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스라움 - 5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상부의 명령서를 받아든 막시무스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알비스 유역의 장벽을 지키고 있는 로마군 삼만여 명의 목숨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알비스 장벽의 삼만 장병들의 목숨을 책임지게 된 막시무스가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성문을 여는 것이었다.
“예비대를 준비시키고 문을 열 준비해라.”
“문을 여신다고요? 그러다가 훈족 놈들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러기에 예비대를 준비시키라는 것이다. 10분만 버티면은 모두 구해낼 수 있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피난민들은 훈족과 장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결국 장벽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딘가로 도망가기에는 훈족이 너무나도 두려웠고, 장벽을 강제로 넘어가자니 마리우스가 두려웠던 탓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별다른 야영 장비도 없이 야지에서 노숙한 그들의 몸 상태는 좋지 못했고, 병에 걸린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들에게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부터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해라.”
“남자들은 최대한 뒤에 남아서 질서를 지켜주시오!”
“다들 너무 급하지 않게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장벽 밖으로 나온 중무장한 로마군은 피난민들을 장벽 안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장벽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수많은 게르만족 피난민들이 안전을 위해서 장벽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야 막시무스의 명령이 떨어지면 이를 행하면 끝날 일이었지만, 막시무스가 있는 곳에는 훈족의 선발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장벽을 넘을 기회만을 엿보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는데, 장벽을 박차고 나온 로마군의 모습에 쾌재를 부르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놈들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구나.”
“놈들은 완전히 노출되어있고, 피난민들로 인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지금 들이친다면 우리가 유리합니다!”
“벽 위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이 걱정되는데.”
“전부 감내할만한 피해입니다. 저 벽을 넘어서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적들을 괴롭히면 조금 뒤에 도착할 본대가 장벽을 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 그럼 결정되었군.”
선발대의 대장은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오늘 저 벽을 넘는다!”
“오오!”
훈족이 결의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은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단숨에 언덕을 뛰어 내려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막시무스는 재빠르게 병사들을 정렬시키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장군, 적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안으로 물러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물러나면 저들이 다친다.”
“어차피 저들은 게르마니아의 시민들도 아닌데 우리가 저들을 위해서 죽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장군께서는 게르만 인들을 싫어하시지 않으셨는지요.”
“마리우스 각하께서도 그런 말을 하셨지, 아이를 우물로 밀어 넣으려는 것도 사람이고···.”
막시무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아이를 구하러 달려가는 것도 사람이라고 말이야···. 자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를 구하러 달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군.”
“장군···.”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적이 다가온다.!”
로마군은 미리 준비해뒀던 창을 꺼내 들고서는 대형을 이루면서 곧이어 들이닥칠 충격에 대비했다.
전열에 선 병사들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 또한 좌우로 요동치고 있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훈족의 모습에 병사들이 겁을 먹었지만, 어차피 도망친다고 해서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자신들의 뒤에는 피난민들이 있었다.
“조준!”
로마군을 향해서 신나게 달려오던 훈족 병사들은 돌연 말 위에서 활을 들더니, 일시에 활을 당기면서 로마군에게 겨눴다.
“발사!”
“방패 들어!”
훈족들은 로마군의 주위를 맴돌면서 번갈아 가며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화살이 끝없이 쏟아졌지만,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로마 병사들의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돌고 있는 적들이 주는 혼란과 날아드는 화살을 보며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화살이 날아들 때마다 병사들이 움찔거리면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겁먹지 마라! 놈들의 화살은 무한하지 않으니 금방 동날 것이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장교의 말대로 훈족 선발대 병사들은 제대로 된 보급 없이 게르마니아까지 달려온 탓에 개인이 휴대한 화살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이어지던 훈족의 화살 공격은 뚝 하고 멈춰버렸다.
“적의 공격이 멈췄다. 원래 대형으로!”
훈족은 화살이 전부 떨어졌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저마다의 무기를 빼 들고서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로마군에게 달려들었다.
“온다···. 온다···. 온다···!!”
“모두 창을 세워라! 말에 탄 놈들 말고 말을 노려!”
훈족의 기병대는 거대한 물결처럼 한 몸이 되어서 로마군을 휩쓸었다.
곧 로마군과 훈족의 기병들이 뒤엉켰다.
훈족 병사들은 능숙하게 창 벽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으려고 했지만, 막시무스의 병사들은 말과 부딪히기 전에 노련하게 창을 찔러넣으면서 대응했다.
날카로운 것을 무서워하는 말들의 특성상 한꺼번에 수십 개의 창날이 눈앞에 들이밀어 지자 아무리 잘 훈련된 전투마라도 몇몇 말들이 크게 겁을 먹으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어어···?!”
“자, 잠ᄁ···.”
말들은 그들을 몰던 기수들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자 근처에 있던 병사들까지 순식간에 뒤엉키면서 곁에 있던 동료들과 로마군의 대열을 휩쓸었다.
로마군은 최대한 뭉쳐서 버티려고 했지만, 말과 사람의 무게까지 합쳐서 밀어붙이는 통에 전열은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적의 돌격이 멈춰 섰다! 놈들을 끌어내려라!”
비록 전열이 큰 피해를 보긴 했지만, 아직 로마군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고, 훈족의 돌파는 막혀버렸다.
선발대를 이끌던 훈족의 장군은 크게 당황하면서 병사들을 데리고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훈족과 로마군이 뒤엉킨 상황에서 그런 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뒤로 물러난다.!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돌격한다.!”
