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187)

레벤스라움 - 1

마리우스가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맡에서는 프로바와 에우독시아가 곤히 자고 있었고, 언제 들어왔는지 바루스 또한 마리우스의 팔을 베고서는 잠들어있었다.

그동안의 삶에서 편한 날이라고는 하루도 없었지만,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날을 따져보라면 바로 어젯밤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부들대는 두 다리를 부여잡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들의 도움으로 의관을 갖추고 집무실로 향하니,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데키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

“각하? 각하!”

조금 시간이 지나고, 결국 붙잡혀 들어온 마리우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키무스에 물었다.

“지난밤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일이 쌓인 건가?”

“어젯밤에 동방에서 들어온 소식 때문에 모든 업무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업무를 재조정한다고···? 도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데키무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듣기로는 다키아 쪽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돌았던 전염병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이 보인다고 하는군요.”

“갑자기? 이탈리아 남부에서나 간간히 돌고 있는 전염병이 다키아 쪽에는 왜 돌고 있는 거야.”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몇몇 환자가 나왔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쪽에서 퍼진 게 아니었을까요?”

“그런가···.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나를 위해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양이로군.”

“각하, 어디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셨다가는 큰일 납니다. 언행에 주의를···.”

“내가 뭘.”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투덜거리면서 보고서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지난 밤사이에 데키무스가 정리해둔 문서들에서는 넘쳐나는 자원들을 활용할 여러 방법들이 적혀있었는데, 그중에서 마리우스의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이건 뭔가?”

“무엇이 말입니까?”

“여기, 이 갑옷들 말이야.”

마리우스는 보고서에 그려진 사슬갑옷에 철판을 덧댄듯한 갑옷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이거, 자네가 그린 건가?”

“에이···. 아닙니다. 지토라는 병사가 직접 그렸다고 하더군요. 평소에 느끼던 불편한 점들을 개선해달라고 그린 모양인데···.”

“그래? 하긴···. 관리하기는 좋았어도 전투할 때는 거치적거리는 게 한둘이 아니긴 했지···.”

마리우스도 사슬갑옷을 입을 때마다 불편한 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던지라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눈여겨 보고 있던 지토라는 병사가 이런 사슬갑옷을 개량해보고자 나섰으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있나.

“흠···. 예전 방식의 로리카 세그멘타타의 이음부를 사슬로 대체한 거로군.”

“예전 방식과 크게 달라진 것이라면, 지토의 방식은 상체뿐만 아니라 하체도 감싸주는 형식이지요.”

“하긴···. 요사이의 전투에서는 상체 하체 가릴 것 없이 상처를 입는 이들이 골고루 나오니까 말이야.”

“일단 시범적으로 도입해보고, 쓸만하다 싶으면 추가로 양산하는 절차를 밟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

그때, 마리우스의 잠들어있던 기억의 창고를 두들기면서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이 그림을 보니 불현듯 떠오른 것으로 마리우스가 탁자를 쾅 하고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풀 플레이트!”

“예?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래, 그게 있었지!”

“뭐가 말입니까? 저도 알려주십시오.”

데키무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마리우스가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 게르마니아에서 군납을 하는 대장간들이 몇이나 있지?”

“어···. 열여섯 곳 정도 될 겁니다.”

“전부 불러와. 두 시간 주지.”

“어, 음···. 알겠습니다.”

데키무스가 지친 몸을 이끌고서 다급하게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마리우스는 지토의 건의안을 다시금 둘러봤다.

******

“다 모였나.”

“예, 각 대장간에서 필요 인원만 제외하고는 전부 모였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마리우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천여 명가량의 대장장이들을 보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른 시간에 이 자리에 모여줘서 고맙다. 내가 자네들을 여기로 부른 이유는 새로운 갑옷개발에 대해서 지시를 내릴 것이 있어서다.”

“새로운 갑옷···?”

“이제는 새로 일거리를 던져주시려고 하는구나···.”

“오늘 안에 집에 갈 수는 있겠지?”

“오늘 점심 뭐 먹을 거야?”

마리우스는 웅성거리는 대장장이들에게 말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도록!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갑옷에 대한 설명을 해줄 테니, 너희들은 스스로 고민하여 새롭게 만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각 대장 간별로 경쟁해서 승리하는 쪽에게 우선적인 납품권과 함께 크게 보상하겠다.”

“납품권에···.”

“보상이라고···?”

마리우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한 대장장이들이 입을 다물고서는 마리우스를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유치원생들처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대장장이들의 기대에 화답하듯이 마리우스는 말을 이어갔다.

“갑옷의 종류는 두 종류다. 하나는 기존의 사슬갑옷을 개량한 종류로 투구와 팔다리와 무릎, 어깨 부분까지 강철로 만든 방어구로 보호하고, 그 이음새를 사슬로 잇는 것이다.”

“사슬에다가 철판을 덧대야 하나?”

“아니지, 그렇게 되면 만들기고 까다롭고 관리하기도 귀찮으니 무조건 사슬로 꿰어야지.”

“그게 아니지!”

마리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장장이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윽고 다투기 시작했다.

이 모습에 데키무스가 말리려고 했으나, 마리우스가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조금 지켜보다가 싸움이 끝날 것 같으면, 이걸 던져준 다음에 다음 달까지 시제품을 만들라고 하고 자네는 빠져나오게.”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러다가 큰 싸움이 벌어지는 게 아닐지···.”

“괜찮아. 조금 과열된다 싶으면 적당히 다독여서 돌려보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마리우스가 다시 총독궁 안으로 돌아가 버리자, 데키무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투고 있는 대장장이들을 바라봤다.

“아니, 내가 망치 잡은 지 십 년이 넘어가는데,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니까 그러네!”

“세상에 불가능 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몇 번이고 두들기다 보면 되겠지요!”

