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스라움 - 4
훈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에우트로피우스와 파비우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서 원래 움직이려 했던 시간보다 늦어졌지만, 수만 명의 훈족 기마부대가 바쁘게 행군을 독촉해서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선발대가 게르마니아의 장벽에 도달했다.
“어우···. 이걸 넘으라는 말입니까···?”
“음···. 제법 벽이 높은데···.”
알비스 유역에 세워진 게르마니아 장벽은 그동안의 임시 보강작업으로 부실하게나마 장벽의 높이를 올려놨기에 처음 장벽을 마주한 선발대는 카라톤의 설명과는 다르게 더 높은 성벽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선발대를 이끌던 이는 도저히 자신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만으로는 이 장벽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서는 장벽 인근을 돌면서 장벽 바깥의 게르만 부족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수레바퀴보다 큰 녀석들은 모두 죽여라.”
“식량을 비롯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거추장스러우니 불태워버려!”
“모두 필요한 것만 챙겨!”
그렇게 습격이 며칠 동안 이어지자, 견디다 못한 게르마니아 외곽의 중소규모 게르만 부족들은 훈족의 공세에 쓸려나가거나 밀려나면서 생존자들이 알비스 장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 장군, 게르만 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어.”
장벽을 지키고 있던 막시무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장벽을 향해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서 저들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상부로부터 내려온 명령은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벽을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가, 가진 것은 전부 드릴 테니 제발 문을 열어주시오! 이렇게 부탁하오!”
“뒤에 훈족 놈들이 밀려들어 온다고요!”
피난민들은 애타게 외쳤지만, 성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장벽 위의 병사들이 활을 겨누면서 그들을 쫓아낼 분이었다.
“저리 꺼져!”
“여기는 바쁘니까 다른 곳으로 가시오!”
“뭐?!”
“우리를 버리겠다는 거야!?”
“우리가 게르마니아의 시민들이 아니라고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도 게르마니아의 시민 할 테니까 우리도 들여보내 줘!!”
“어허, 빨리 가라니까 그러네!”
이러한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훈족들은 생각보다 단호한 로마군의 모습에 혀를 찼다.
“생각만큼 잘은 안 되는군.”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흠···. 그럴까?”
“저들이 스스로 성벽을 넘게 만들면, 아주 손쉽게 저 장벽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호오···. 일리 있는 말이야.”
훈족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국경선의 혼란은 곧 마리우스에게로 전해졌고, 게르마니아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구체적인 방어계획을 세우던 마리우스는 심드렁하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받아들여,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면 돼.”
“전하, 아무리 저들이 불쌍하다고는 해도, 저들을 받아들였다가는 훈족들이 금세 장벽을 넘을 것이고, 게르마니아는 초토화되겠지요.”
“게지카의 말이 맞습니다! 저들을 받아들였다가는···. 받아들였다가 훈족 놈들이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게르마니아에서 놈들을 쫓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브레누스가 저렇게 긴말을 단숨에 뱉어내다니···!”
가만히 게지카와 브레누스의 말을 듣고 있던 마리우스에게 데키무스가 조용히 물었다.
“각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막시무스 장군께서도 저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셔서 내버려 두신 것이니, 현장의 판단을 믿어보시지요.”
“맞습니다. 막시무스 장군은 수십 년을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하시면서 오랜 경험을 쌓으신 분입니다. 지금 당장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도 가만히 듣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다른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마리우스는 이번 전쟁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일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그 말도 맞지만, 이번 전쟁 이후에 게르마니아 외부에도 영향력을 미치려면 일단은 받아들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드는군.”
“전하, 게르마니아 외부의 부족들은 전하의 밑에 들어오기를 거부한 이들입니다. 저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야인처럼 살아가기를 택했는데, 왜 우리가 저들을 도와야 합니까?”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야 가이세리크.”
“가, 감사합니다!”
다른 이들은 버릇없게 말을 꺼낸 어린놈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정작 가이세리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을 무시했다.
“그동안에는 우리가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먼저 접근했던 거라면, 이번에는 반대로 저들이 우리에게 복속되기 위해서 찾아왔다네, 물론 잠깐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런 것일 수 있지만, 아무튼 스스로 복속되기를 청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지.”
“어, 음···.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저들이 위기에 빠진 이번 기회에 게르마니아 외부에 영향력을 높여서 새롭게 영토를 늘리고자 하시는 겁니까?”
“절반쯤은 정답이야.”
“맙소사, 각하! 지금의 게르마니아는 새롭게 확보한 영토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확장을 선택하시다니요?”
“맞습니다! 당장 반달 놈들과 색슨 놈들이 난리를 피워대고 있는데, 다른 부족들까지 합세한다면···.”
브레누스의 말에 색슨족의 지도자 알레피우스가 발끈하면서 소리쳤다.
“뭐?! 우리가 언제 난리를 피워댔다고 그러는 거야! 이런 산도적 같은 놈들이!”
“뭐 산도적?! 해적 놈들이 전하의 은혜로 살아났으면서 기고만장해져서는···. 에잉!”
“부르군트놈들이랑 붙어먹은 새끼들이···.”
가만있던 반달족의 지도자 고디기젤 또한 브레누스의 말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시시각각 험악해져 가고 있을 때쯤에 이를 지켜보던 마리우스가 탁자를 내려쳤고, 참나무로 만들어진 튼튼하고 거대한 탁자가 두 동강 나며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모두 박살 나버린 탁자와 무표정한 마리우스를 번갈아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결 조용해졌군.”
