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12/187)

신의 채찍 - 3

최근 마리우스에게는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

“아부···.”

“끼에에···.”

“가만있어 이놈들아.”

마리우스가 어디를 가든 간에 아틸라와 테오도시우스를 꼭 끼고 다니면서 항상 함께했다.

물론 자식들인 세쌍둥이 딸들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리우스에게 있어서 테오도시우스와 아틸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보험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런 것이었다.

“전하, 손자분과 야만인의 아들을 너무 끼고 사시는 게 아닙니까?”

“자제분들이 섭섭해하시겠습니다.”

오죽하면 브레누스와 게지카가 한마디 할 정도였지만, 오히려 마리우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아무것도 몰라.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이 아이들이 나중에 우리를 수십 번이나 구할 거야.”

“에이···. 아직 아이들일 뿐입니다. 전하.”

“모르는 소리! 이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은 로마를 지켜주는 위대한 인물들이 될 거라니까.”

“하하하, 전하께서 그렇게 높이 봐주시는 것을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능청스럽게 웃을 뿐이었고, 마리우스는 그들의 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아이들과 놀아주기 좋아하는 거로밖에 보지 않겠지만, 마리우스는 투자를 하는 중이었다.

미래에 떡상이 확실시되어있는 주식에 투자하는 것 말이다.

“헤헤헤···. 부디 아무 걱정 없이 무럭무럭 커다오.”

손자인 테오도시우스는 그냥 귀여운 손자였기에 데리고 놀아주는 것이라면, 아틸라는 온 힘을 다해서 놀아주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만들어놓은 기반들에 덧붙여서,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그가 이룩해놓은 것들을 지켜줄 아틸라를 상상하니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크흠···. 자네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아닙니다. 오히려 전하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봐줬다니 다행이로군···.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뭔가.”

“제가 브레누스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제 생각에 전하께서 그 자리를 빛내주심이 어떨지 해서···.”

“호오···. 그동안 그렇게나 아웅다웅하더니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군.”

“세상살이라는 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게지카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마리우스에게 재차 물었다.

“행차해주시겠습니까?”

“좋지, 늙다리 게지카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는데, 내가 빠져서야 쓰겠나.”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그건 그렇게 해두고···. 그건 만으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맞나?”

마리우스의 말에 조금 전까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게지카의 입가가 조금씩 내려오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마리우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채신 겁니까.”

“자네들이 고작 그런 이유로 날 찾아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보나 마나 지난번의 그 편지 때문이겠지.”

“역시 전하시군요.”

“그리고 그때 분명히 말했었지.”

“기다리라고만 하시고 그 뒤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래, 기다림이란 좋은 거야. 상대방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내부를 되돌아볼 기회지.”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고만 하실 겁니까?”

“적어도 자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말이지.”

게지카의 갑갑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마리우스는 무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고대하던 게지카의 결혼식 날.

게르마니아의 실세 중의 실세라고 부를 수 있는 게지카와 브레누스의 여동생과의 결혼이었기에 게르마니아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이들은 전부 참여했다.

각 부족의 지도자들이나 귀족들은 모두 참석했고, 일부 대상인들과 청어조합의 간부들, 대농장의 지주들까지 모인 자리는 북적거리기만 했다.

그런 손님들 가운데서도 가장 빛을 내는 것은 게르마니아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게르마니아 만인의 대추장인 마리우스였다.

본인은 그런 호칭을 싫어했지만, 대부분 사람은 마리우스를 북방 대추장이라고 불렀다.

“다행히도 새근새근 잘도 자는구나.”

“그 정성으로 쌍둥이들을 돌봐줬어 봐요.”

“에이···. 쌍둥이들은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있잖아.”

“자기 자식은 관심도 없고, 부모도 모를 야만인 자식이랑 손자만 이뻐하시니 심통이나네요.”

테르만티아가 제법 열 받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심통을 부리자 마리우스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테오도시우스를 안겨주었다.

“뭐, 뭐에요.”

“어때, 자는 모습이 천사 같지 않아? 이게 안토니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봐.”

“사랑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배아파서 낳은 쌍둥이들이 더 사랑스럽지요.”

“끄응... 내가 그동안 쌍둥이들한테 인색했던 건 아니야. 다만 쌍둥이들과 친해질 만한 시간이 없었던 거뿐이야.”

“핑계는···.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애들 좀 둘러봐달라는 뜻이었어요.”

“미안해.”

“알면 됐어요.”

테오도시우스를 품에 안은 테르만티아는 한결 복잡해진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친언니인 마리아를 밀어내고서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한 수양딸의 아들이었으니, 참으로 심경이 복잡할 만했다.

비록 수양딸이지만, 테르만티아에는 안토니나 또한 사랑스러운 가족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었다.

“아우우···.”

“황소의 눈빛처럼 맑고 순수해 보이는 네 눈은 안토니나를 닮았구나.”

“아부?”

“멍한 표정은 어리숙한 네 아버지를 닮았고.”

테르만티아가 한참이나 테오도시우스를 살펴보면서 얼굴을 뜯어보는 동안에 게지카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곰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세상에 저렇게 생긴 곰이 어디 있나?”

“그러게 말이야. 이야···. 게지카는 좋~겠네.”

