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채찍 - 5
사냥이 시작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카라톤과 훈족 병사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게르마니아를 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빠른 기동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드레스덴 지방을 지나쳐서 오늘날의 라이프치히까지 하루 만에 주파하면서 마주치는 부족과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병사들이 붙잡으려 하니, 게르만 인들이나 이주민들은 크게 반발하면서 극렬하게 저항했다.
당연하게도 자신들에게 반발하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만큼 훈족들이나 카라톤이 유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없었던 만큼 필요한 만큼만 죽이고서는 다시금 갈 길을 갔다.
“흠···. 여기도 훈족 놈들이 지나간 모양이로군.”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놈들입니다. 사람 목숨 알기를 개미나 파리쯤으로 아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군요···.”
“전하께서 훈족 놈들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군···.”
게르만 귀족들은 저마다 부족끼리 뭉쳐서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훈족을 추격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쓸고 지나간 정착촌이나 마을 같은 경우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놈들은 악마예요!”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 할아버지에···. 또···.”
“마, 말에 탄 악마 놈들은 서쪽으로 갔습니다!”
“서쪽이라···. 고맙군.”
카라톤과 그의 병사들이 추격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게르마니아에 들어온 지 삼일쯤 된 뒤였다.
한창 루길라를 찾기 위해서 게르마니아를 뒤지던 그들이 반달족의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 기병대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당연히 전투가 벌어졌고, 제집 안마당에서 싸우는 반달족과 가이세리크가 한없이 유리했다.
가이세리크와 반달족은 그들이 원하는 장소로 훈족들을 유인해서 크게 혼쭐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카라톤과 훈족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후우···. 후우···. 지금 몇 명이나 남은 거지···?”
“쉰 명이 조금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잡히거나 죽은 건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카라톤은 이름 모를 숲에서 죽은 지 오래되어서 잔뜩 썩은 고기를 씹으면서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 또한 가져온 식량을 전부 소진하고, 불도 피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날이 수척해져만 가고 있었다.
“...발자국이 여기까지···.”
“젠장, 뭘 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군.”
“대장, 일단 몸부터 빼내야 합니다!”
말까지 잃어버린 그들은 최대한 기억을 뒤지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따라가면서 왔던 길을 되짚어서 게르마니아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강을 따라서 움직였을 때는 운 나쁘게 결혼식을 망쳤던 게지카가 이끄는 부르군트의 귀족들과 병사들에게 크게 혼이 났었고, 산맥을 따라 움직였을 때는 알레피우스가 이끌던 색슨족 유격대에 걸려서 많은 부하를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형과 아버지를 대신하여 반달족을 이끄는 가이세리크가 지독하리만치 카라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발자국을 지우려고 강을 따라 걸으면, 개들을 풀어서 그들의 냄새를 쫓았고, 동굴이나 땅굴 같은 곳에 숨어서 추격을 피하려고 하면, 흔적이 끊긴 곳 주변을 포위해서 불을 질러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울딘을 따라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카라톤과 병사들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이 뒤집힌 게르마니아 전역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었던지라 쉽게 떨쳐내기 어려웠다.
“저기다! 저기 놈들이 간다.!”
“쫓아라! 저놈들의 못 하나에 금화가 세 개다!”
“젠장!”
가이세리크는 애초부터 자신이 부족을 이어받는다는 생각을 포기한 채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 데다가, 위에 있는 형 또한 무능한 이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이 형이나 아버지와 비교해서 절대로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애초에 그들을 제치고 자신이 나설 만큼 부족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고, 제 손으로 가족들을 쳐내고 오를 만큼 가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사냥만 다니면서 무료한 삶을 보내던 가이세리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로마의 장군이었던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로 오면서 게르마니아는 빠르게 변화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일상이었고, 그동안 반쯤 포기하고 있던 향상심과 명예욕에 불을 지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은 나다!”
******
마리우스가 말했던 최종기한인 일주일 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카라톤과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다섯 명의 부하들이 붙잡혀왔다.
마리우스의 앞에 끌려온 이들은 거대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리우스를 바라보더니 움찔하면서 움츠러들었다.
“날이 추운데, 다들 고생이 많았어.”
물론 마리우스가 곰 가죽을 뒤집어쓴 이유는 여름만 지났다 하면 기온이 확 꺾여버리는 지랄 맞은 게르마니아의 추위 때문이었지만, 카라톤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래, 자네들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가.”
마리우스가 물었으나 카라톤과 훈족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면, 알비스 유역에 자리 잡은 국경선에서야 가끔 훈족들과 교류하는 부족 출신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말이 통했지만, 이곳은 게르마니아의 내부였다.
당연하게도 훈족 말을 할 줄 아는 이는 없었고, 마리우스 또한 게르만식 라틴어를 썼으니 알아들을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이놈들! 전하께서 묻고 있지 않으냐!”
“역시 훈족이야. 제 주인을 향한 충성스러움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입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들이 왜 왔는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 상관없어. 다만···. 이게 울딘의 판단인지, 아니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인지가 중요한 문제겠지.”
그렇게 말한 마리우스는 입을 다물고서는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이들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풀어주자니 자신의 영토나 다름없는 게르마니아를 헤집고 다닌 훈족들이 괘씸하기도 했고, 자신의 권위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전부 처리해버리자니, 그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을 울딘이 걱정되었다.
