
막시무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병사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어딘가가 깨지고 부서진 갑옷에 붕대를 칭칭 감은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리는 눈으로 막시무스를 돌아보고 있었다.
훈족 기병들은 로마군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저 멀리서 로마군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치고 다친 병사들만 가득한 상황 속에서 적의 기병대를 맞닥뜨린 막시무스가 부관에게 물었다.
“지금 적과 맞서 싸우라면, 싸울 수 있겠나?”
“힘들겠지요···. 아무리 잘 단련된 병사들이라고는 해도···. 전투 이후에 밤샘 행군으로 퍼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렇겠지···. 그럼 항복해야 하나.”
“저들이 항복한다고 받아주겠습니까?”
“내 목이면 병사들은 살려주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관의 말대로 훈족은 항복을 권유하거나, 사절을 보내오는 등의 권유도 없이 느긋하게 로마군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마군이 궁지에 몰렸군.”
“아무래도 어제 전투가 저들의 마지막 전투였던 모양입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로군요.”
“제법 끈질긴 놈들이었지.”
“그럼 포로를 수용할만한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부하의 말에 울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는 마리우스가 있는 아그리피넨시스까지 일직선으로 달린다. 멀리 있는 길을 갈 때는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겠지.”
“그, 그 말씀은···.”
“포로는 필요 없다. 마리우스가 놈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복했으니, 우리는 우리식대로 보복한다.”
“알겠습니다···.”
울딘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훈족 병사들이 다급하게 공격을 준비했다.
울딘의 말 한마디에 로마군 수천 명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이가 있었는데···.
“장군, 저러다가 아군이 전부 죽겠습니다!”
“나도 알아···. 안다고···.”
오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있던 가이세리크는 막시무스가 보낸 전령의 인도에 따라서 그의 뒤를 쫓아왔지만, 운 나쁘게도 훈족과 딱 마주쳐버렸다.
가이세리크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과 막시무스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합쳐봐도 족히 다섯 배에서 여섯 배는 많아 보이는 적들의 모습에 가이세리크는 살짝 겁을 먹었다.
“장군···.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끄응···.”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기병대는 마리우스의 휘하에 있는 게르마니아 최정예부대였고 여러 전장에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이끄는 가이세리크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앞에서야 호탕하고 대범하게 큰소리쳤으나, 정작 실전에서 훈족의 압도적인 대군을 맞이하니 가이세리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났다가는 아군이 위험한 상황이었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장군! 빨리 아군을 구해야 합니다.”
“적이···. 너무 많은데···.”
“빨리 뭐라도 해야 합니다.”
부관의 재촉에 조금 전까지 겁을 집어 먹었던 가이세리크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돌격해서 적과 맞닥뜨리는 것은 지푸라기 더미를 안고서 불더미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훈족은 숲속에 숨어있는 가이세리크와 병사들의 위치를 아직 모르는 듯이 전방에 있는 막시무스의 부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이세리크는 바로 그 점에 집중했다.
“적이 막시무스의 부대를 공격하면···. 기병대로 단숨에 휩쓸려고 하겠지?”
“예? 뭐···.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럼···. 본진에는 보병들만이 남아있겠군.”
“그렇게···. 설마?”
“벼, 병사를 둘로 쪼갤 수 있겠나?”
가이세리크의 두 눈동자가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의 뒤로 훈족의 병사들의 공격 개시 나팔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해, 해보겠습니다···!”
“중기병들···. 중기병들은 막시무스의 부대를 구하고, 경기병들은···. 나, 나와 함께 울딘을 치, 친다···.”
가이세리크는 잔뜩 긴장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의 부하들 또한 가이세리크의 미친것 같은 소리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훈족의 기병들이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가이세리크의 병사들과 훈족 병사들의 수적 차이는 몇 배나 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쪼개서 적을 나눠서 친다.?
제갈량이 가이세리크의 작전을 들었다면 마속 대신 그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장비는 훈족보다 뛰어났고, 훈련도 또한 그에 못지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후···.”
“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막시무스 장군은 뭘 하고 계시는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그래? 그렇군···. 역시···. 우, 우리도 슬슬 출발한다···! 너는 적 기병대의 뒤를 후려치고, 나는 우, 울딘을···.”
전장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감에 말을 더듬던 가이세리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굳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변의 공기를 힘차게 빨아들이고서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면서 소리쳤다.
“말 위에 올라탄 개 같은 녀석들아! 고디기젤의 아들 가이세리크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