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187)

레벤스라움 - 2

몇 달 동안 이어지는 전염병에 결국 울딘이 칼을 빼 들고서는 강경책을 실시했다.

감염자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부족 밖으로 쫓아내서 격리하게 시켰고, 그 누구도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부족민들은 불만을 품었지만, 정적들을 한 번에 쳐내면서 한껏 권위가 오른 울딘에 감히 맞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강력한 방역 조치에 전염병의 기세도 확 누그러들었고 훈족의 원정 준비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그···. 철제무기를 제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말입니까? 저는 그저 손님으로 놀러 왔을 뿐인데···.”

“하하하···. 저도 조금 무리한 부탁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필요한지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당신네는 외부인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니 저도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다.”

울딘은 출정에 앞서서 에우트로피우스에세서 로마산 강철로 만든 무기와 장비를 얻고자 하였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본인의 처지를 말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가 원한다면 충분히 울딘에 무기와 장비를 공급할 수 있었지만, 에우트로피우스가 굳이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울딘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지금 훈족의 내부사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당장에 정적들을 쳐내면서 권위를 살렸지만, 그 덕분인지 울딘이 이끄는 훈족 내부의 전력이 크게 깎여나가게 되었다.

루길라의 부족이 울딘에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고는 했는데, 이번 반란으로 부족이 쓸려나가면서 울딘의 무기와 장비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

“흐음···. 장비를 구해야 하는데···.”

“올리브리우스에 연락을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듣자 하니 그와 마리우스의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좋다고 들었는데?”

“마리우스는 호노리우스를 지지하는데, 올리브리우스와 사이가 좋을 리가 있겠나!”

“그건 예전 일이고, 이탈리아에서 회군할 때 올리브리우스와 마리우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건 로마에서는 지나가던 들개도 아는 사실이야!”

“그거야 그냥 돌려보내게 하려고 뒷돈을 준 게 아니었습니까?”

“흠···.”

부하들의 말은 울딘을 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올리브리우스와 마리우스 사이에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울딘이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올리브리우스에 사람을 보내서 무기를 빌려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물어봐.”

“예, 전하.”

물론 이를 옆에서 훔쳐 듣고 있던 에우트로피우스도 마리우스를 돕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말이다···.

“파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올리브리우스가 훈족들과 손을 잡으려 한다고 전하게.”

“대놓고 움직이면 울딘이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지금 원정 준비로 정신없이 바쁠 테니까 아마도 괜찮을 거야. 잠깐 틈이 생기면 다녀오게.”

“예, 알겠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고개를 숙이는 파비우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모쪼록 몸조심하게, 야영지 곳곳에 울딘의 눈이 붙어있으니 말이야···.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가족들은 잘 보살펴주지.”

“이번 일은 저 혼자 한 일로 끝날 겁니다.”

“그래, 부디 몸조심하게. 자네가 험한 꼴을 당한다면 내가 마리우스를 볼 낯이 없어.”

“제 걱정은 마십시오. 바람처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는 곳은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면 좋겠어.”

“그럴 것입니다.”

그날 밤 울딘의 야영지에서는 말 한 마리가 다급하게 야영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평소에 에우트로피우스를 감시하던 울딘의 부하가 봤다.

“빠져나갔나?”

“예, 확인했습니다.”

“여우 같은 노인네가 또 술수를 부리고 있군.”

울딘이라고 그동안 에우트로피우스의 농간에 무방비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에우트로피우스를 의심하지 않는 척하였으나, 울딘은 기가 막힌 시기에 찾아온 그를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고 사람을 붙여뒀다.

“나간 사람은 몇 명인가.”

“제가 직접 본 것은 하나입니다만···.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에우트로피우스의 수행원 중에 사라진 자를 조사해와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떠난 놈에게 사람을 붙여두는 건?”

“날랜 놈으로 열 명 정도 붙였습니다.”

울딘은 그제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게르마니아산 청어들은 창고에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이 잡히고 있었다.

