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187)

레벤스라움 - 3

울딘의 야영지를 벗어난 파비우스는 이윽고 울딘이 보낸 추격대의 미행을 받게 되었다.

훈족들의 추격대는 뛰어난 기마술을 바탕으로 노련하게 파비우스의 뒤를 쫓아오면서 그를 압박했다.

“후우···. 후우···.”

파비우스는 그런 추격대를 뿌리치기 위해서 흔적을 지우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길을 이상하게 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추격대는 금세 파비우스를 쫓아왔다.

“판노니아···. 판노니아까지만 가면···!”

파비우스는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쳤고, 간신히 판노니아에 있는 낡은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마의 국경선까지 쫓아왔다는 것을 눈치챈 훈족들은 혀를 차면서 돌아갔고, 거의 탈진상태로 들어온 파비우스는 요새를 경비하던 로마군에게 사로잡혔고, 말이다.

******

울딘의 야영지에서 늘 그렇듯이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던 에우트로피우스는 최근에 울딘이 보이는 행동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울딘은 이제는 거의 가라앉은 전염병의 방역작업에 힘쓴다면서 에우트로피우스와의 만남을 거부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울딘의 부하들이 따라붙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에우트로피우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어딘가를 다녀오기라도 한다면, 그의 천막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짐을 뒤지는 일이 여러 번이나 일어났다.

“아무래도 울딘이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야···. 슬슬 이곳을 벗어날 준비를 해야겠어.”

“드디어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슬슬 준비하게나.”

이렇게까지 상황이 흘러가게 되자, 에우트로피우스는 준비해뒀던 대로 울딘의 야영지를 벗어날 준비를 했고, 그전에 울딘의 감시를 느슨하게 만들고자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울딘, 며칠 뒤면 출정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지나다니던 부족민들이 떠들기에 알았습니다.”

“흠···. 그렇군요···. 예, 맞습니다. 한 주일 안에 부대를 움직일 것 같군요.”

“하하하, 제가 잘 찾아왔군요! 출정에 앞서서 제가 로마에서 가져온 것들로 크게 연회를 열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에우트로피우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울딘은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거절했다.

“전투에 앞서서 그런 것은 전사들의 집중을 흩트릴 수 있으니, 연회는 이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 늙은이가 또 주책맞은 소리를 해버렸습니다···. 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좋은 뜻으로 해준 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주시니 다행입니다.”

에우트로피우스와 울딘은 그 후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에우트로피우스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나가고 난 뒤에 울딘은 그를 감시하던 부하들을 불러모아서 보고를 들었다.

“오늘 에우트로피우스가 나를 찾아와서 출정 전에 연회를 열자고 하더군. 뭔가 보고 들은 것이나, 알고 있는 게 있나?”

“없습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냥 간단한 인사치레 정도였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지난번에 말했던 것은 조사해보았나?”

“예, 에우트로피우스의 호위로 따라온 사람 중에서 사라진 이는 파비우스라고 하는 자인데,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그를 호위하던 장교였다고 합니다.”

“파비우스···? 그놈은 에우트로피우스와 다투던 이가 아닌가? 그놈이 왜···?”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울딘은 혼란을 느꼈다.

파비우스가 에우트로피우스를 따라왔다는 것만 해도 이상했는데, 파비우스가 에우트로피우스의 명령을 듣고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는 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울딘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에우트로피우스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으나 알 수 없었다.

결국, 울딘은 별수 없이 에우트로피우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선에서 신경을 끊고 다시금 원정 준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울딘이 경비병의 숫자를 몇 배나 늘렸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야.”

에우트로피우스가 그렇게 말한 바로 다음 날.

달이 지고 태양도 떠오르기 직전인 어스름한 새벽녘에 에우트로피우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감시하던 울딘의 부하들이 잠시 한눈팔면서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가지고 왔던 짐을 모두 버리고, 최소한의 짐만 챙기고서는 울딘의 야영지를 떠나버렸고, 울딘이 이를 알아차린 것은 해가 한창 떠올랐을 때였다.

“허···. 감시하던 이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두 눈 뜨고 에우트로피우스를 놓친 건가?”

“그것이···.”

“왜 대답을 못하는 건가, 빨리 제대로 대답하게.”

울딘의 추궁에 부하는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을 내려놨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어젯밤에 에우트로피우스가 준 음식들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말인가?”

“예, 전날 밤에 에우트로피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먼저 곯아떨어졌기에 다들 의심 없이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 보나 마나 생전 처음 보는 고급음식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겠지 쯧쯧···.”

“죄,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에우트로피우스를 감시하던 놈들은 전부 내 명령에 태만했던 죄로 전부 죽여버려.”

“주, 죽이라고요?”

“그래, 아니면 자네가 대신 죽을 텐가?”

울딘의 냉정한 말에 수십 명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죄목은 근무 태만이었다.

******

파비우스와 에우트로피우스의 일로 로마와 훈족이 들썩거릴 동안에 마리우스는 새롭게 편성된 300명의 돌격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교련 대장인 파라몬드의 휘하에서 훈련 중인 그들은 레긴이 만든 특별한 갑옷인 ‘레벤스라움’을 입고서는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

기술력이 조금 부족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관절이 뻣뻣하고, 입고 벗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방어력 하나만큼은 기존의 방어력을 압도적으로 상회하고 있었다.

“훈련은 잘 되고 있나 파라몬드?”