단숨에 회의장의 분위기를 환기한 마리우스가 한결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 앉자, 데키무스는 망가진 탁자를 가르치며 말했다.
“각하, 이게 얼마나 비싼지 알고 계신 겁니까? 이것도 다 돈이란 말입니다.”
“거 참···. 까짓거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하나 사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꼭 사셔야 합니다.”
“그래! 아무튼···. 다들 적을 앞에 두고서 아군끼리 싸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들 부끄러운 줄 알게나.”
“끄응···.”
“흠···.”
“죄송합니다. 전하.”
마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데키무스가 새로 가져온 탁자 위에 올려둔 지도에서 알비스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지금 밀려오는 훈족 놈들을 저지하는 1차 방어선은 이 알비스지만, 여기서 언제까지나 놈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네.”
“그럼 우리의 전장은 어디입니까?”
“알비스 유역을 포기하면···. 그 뒤로는 적들을 막아설 만한 방어선이 마땅치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 뒤로는 전부 평야 지대에 대부분이 숲이거나 늪지대인지라 전투에 마땅치가 않습니다.”
마리우스의 부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발하면서 그를 뜯어말렸지만, 마리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적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놈들은 평야 지대에서 싸우고 싶다고 생각할 테고 말이야.”
“그렇···. 겠지요···?”
“내가 돌격대와 근위대를 이끌고서 이곳 립스크(오늘날의 라이프치히)에 자리 잡을 테니, 알레피우스 자네는 함대를 이끌고서 엘베강 유역을 순찰하면서 추가로 도강하려는 훈족 놈들을 막아서고, 밀려오는 게르만 인들을 구조하게.”
“예, 전하!”
“그리고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기병대를 내어줄 테니, 프랑크 군과 부르군트군을 이끌고서 훈족 놈들이 립스크까지 유인해오게.”
“예,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기는 하겠습니다···.”
모두에게 명령을 내린 마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반달족의 지도자 고디기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디기젤.”
“예, 전하.”
“자네는 반달족 병사들을 립스크 이곳저곳에 흩뿌려서 넓은 범위에서 훈족의 움직임을 감시하게나.”
“따르겠습니다.”
“전하! 저는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가이세리크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얼굴로 마리우스에게 물었지만, 정작 마리우스는 그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네는 내 옆에서 대기하게.”
“예? 전하, 저도 나가서 싸우고 싶습니다!”
“내 옆에 있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질리도록 싸울 테니까 그냥 내 옆에서 대기해.”
“끄응···.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침울해하는 가이세리크를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마요리아누스를 바라보면서 그를 불렀다.
“마요리아누스.”
“예, 예 각하!”
“자네에게는 게르마니아에 배정된 기병대 오천을 맡길 테니, 장벽 너머에 있는 훈족의 선발대를 격퇴해주게.”
“제, 제가 말입니까?!”
이제 슬슬 은퇴해서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생각이던 마요리아누스는 마리우스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크게 당황했다.
“각하, 제가 놈들과 싸워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다른 이들에게 시키시는 것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제가 대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전하.”
마요리아누스가 몸을 사리는 모습에 가이세리크가 나서서 대신하겠다고 하자, 마리우스는 다시금 마요리아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정말로 가지 않겠다는 건가?”
“저, 저는 이제 늙고 병들어서 병사들을 지휘할만한 힘이 없습니다···.”
“흠···. 하긴, 자네도 나이를 많이 먹긴 했지.”
마리우스가 마요리아누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그의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고, 지금은 언제 은퇴해도 상관없을 만한 나이였다.
그런 그에게 기병대를 이끌면서 적과 맞서 싸우라고 했으니 당연하게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마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이세리크에게 물었다.
“가이세리크 자신 있나?”
“예, 맡겨만 주신다면 훈족 놈들은 단숨에 때려 부수고 게르마니아의 위대함을 알리겠습니다.”
“후우···. 내가 말한 것은 놈들을 깨부수라는 말이 아니라 놈들과 한번 붙어보고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보라는 뜻이었어.”
“아,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한 가이세리크의 모습에 마리우스는 불안감이 들면서 고민에 빠져들었고, 그 모습을 본 반달족의 지도자 고디기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아들놈을 한번 믿어보시지요. 저래 보여도 제법 실력이 있는 녀석이니 병사들을 전부 날려 먹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병사들을 날려 먹는 것도 문제지만, 경험 부족으로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지가 걱정입니다.”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가이세리크!”
가이세리크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저 간단하게 적의 전력을 분석하는 정도의 일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마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느니 마느니 하지는 마. 어차피 자네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도 없는 모양이니 말이야···. 가이세리크, 그럼 자네는 기병대를 이끌고서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적과 교전을 벌여서 전력을 파악해봐.”
“명받았습니다!”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출발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가이세리크는 씩씩하게 대답하면서 회의장을 뛰쳐나가 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조금 불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전하, 굳이 어린 녀석을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까? 정 안된다면 세르비우스 장군도 있지 않습니까?”
“아파서 제대로 된 거동도 힘든 양반을 전선으로 보내자고? 진심인가 브레누스?”
마리우스의 말대로 현재 세르비우스는 지독한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독감이라도 들었는지, 몸을 으슬으슬 떨면서 쉼 없이 기침을 해댔고,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세르비우스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쉽사리 병을 떨쳐내지 못했기에 아그리피넨시스에 남았다.
게르마니아에 온 지 어느덧 10년.
그 10년이라는 세월이 뼈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움직일 시간이야. 다들 무운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