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87)

오랜 동지들 - 1

게르마니아가 전시상태에 돌입했다는 소식에 불안하다는 듯이 전전긍긍하던 호노리우스는 조심스럽게 폴로에게 물었다.

“이봐 폴로.”

“예, 폐하.”

“혹시, 게르마니아에서 안토니나랑 테오도시우스만 빼 올 수는 없겠지?”

“차라리 울딘의 목을 베오라고 하십시오.”

“다들 훈족에 눈이 돌아가 있을 텐데, 슬쩍 가서 데려오면 되는 거 아니야?”

호노리우스의 말에 폴로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렇게 쉬워 보이시면 직접 다녀오시지요.”

“끄응···. 역시 그렇겠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차라리 마리우스 각하께 인정받으시는 게 더 빠르실 거라니까요? 발명품 중에서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걸 만들어서 보내보시지요.”

“발명품···? 아, 연금술 말하는 거야?”

“예, 그거 말입니다. 궁정 예산의 삼 분의 일을 끌어다 쓰시면서도 성과가 없으니 궁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흠···. 쓸만한 거라···.”

호노리우스는 잠시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떠오르는 것 중에서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최근에 만든 표백제는 이미 궁궐 내에서도 쓰고 있었고, 새로 고용한 조수들이 조금씩 만들면서 시중에 내다 팔고 있었고, 미역에서 추출한 붉은 물약은 의사들이 연구 중이었다.

“딱히 없는데···.”

“지난번에 게르마니아에서 만든 신형대장간 같은 걸 또 만들어주면 각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흠···.”

그러던 중에 불현듯이 호노리우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동방에서 온 상인들이 가져온 땅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물이 그것이었는데, 얼마 전에 그 검은 물에 불이 붙는다는 점과 이것을 가열하면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검은 물을 가열하고 남은 찌꺼기들과 검은 물을 잘 섞어서 불을 붙이면 물로도 끄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말이다.

“검은 물···. 그게 있었지?”

“예? 또 뭘 만들어놓으신 겁니까.”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이걸로 뭘 만들려고 했었는데 말이지···. 어디 있더라···.”

호노리우스는 황궁에 있는 개인 창고의 한구석에서 자그마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아, 예전에 마리우스가 신전문을 열 때 물을 끓여서 생긴 증기 힘을 이용해서 열었다고 하더라고.”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간단해, 이건 커다란 솥이야!”

“아···. 솥이군요···. 그런데 뜬금없이 솥은 왜 꺼내신 겁니까? 점심은 조금 전에 먹지 않았습니까.”

“폴로, 가끔은 머리를 써보는 게 어때?”

“그냥 설명해주시면 될 텐데, 거 참···.”

폴로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호노리우스를 바라보자, 호노리우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걸로 그 검은 물을 뿜어내는 거지.”

“예? 어떻게 말입니까?”

폴로의 질문에 호노리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에 들어갔지만, 대부분은 폴로가 알아듣기 난해하고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호노리우스는 신나서 설명했지만, 그중에서 폴로가 알아들은 것은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저 압축해뒀던 증기의 힘을 이용해서 불을 붙인 검은 물을 뿜어내고, 적을 맞힌다.

그게 끝이었다.

호노리우스는 이 간단한 설명을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 동안이나 떠들어댔고, 폴로의 귀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쯤에야 호노리우스의 말이 끝났다.

“그러니까 간단히 설명하자면···.”

“압축되어있는 증기의 힘으로 불을 뿜어내겠다. 그거 아닙니까?”

“바로 그거지.”

“그런데 듣기만 해도 굉장히 복잡하고 일반적인 병사들이 손쉽게 다루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걸 혼란스러운 야전에서 운용할 수 있겠습니까?”

“쓸 수 있지 않을까···? 다루는 사람들이야 내 조수들을 보내면 될 일이고, 싸우는 중에라도···.”