덕분에 게르마니아인들은 더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청어를 더 보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지자 청어조합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속주들로 눈을 돌렸다.

그들의 수완은 이탈리아에서도 발휘되었고, 곧 이탈리아로 게르마니아 청어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의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청어를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빵을 비롯한 다른 식료품 중에서 가장 값이 싸면서도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또 맛 또한 뛰어난 데다가 고기인 점이 컸다.

도시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빈민들까지 청어를 먹을 정도이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일이 이렇게 굴러가니, 이탈리아 내에서 게르마니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올리브리우스는 게르마니아산 청어에 상당한 관세를 때렸다.

그리고 한창 전쟁 준비로 바쁘던 게르마니아에서 이를 진두지휘하던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날아온 한 통의 명령서 때문에 굉장히 심통이 나버렸고, 말이다.

“올리브리우스가 또 술수를 부리는군.”

“이번엔 또 뭔지요.”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청어에 특별한 세금을 물리겠다는군.”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나를 툭툭 긁어보겠다는 거지.”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만 당하고 있어야겠나?”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청어를 아예 막아버리실 생각입니까?”

“아니, 그건 내버려 둬···. 대신 다른 걸 막는다.”

“다른걸 막는다고요?”

데키무스의 질문에 마리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설탕.”

“에이···. 설탕을 좀 줄인다고 저들이 눈 하나 깜빡하겠습니까? 금세 다른 것을 찾을 겁니다.”

“그거에 더불어서 사람도 보내야지.”

“사람을 말입니까? 누구를 보내 실생 각입니까?”

마리우스가 결정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르마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던 설탕의 유입이 뚝 끊겨버렸다.

명목상의 이유로는 게르마니아에 닥친 식량 위기 상황에 대응하고자 기존 사탕무들의 반출을 제한한다는 말이었다.

“설탕 안 팔아요?”

“다 팔렸어요.”

“언제 들어오는데요?”

“글쎄요···. 언제 들어올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마리우스의 발표가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의 모든 도시의 상점 가판대에서 설탕이 사라졌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설탕값 폭락에 영향을 미쳤던 게르마니아산 설탕들은 어느샌가 인더스산 설탕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당연하게도 가격 또한 급등했다.

빵을 만들면서 설탕을 넣던 제빵사들은 눈물을 삼키면서 설탕을 빼야 했고, 우는 아이의 입에 설탕을 집어넣으면서 평안을 찾던 어머니들은 다시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이 코 묻은 돈을 모아서 사 먹던 군것질거리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시민들도 그렇게까지 큰 불평을 갖지는 않았다.

설탕값이 오른 것은 금세 진정될 것이라고 믿었고, 잠시동안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출금지가 몇 주 정도 지나가니, 점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게르마니아를 괴롭히려고 식량을 통제해서 설탕값이 올랐다던데?”

“누가 그래?”

“광장에서 떠들어대는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에이···. 설마 황제나 되는 사람이 최전방으로 가는 식량들을 일부러 통제했다고?”

“하긴···. 그건 그래, 누가 이렇게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처음에는 이렇듯이 무난하게 넘어가는 듯싶었지만, 누군가가 이 소문이 사실임을 알리는 증거를 들고나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존경하고 경애하는 시민 여러분! 잠시 가던 길을 멈추시고 제 말을 들어주시오!”

“뭐야?”

“지난번에 그 사람이네.”

“아는 사람이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사람 있잖아. 광장에서 황제가 게르마니아로 가는 식량들을 통제했다고 주장하던 사람 말이야.”

“아, 그래? 이야···. 덩치 한번 엄청나게 크네.”

“수염도 덥수룩하고, 한쪽 눈이 애꾸인 게 꼭 야만인 같이 생겼는데.”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난날 제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듣지 못하셨던 이들도 있으실 테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황제인 올리브리우스는 로마의 시민들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의 행동은 정반대입니다! 올리브리우스는 식량을 무기로 삼아서 게르마니아를 억압하고 압박하고 있으며, 우리와 적대했던 고트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증거라도 있습니까?”