“이번 결혼식으로···. 프랑크족과 부르군트는 하나로 통합되는 건가?”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주변 이들은 앞으로 변할 게르마니아의 정치구조에 관해 토론하느라 바빴지만, 정작 게르마니아를 책임지는 마리우스는 음식을 맛보느라 바빴다.

게지카의 결혼식장에 차려진 음식들은 최근 동방을 통해서 게르마니아로 유입된 여러 향신료를 사용한 음식들이 많았다.

“비싼 향신료를 그냥 들이부었군.”

물론 대부분의 음식이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비싼 향신료들을 들이부은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면서 나름대로 평가하던 마리우스에게 조심스레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리우스 전하.”

“음? 자네는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하하하···. 저는 반달족의 공작 고디지젤의 둘째 아들인 가이세리크라고 합니다.”

“흠···. 어디 보자···. 반달족의 공작인 고디지젤이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구먼.”

“몇 년 전에 있었던 전하의 연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30인 중에 한 명입니다.”

“그래? 귀한 분이었군. 앞으로는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고 기억하겠네.”

마리우스의 말에 자신을 가이세리크라고 밝힌 청년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자네도 게지카에 초대받은 건가?”

“아,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초대받으셔서 따라온 것입니다.”

“그래? 그럼 재밌게 즐기게나.”

마리우스는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그를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가이세리크는 쉽게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마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있을 사냥에서 전하의 곁에 서도 되겠습니까?”

“사냥? 흠···. 뭐 별문제 없다면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이제는 좀 비켜주겠나? 신랑·신부가 보이질 않는군.”

“앗, 예 알겠습니다.”

가이세리크가 비켜서는 척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옆에 서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음식에 집중할 뿐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러했으나, 속으로는 연신 가이세리크의 이름을 되뇌면서 그의 정체를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가이세리크···. 가이세리크라···.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군.’

마리우스도 로마에 떨어진 지 어언 10년이 훌쩍 지난 상태였기에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5년 전에는 한두 가지 정도가 기억나지 않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가이세리크라는 이름은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숙하게 들렸으나,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뿌연 안개가 잔뜩 낀 숲속을 걷는 것처럼 떠오르는 게 없이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을 뿐이었다.

******

한편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루스는 순식간에 픽트족의 반란을 진압하고서는 론디니움을 장악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압했다기보다는 사루스를 본 픽트족이 무기를 버리고서는 저항을 포기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얼굴만 보고도 항복하는 픽트족의 모습에 오히려 사루스가 당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사루스 경이 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만으로는 이번 위기를 넘기기가···.”

“이보시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는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루스의 모습에 당황했다.

“예? 하실 말씀이라도···?”

“마리우스 전하께서 콘스탄티누스 경께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사루스가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 들어 콘스탄티누스에게 겨누자 그의 부하들이 다급히 무기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루스가 데려온 병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당해서 바닥을 뒹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마리우스 전하께서 지난번에 하셨던 말을 말이야.”

“고작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저를 쳐내시겠다는 겁니까···!”

“글쎄, 나는 전하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네가 위험인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네.”

“제가 죽는다면···. 로마에 계신 황제께서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사루스가 흥미를 보이더니,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보게, 자네는 방금 스스로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를 증명하지 않았나? 더 할 말이 남아있나?”

“잠깐, 잠깐만 제 말을 들어보신다면···.”

“대화는 충분히 하지 않았는가? 유언은 평소에 잘 써뒀기를 바라네, 안 그러면 내가 써야 하거든.”

“자, 잠깐!”

사루스는 망설임 없이 콘스탄티누스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발버둥 치면서 저항하려고 했지만, 곁에 있던 사루스의 병사들이 달라붙어서 그의 팔다리를 짓눌렀다.

원 역사에서는 로마를 위협하면서 호노리우스의 공동황제로 인정받았던 반역자 콘스탄티누스는 론디니움의 이름 모를 건물에서 숨이 끊어졌다.

“치워라.”

“강물에 던져버릴까요?”

“아니, 그러면 관심이 끌릴 수 있으니 뼛조각 하나까지 불태워서 한적한 곳에 뿌려버려.”

“예, 알겠습니다.”

바뀐 역사 속에서 브리타니아의 혼란을 진압하려고 애쓰던 콘스탄티누스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후일의 역사서들은 그를 로마의 변방을 묵묵히 지킨 장군이자 야만인들의 반란으로 비명에 죽은 충성스러운 로마인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사루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병사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저기 타오르고 있는 너희들의 장군처럼 되겠냐? 아니면 나와 함께 하겠나.”

“우리를 돕기로 했으면서 장군의 뒤통수를 친 너희들을 따를 바에는 그냥 죽어버리겠어!”

“그래? 아쉬운 일이로다.”

“잠깐! 저는 전향하겠습니다!”

“그라시아누스! 장군께서 널 얼마나 아끼셨는데···. 네가 어떻게 장군을 배신할 수 있어!”

동료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그라시아누스는 조금은 비굴한 표정으로 사루스에 허리를 숙였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들어보니 콘스탄티누스가 자네를 아낀 모양인데···. 화가 나지도 않는 건가?”

그 말에 그라시아누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화를 내는 것도 제게는 사치입니다.”

“훌륭한 판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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