“화살이 날아들고, 적이 눈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언제 물을 끓여서 증기를 저장하고, 언제 검은 물을 저 안에 넣습니까?”

“안 되려나?”

호노리우스는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폴로가 말했다.

“이건 야전에서 쓸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해봤자 공성전 때나 쓸 수 있겠군요.”

“그럼 마리우스한테는 도움이 안 되려나.”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몇 대를 보내기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총 몇 대나 있습니까?”

“음···. 실험용으로 하나, 보관용으로 하나 만들어뒀는데, 보관용을 보내면 되겠지?”

“그럼 그렇게 하지요.”

******

호노리우스가 만든 기괴한 발명품이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할 때쯤.

마리우스는 레벤스라움 공방의 주인이자 갑옷장인 레긴을 만나서 자신이 생각해둔 무기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 위에 탄 적을 견제하면서도 끌어내릴 수 있는 6푸스에서 8푸스정도(약 170cm~200cm)의 창을 만들라는 거로군요···.”

“가능하겠나?”

“흠···. 다른 기준들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말 위의 적을 견제하면서도 끌어내릴 만한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며칠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일주일 주겠다.”

“예?”

“돈과 재료는 필요한 만큼 줄 테니, 자네는 일주일 안에 무기의 시제품을 만들어오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무리입니다. 제게 시간과 예산을 충분히 주신다면 말씀하신 것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일주일 이상은 줄수가 없네, 어떻게든 그럴싸한 것만 만들어오게.”

마리우스의 말에 레긴이 울상을 지었으나, 마리우스는 단호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리우스가 다녀간 이후로 레긴은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업무에 매달렸는데, 가장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무기를 구상하는 과정이었다.

“기병들을 견제하면서 끌어내릴 수 있는 무기가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 무슨 좋은 생각들 없나?”

“적을 끌어내리는 거라면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적을 견제하려면 끝에 뾰족한 창날을 만들어두면 딱 맞겠군요.”

“아니지, 달려오는 놈들을 끌어내리려면은 일단 멈춰 세우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기병들을 끌어내리고 난 다음에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일반적인 창에다가 곡괭이처럼 꺾인 창날을 옆에 다는 겁니다.”

“흠···. 가만히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은데···.”

“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새로 만들 필요도 없고, 기존의 창들을 약간 수정하면 끝나지 않겠습니까?”

조수의 말에 레긴이 감탄했다.

“자네 말이 맞아! 당장 시도해보지!”

마리우스가 레벤스라움을 방문한 지 이틀 만에 첫 시제품을 받아들 수 있었다.

참나무로 만든 늘씬한 창대에 끝에는 뾰족한 송곳과 같은 창끝과 ㄱ자 모양으로 꺾여있는 창날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게 시제품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모양이 참···.”

“이건 아무리 봐도 무기라는 생각보다는 농기구가 떠오르는 생김새인데···.”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아무래도 급하게 만든 탓에 외형에는 신경을 못 쓴 것 같습니다만···.”

마리우스는 무기의 생김새를 보고는 실망했다.

풀 플레이트를 만들어오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레긴은 좋게 말하자면 실용적인 디자인의 선구자였다.

한 손으로 창을 잡아든 마리우스는 생각보다 가벼운 창의 무게에 감탄하고서는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에우독시아가 유달리 아끼는 도자기 하나를 해먹은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와 함께 밖으로 쫓겨났다.

“생긴 것은 좀 후줄근해도 성능 하나는 확실한데?”

“단순하게 찌르고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한 모양입니다. 이 정도면 병사들도 단순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전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부대를 이끄는 파라몬드에게 물어봐야겠어.”

마리우스의 부름에 이른 아침임에도 단번에 달려 나온 파라몬드에게 레긴이 만든 창을 보여주니, 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마치, 이게 무기인지 아니면 농사기구인지를 고민하는 듯하는 그의 표정은 창을 만져보면서 확 달라졌다.