시민들의 물음에 남자는 마치 미리 준비해뒀다는 듯이 품속에서 한가지 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게 보이십니까? 여기에 올리브리우스가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식량들을 제한하라는 명령이 적혀있습니다!”

“뭐야? 진짜였어?”

“황제가 마리우스 장군을 괴롭히려고 로마를 말아먹게 하려 했다고?”

“이게 무슨···.”

당연하게도 남자의 말에 시민들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런 연설 이후에 로마에서 남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실체가 없는 말은 로마를 떠돌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셋 이상 모였다고만 하면 황제의 논란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뒤숭숭한 로마의 상황은 올리브리우스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마리우스가 손을 쓴 모양이군···. 흠···. 당분간은 목줄을 좀 느슨하게 풀어줘야겠어.”

그렇게 판단한 올리브리우스는 스틸리코를 불러서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스틸리코 장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말입니까? 그게 뭐지요.”

“지금 로마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무리가 온갖 소문들로 날 음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뭐···. 그런 이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소문들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을 잡아 와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야 폐하의 휘하에 있는 알라리크라는 고트족 놈을 쓰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스틸리코의 말에 올리브리우스가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어떻게 이런 사소한 일에 그를 쓰겠습니까? 장군께서 힘을 써주시지요.”

신경을 긁는 올리브리우스의 말에도 스틸리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를 아끼시는 모양이로군요. 그럼 제가 해야지요.”

“으음···.”

“할 말을 마치셨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잘 들어가세요.”

스틸리코는 고개를 숙이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황제의 어전을 벗어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브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참을성이 강한 분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원······.”

올리브리우스는 다시금 지도를 들여다보며 골머리를 썩일 뿐이었다.

******

한편, 올리브리우스에 한 방 먹인 마리우스는 시시덕거리면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파라몬드가 큰일을 했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크크크···. 내가 이래서 파라몬드가 좋다니까.”

파라몬드를 보내서 로마시민들의 분열을 꾀한다는 작전은 생각보다 잘 먹혀들어 갔다.

들려오는 소식들로는 로마의 시민들 사이에서 현재 로마의 공동황제인 올리브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저는 전하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잘한 것은 잘한 거야. 혹시 원하는 게 있는가?”

“으음···.”

“있는 모양이로군. 한번 말해보게,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파라몬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마리우스에게 말을 꺼내놨다.

“이제 훈련소 교련 대장직책도 오래 한 것 같은데···. 이번 전투에서 저를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번 전투에 데려가 달라고···?”

파라몬드의 요청에 마리우스가 잠시 고민했다.

지난번 비디메르와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전에 비디메르의 진영을 정찰하던 중에 한쪽 눈을 잃는 큰 상처를 입은 파라몬드는 그동안 후방에서 병사들을 육성하는 교련 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의 본래 영지는 브레누스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으니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파라몬드는 전장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꼭 나가고 싶은 건가??”

“예, 저도 뒤에서만 빠져있는 것보다는 앞에서 전우들과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으음···.”

“각하, 파라몬드는 용맹하면서도 똑똑한 자이니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흠···.”

마리우스는 파라몬드의 투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멀쩡한 놈들도 많은데, 굳이 파라몬드를 전장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거나 정말 크게 다치기라도 해서 지금의 교련 대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의 후임을 정하는 게 골치였기 때문이었다.

파라몬드는 지난 몇 년 동안 묵묵하게 훈련소에서 일했고,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게 잘 운영했으며 지금도 훈련소에서는 매년 수천 명의 병사와 수십 명의 장교들이 배출되고 있지 않은가?

“일단은 고민을 해보겠···.”

“전하! 저도 전장에서 싸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후우···.”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를 수작했지만 대신 조건 하나를 걸었다.

“그래,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네.”

“조건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언제나 내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만 지켜준다면 전장으로 데려가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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