“그렇게 밤낮없이 두들겨서 하나 만들면은 전 군에는 어떻게 보급할 건데?!”

“그거야 사람을 늘리면 될 일이지요!”

“이 답답한 사람아! 담금질이 아니라 열처리가 중요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하나! 그렇게 두껍게 만들면 병사들이 전부 퍼져버린다고.!”

데키무스는 그 모습에 마리우스처럼 고개를 내저으면서 마리우스가 시킨 대로 두 번째 갑옷을 설명해줬고, 전보다 더한 난장판을 보고서는 넌더리를 치며 집으로 퇴근해버렸다.

******

그렇게 한 달이 다 되어갈 때쯤.

게르마니아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노력으로 빚어낸 갑옷들의 시제품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로리카 세그멘타타의 개량형 갑옷들은 전체적으로 품질이 우수했고, 장인들 고유의 취향이 반영되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리우스가 주문한 플레이트 갑옷들은 하나같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엉터리들뿐이었다.

“죄다 직각에···. 강철을 전부 때려 박아서는 사람이 입고서 움직일 수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흠···. 이자들은 마갑이라도 만들려고 했던 걸까요.”

마리우스의 말대로 대부분 갑옷이 무식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시험 삼아서 마리우스가 하나를 입어봤는데, 입고 벗기가 굉장히 불편했고, 무거운 갑옷은 팔을 들어 올리거나 한걸음 움직일 때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무거운가 하면,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후아···. 이거 도저히 못 써먹을 물건이야.”

“방어력 하나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로 옆에서 쏜 화살도 튕겨내 버립니다.”

“그럼 뭐하나,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하고 뻗어버리는데 말이야.”

“아직 갑옷을 보내지 못한 곳들도 남아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래···. 기다리다 보면 제대로 된 게 하나쯤은 튀어나오겠지.”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총독궁으로 오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마리우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오히려 실망감을 기르는 것들뿐이었다.

“아니, 갑옷을 만들랬더니, 상판만 가리는 걸 만들어오고 이걸 갑옷이라고 들이미는 건가!”

“이건 또 뭐야. 통짜 강철판에 구멍 뚫어놓은 걸 갑옷이라고 가져온 거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나 한 건가?”

“허허···. 주머니마다 철판을 넣어서 방호력과 기동성을 모두 잡은 것은 좋지만···. 나는 강철로 만든 갑옷이 보고 싶은 거지, 이런 꼼수로 만든 갑옷이 보고 싶은 게 아니야!”

이제는 화를 내는 것도 슬슬 지쳐갈 때쯤.

마리우스의 앞에 생각보다 많이 괜찮아 보이는 갑옷다운 갑옷이 도착했다.

생긴 것은 앞서 보았던 다른 갑옷들보다 투박했으나, 동글동글하고 구색은 다 갖춘 것이 마리우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흐음···.”

“제법 마음에 드신 모양이시군요.”

“뭐···. 그동안 봤던 것 중에서는 제일 괜찮긴 하네···. 이걸 만든 사람이 꽤 많은 고민을 한 모양이야.”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래, 한번 얼굴이나 보지.”

“그럴 줄 알고 미리 불러놨습니다. 들어오게.”

데키무스의 말에 털이 북슬북슬하면서 작달막한 꼬맹이 하나가 호다닥 들어와서는 냅다 인사를 했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자네가 이 갑옷을 만든 건가?”

“예, 조금 힘 좀 써봤습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이 갑옷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이야.”

“가, 감사합니다···!”

대장장이는 말을 더듬으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마리우스의 앞이라 그런지 적잖게 당황한 듯 보였다.

“자네 이름이 뭔가?”

“레긴···. 대장장이 아들 레긴입니다.”

“레긴이라···. 그래, 대장장이의 아들 레긴.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예, 물어만 보십시오.”

마리우스는 갑옷을 가르치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런 종류의 갑옷은 한 달에 얼마나 만들 수 있겠느냐? 한 달에 스무 벌은 만들 수 있겠지?”

“스, 스무 벌씩은 힘듭니다···. 이래 봬도 꽤 정밀한 공정작업을 거쳐야 하는지라 않아봤자 한 달에 열 세 벌 정도가 한계입니다···.”

“흠···. 그건 자네 혼자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네가 소속된 대장간 기준으로 말하는 건가.”

마리우스의 말에 레긴은 잠시 고민하면서 속으로 수를 가늠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저 혼자 기준으로는 열 세 벌이지만···. 다른 이들과 합을 맞추면서 철저하게 일을 나눠서 한다면···. 10명 기준으로 한 달에 서른 벌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사람을 한 100명쯤 지원해주면 어떤가? 그러면 그 이상으로 나올 수도 있겠나?”

“어, 음···. 모두 어느 정도의 기술자라면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내가 자네 이름으로 새로 대장간을 배정해줄 테니, 자네와 도제들은 이 갑옷을 만드는 데 주력해서 석 달 뒤···. 아니지, 훈련 기간까지 생각하면 두 달 뒤까지 300벌···. 가능하겠나?”

“3, 300벌 말입니까?”

“왜, 힘든가?”

마리우스의 말에 레긴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보겠습니다! 까짓거 잠 좀 줄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든든하군. 필요한 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데키무스에 말하면 다 들어줄 거야.”

“저···.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레긴은 조심스럽게 마리우스에게 말했다.

“그···. 저 갑옷은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

“이름이 중요한가?”

“그건 아니지만···. 전하께서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헤헤···.”

“이름, 이름이라···.”

마리우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마디를 툭 하고 던졌다.

“레긴 크루프. 어떤가?”

“레벤스라움이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레벤스라움이 튀어나오는 건가?”

“예?”

“아닐세, 그냥 편한 대로 생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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