몇 번 내지르고 당기고를 반복하던 파라몬드는 굉장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무기의 균형도 잘 맞아서 다루기가 편하고, 가벼워서 휴대성도 좋아 방패와 같이 운용하기 좋겠습니다.”

“그럼 답이 나왔군.”

“레긴을 부를까요?”

“바쁜 사람을 오라가라 할 수는 없지···. 자네가 레긴을 찾아가서 이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천 개···.”

“삼천 개쯤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파라몬드의 말에 데키무스가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지만, 마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삼천 개···. 출병식은 사흘 뒤다.”

“하루에 천 개로군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대장간들에 도움을 구해보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이후 사흘 동안 마리우스의 수명은 약 세 배가량 연장되었고, 아그리피넨시스의 장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라인강의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냈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

게르마니아가 훈족을 맞이할 준비를 거의 끝내갈 때쯤에 울딘이 이끄는 훈족 본대가 게르마니아 장벽에 도착했다.

광야를 가득 채우는 훈족의 행렬에 질려버린 막시무스는 허탈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허허···.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인가?”

“아주 득실득실하게도 몰려왔습니다.”

“가이세리크···. 라고 했던가?”

“예.”

“자네는 이만 물러나서 추가적인 피해를 막도록 하게, 여기 있다가는 전멸이야.”

“전투에 나섰는데, 죽기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함께 싸우시죠!”

“함께 싸울 수는 있으나, 함께 죽을 필요까지는 없네, 이만 돌아가게나.”

막시무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가이세리크에게 말했지만, 정작 가이세리크는 미소를 지으면서 거절했다.

“적이 많다는 것은 제가 활약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래 봬도 한사람 몫은 충분히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우···.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네만···. 아주 힘든 싸움이 될 것이란 것만 알아두게···. 난 자네가 도망가도 원망치 않겠네.”

“예, 알겠습니다!”

“쯧쯧쯧···. 그래, 자네는 기병대를 이끌고서는 강변을 둘러보면서 소규모로 도강하는 적 정찰대를 잡아주겠나?”

“그런 간단한 일쯤이야···. 바로 가겠습니다!”

막시무스는 저 멀리 달려가는 가이세리크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막시무스에게 그의 부관이 물었다.

“루크레티우스 님이 장성했으면 막시무스 님을 따라서 멋진 군인이 되어있었겠지요.”

“서기관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지.”

“아직도 많이 생각나시는 모양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마음속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또 마리우스 각하께서 하신 말씀입니까?”

“가끔 듣다 보면 재밌는 말을 하시고는 하지.”

“하하하···. 정말 그렇군요.”

그렇게 말한 부관은 고개를 돌려 장벽 너머의 훈족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언제쯤 공격이 시작될 거로 생각하십니까?”

“두 시간쯤 뒤?”

“이 부실한 장벽이 견딜 수 있을까요?”

“병사들의 수적 차이만 해도 몇 배인데,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막시무스의 말대로 알비스 유역에 길게 세워진 장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삼만 명에 달했지만, 주요 요충지에 골고루 퍼져있었기에 이곳을 지키는 병사는 예비대를 다 긁어모아도 육천 명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지난 선발대와의 전투로 부상자가 많아서 실제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사천 명뿐이었다.

반면에 울딘이 끌고 온 훈족 병사들은 수만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장벽에 있는 병사들은 적들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면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처럼 보였고 말이다.

“게르마니아로 온 지 벌써 25년. 이제야 그 끝이 보이는 것 같구나.”

“에이···. 말씀하시는 게 왜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말씀하십니까? 이보다 더한 것들도 이겨내지 않으셨잖습니까, 장군이 계시는 한 우리는 무적입니다. 이번에 받을 훈장으로 뭐 하실지나 고민하시지요.”

그렇게 막시무스와 부관이 떠드는 사이에 훈족이 공격 준비를 마쳤는지 나팔소리와 함께 훈족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전원 전투 위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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