“장군, 아군과 적들의 시체가 뒤엉켜서 장애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끄응···. 일단 최대한 피해서 움직여!”
장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막시무스 또한 장벽 위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훈족 놈들이 등을 보인다! 모두 사격준비!”
곧 훈족들의 화살 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화살 비가 훈족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훈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던 불운한 몇몇 로마군도 화살에 맞았지만, 경무장한 채로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던 훈족의 피해는 엄청났다.
“젠장, 일단 물러난다.! 모두 살아서 보자!”
훈족 장군은 병사들의 통제를 포기하고서는 다급하게 몸을 빼내었고, 그걸로 전투는 끝이 났다.
제법 큰 피해를 본 훈족 기병대는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로 도망가버렸고,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본 로마군은 차마 이들을 뒤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피난민들은 아직도 대피가 끝나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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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장군으로부터 전투보고서가 왔습니다.”
“흠···. 가이세리크가 아쉽겠군.”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뭐?”
마리우스는 데키무스가 건네준 보고서를 받아들고서는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게 뭐야. 여기 적혀있는 숫자가 맞나···?”
“예, 막시무스 장군이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게 맞을 겁니다.”
“이건···. 심각하군···.”
막시무스의 보고서에서는 로마군과 훈족 간의 조우전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었는데, 로마군 3000명과 훈족 병사 대략 1200명이 격돌하여서 로마군 54명이 전사하였고, 1392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훈족은 고작 88명의 전사자와 231명의 부상자가 나왔을 뿐이었다.
물론 보고서에 따르면 훈족의 부상자와 전사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적어놨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흠···. 전사자보다는 부상자가 많군.”
“아무래도 이번에 전 군에 제대로 된 신형 사슬갑옷이 새로 보급된 덕분이겠지요.”
“쓰읍···. 그래도 피해가 너무 커.”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적 기병대가 처음에는 화살로 아군의 진형을 흔들고는 화살이 떨어지자 돌격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 것 치고는 적들의 피해도 큰 것 같은데.”
“훈족의 선발대는 대부분이 경무장한 궁기병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본대에서는 중무장한 중기병들도 있고, 화살을 보급할 보급 수레로 가져왔겠지요.”
“흠···.”
마리우스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비록 허술하기는 해도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돌격대가 훈족의 화살에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갑옷이 아무리 튼튼하다고는 해도 적들의 기마 돌격까지 막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번 전초전에서의 교환비를 보면 대부분이 훈족의 기마 돌격에 죽거나 다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적의 기마 돌격에 대응할만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창 벽 방진을 세우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지금의 창은 너무나도 짧아.”
지금 로마군이 운용 중인 창은 부대마다 그 길이라던가 강도가 들쭉날쭉하면서 차이를 보였다.
로마군만 하더라도 이럴진대, 게르만 부족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우선은 병사들에게 규격화된 장비를 지급하는 걸 우선순위로 두고···. 창의 길이가 중요한데···.”
“너무 짧으면 기병들의 돌격을 막을 수가 없고, 너무 길면은 병사들이 다루기가 힘들 겁니다.”
“흠···. 3m에서 4m 정도면은 일반 병사들도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치면은 쓸 수 있지 않을까?”
“3m···? 그건 뭡니까?”
“아.”
마리우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서는 머릿속으로 단위를 변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충 때려 맞추기 식으로 계산을 끝낸 마리우스가 대답했다.
“대충 12~ 15푸스 정도일 것 같은데.”
“12푸스라···. 굉장히 긴 것 같습니다만···. 고대 그리스에서 주로 운용되던 팔랑크스들이 쓰던 창과 같이 들립니다.”
“역시 힘들겠지?”
“아무래도 창과 방패를 동시에 휴대해야 할 텐데···. 그렇게나 긴 창을 한 손으로 들고 있으려면 굉장히 잘 훈련돼야 할 것 같습니다.”
데키무스의 말을 듣고서 잠시 고민에 빠진 마리우스는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굳이 방패가 필요한가?’
‘어차피 적들의 무기는 돌격대의 갑옷을 뚫지 못할 텐데, 굳이 방패를 들리는 것보다는 양손으로 창을 들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병사들에게 방패를 버리고 창을 양손으로 들게 하는 건 어떻겠나?”
“예?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방패도 없이 싸운다는 말씀입니까? 에이···. 세상 모든 이들이 각하처럼 잘 싸우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돌격대가 입고 있는 갑옷은 영거리에서 쏜 화살도 튕겨내고, 힘껏 내지른 창과 검도 흘려버리지 않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고작 300명으로 적의 기마 돌격을 막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적의 본대는 못 해도 수만 명은 될 겁니다.”
“그건 그렇군···.”
“차라리 립스크에 물을 들이부어서 진창으로 만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아군도 싸우기 힘들지 않은가?”
“대신 그렇게 되면 숫자가 많은 아군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겁니다.”
데키무스의 건의에 마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어. 그럼 이렇게 하지, 일선의 병사들에게 긴 창과 아주 두꺼운 방패를 들려주는 거지.”
“두꺼운 방패 말입니까?”
“그래, 전투가 시작되면 방패를 땅에 받고, 창을 그 위에 거치해서 임시 목책으로 쓰는 거야.”
마리우스의 말을 들은 데키무스가 제법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적들이 굳이 공격해 오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를 우회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쫓을 수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