“예, 게르마니아 각지의 부대에서 체격이 우수하고 체력적인 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정예 병사들을 선발해서 훈련하고 있어서 그런지 다들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돌격대는 전선의 취약 부분에 투입돼서 적진을 박살 내는 용도로 운용될 거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감한 이들을 대장으로 뽑아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파라몬드의 보고에 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파라몬드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자네가 고생이 많아···. 내 조만간에 섭섭지 않게 챙겨줄 것이니 기대하게나.”

“저는 그런 것 때문에 전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래, 그래 자네의 충성심이야 잘 알고 있지. 그렇기에 챙겨준다고 하는 것이야.”

이미 마리우스의 머릿속에서는 이번 훈족과의 전투 이후에 바뀔 게르마니아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개편하려고 하고 있었다.

현재 부족제와 부족국가 사이에서 어설프게 걸쳐있는 현 게르만 부족들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이들의 힘을 억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슬슬 마리우스의 나이도 앞자리 숫자가 바뀔 만한 나이가 되니, 후계자에 대한 걱정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도 늦게 한 탓에 장남인 바루스가 이제 여섯 살이었고, 세 쌍둥이 딸들은 이제 두 살이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마리우스가 병에 걸려서 일찍 죽거나, 전쟁터에서 죽기라도 한다면은 그가 공들여서 다져놓은 게르마니아는 올리브리우스가 홀라당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마리우스도 슬슬 자신의 측근세력을 한번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를 합쳐놓아 부르군트와 프랑크족 간의 싸움을 멈추게 했으며, 반달족의 거대 일파인 하스딩기 반달족의 둘째 아들 가이세리크를 예비 사위로 점찍어서 인척 관계를 맺어두었다.

그뿐인가? 마리우스에게 공공연하게 반대노선을 걷던 색슨족 또한 알레피우스를 내세워서 간접적으로 순화시켜놨으니, 당분간 게르마니아 내부에서는 마리우스를 적대할 세력은 없었다.

당분간은 말이다..

“데키무스, 지난번에 내가 따로 조사하라고 해둔 것은 잘 조사했겠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게르만 부족들의 인구분포와 인구수 말이야.”

“아, 아···. 조사해뒀습니다.”

데키무스는 보고서 한 장을 마리우스에게 건네었고, 그것을 받아든 마리우스는 천천히 보고서를 살피면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제 슬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부족제 사회의 부족민에서 시민들이 되려는 사람이 늘고 있어.”

“예, 뭐···. 브레누스가 지배하는 프랑크족의 영토에서 나고 있는 철과 석탄들 때문에 돈이 돌고 있으니, 돈을 벌러 그곳에 일하러 들어간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가만히 앉아만 있겠다고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색슨족의 부족민들은 해적 일 대신 청어조합의 밑에서 고기를 잡거나, 자체적으로 해안 경비대를 만들어서 게르마니아를 떠도는 해적무리들을 사냥하거나 청어조합에 소속되지 않고, 허락받지 않은 채로 청어를 잡아들이는 어선들을 단속한다고 합니다.”

“그래?”

마리우스에게는 딱 좋은 소식이었다.

슬슬 게르만 부족들에게 자치권을 줘서 자신에게 충성하면서도 서로 끊임없이 의심과 견제를 할 수 있는 부족 국가들로 만들려고 했던 마리우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알레피우스에 내가 만나자고 했다고 전해줄 수 있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너머에 있는 게르마니아의 공작들을 전부 물러 모아주게, 내가 할 말이 있다고 말이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미소짓는 마리우스의 집무실에 어린 바루스가 들어왔다.

“아빠!”

“바루스, 아빠가 일하는 중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히히히···.”

마리우스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바루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두 팔을 벌리자, 바루스가 달려와서 마리우스에게 안겼다.

마리우스는 품속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바루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지도를 가르쳤다.

“바루스, 너는 어디가 제일 좋니?”

“몰라!”

마리우스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

로마에 있던 스틸리코는 판노니아까지 도망친 파비우스를 만나고 있었다.

한참이나 파비우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스틸리코는 그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지금 대규모의 훈족들이 게르마니아를 침공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올리브리우스와도 손을 잡으려하고 있다는 거로군.”

“에, 그렇습니다. 지금 게르마니아에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흠···. 훈족이라···. 동방에서 티마시우스가 놈들과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정작 두 눈으로 직접 본 기억은 없군.”

“게르마니아에 큰 피해가 생기기 전에 병사를 보내서 마리우스 각하를 도우셔야 합니다.”

파비우스의 말을 들은 스틸리코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는 마리우스를 돕고 싶기는 했으나, 정작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움직였다가 큰 피해를 보기라도 한다면, 올리브리우스와 스틸리코 사이에 있었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

“으음···. 일단은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 테니 내가 마련해준 곳에서 쉬게나.”

“장군, 한시가 급합니다. 지금도 훈족들은 게르마니아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을 겁니다!”

“하루 정도의 여유도 없겠나? 답은 꼭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장군!”

파비우스를 돌려보낸 스틸리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짤막한 편지 한 통을 써서 부관에게 전했다.

“이걸 플로렌스에 있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갈리아 군단 중에서 바리니우스가 이끄는 제3군단을 지원군으로 이끌고 가게.”

“어,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부관의 질문에 스틸리코가 단호히 답했다.

“목적지는 콘스탄티우스만이 알고 있을 거야. 자네는 그저 병사들을 전해주기만 하고 돌아오면 될 일이지.”

“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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