“쯧···. 귀찮게 됐네.”
“일단은 가둬두고 상황을 지켜보시겠습니까?”
“가둬둔다라···.”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고민하는 듯싶어지자, 다른 게르만 귀족들과 부족장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전하, 이놈들이 게르마니아에 끼친 해악이 얼마인데, 가두는 것으로 끝내려 하십니까?”
“맞습니다. 이놈들은 우리에게 쫓기는 와중에서도 악착같이 사람을 죽이던 놈들입니다!”
“마을 하나를 전부 불태우는 건 예사로 하던 이들입니다.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게르만 귀족들과 족장들의 반발에 마리우스는 점점 머리가 아파져 옴을 느꼈다.
지끈지끈하는 머리를 한참이나 부여잡았지만, 주변에서는 여전히 훈족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아우성치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리우스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확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장인어른이고 호노리우스고 올리브리우스고, 그동안에 이렇게나 게르마니아를 키워왔던 자신을 아랫사람 내려다보듯이 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저 멀리 있는 훈족들까지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지 않은가?
가슴속에서 점점 끓어오르던 분노가 때를 만난 것처럼 확 불붙기 시작하더니 마음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 좋다. 이놈들과 생포한 훈족 놈들 중에서 한 놈만 뽑아서 그놈 빼고는 전부 눈을 뽑고 오른손을 잘라서 울딘에게로 돌려보낸다. 그러면 되겠지?”
“어, 음···.”
“어우···.”
“그건 좀···.”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갑작스러운 마리우스의 선언에 크게 당황하면서 난색을 보였지만, 평소라면 그들의 말을 들어 줬을 마리우스가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울딘 놈이 나와 전쟁을 원한다는데, 자네들은 이 정도도 못하는 건가?”
“그···. 전하, 지금의 게르마니아에는 전쟁을 수행할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는 건 저들도 마찬가지다.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쪽)에서 이곳까지 거리만 해도 얼마이고, 그사이에 지나칠 수많은 야만인은 또 몇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가이세리크가 데키무스의 말을 끊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곁에 있던 게지카와 브레누스가 그를 엄히 꾸짖으면서 소리쳤다.
“이놈!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이냐! 어린 녀석이 말이야···.”
“지금은 중요한 안건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니, 너는 뒤로 물러나 있거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게지카, 브레누스 뭘 그렇게 험하게 말하는 건가?”
마리우스가 가이세리크를 두둔하며 나서자 게지카와 브레누스가 어찌할 줄을 몰라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린 녀석이 눈치 없이 나서기에···.”
“어리다고 무시당하여야 하는 건가? 내가 듣기로는 가이세리크가 훈족들을 제일 많이 잡아 왔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만···.”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었나, 제일 많이 잡아 오는 이를 내 사위로 삼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마리우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가이세리크를 불렀다.
“가이세리크 이리와.”
“예, 전하!”
가이세리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으나, 입꼬리가 움찔움찔 꺼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세운 마리우스는 전에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자리에 모인 게르만 족장들과 귀족들에게 말했다.
“울딘 놈이 먼저 게르마니아를 건드렸는데, 다들 뭐가 그렇게 두렵다고 몸을 움츠리면서 숙일 생각을 하는 건가?! 놈이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도 전쟁이다.!”
“저, 전쟁···.”
“후우···. 올 것이 왔군.”
마리우스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은 전설이나 다름없는 마리우스와 함께한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서 성공할 생각에 두근거렸으나, 나이를 제법 먹은 이들은 이번 전쟁에서의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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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험한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은데···.”
“아니,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일부러 그런 것이겠지, 우리에게 공포심도 심어주면서 저들을 부양하려는 노동력까지 갉아먹으려고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게 아닌지···.”
훈족들은 돌아온 병사들과 카라톤을 보면서 두려움에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쯧쯧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하고, 이 모양 이 꼴로 돌아오나?”
“죄, 죄송합니다···.”
울딘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카라톤과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두 눈이 뽑히고 오른손을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리우스라는 자의 악의가 절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섬찟하기까지 했다.
울딘이나 다른 훈족들도 사람을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전하, 이건 우리에 대한 게르마니아의 도전입니다! 당장 가서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카라톤, 너는 분명히 게르마니아로 들어간 것이겠지?”
“예, 방벽도 생각보다 높지 않은 데다가 지키고 있는 병사들 수도 적어서 한번 넘어가 보긴 했는데···. 그 이후부터 게르마니아의 모든 것들이 제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흠···. 게르마니아의 모든 것들이 쫓았다고?”
“부, 분명히 모든 곳을 확인했는데···. 확인했는데···. 어디선가 놈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울딘은 벌벌 떨고 있는 카라톤을 진정시키면서 원래 묻고자 했던 것을 물었다.
“루길라는 찾았나?”
“아뇨, 하지만 게르마니아에 있는 건 확실합니다.”
울딘은 한쪽 눈만 남은 카라톤에 물었다.
“확신하나?”
“확실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울딘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들을 먹이고, 무기를 정비해라! 게르마니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전쟁입니까?”
“그래,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