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채찍 - 2
“그러니까, 저 강보에 싸인 아이가 아틸라라고?”
“예, 그렇습니다. 게르마니아의 대추장께서 제 조카에게 관심을 가지실 줄···.”
마리우스는 뚫어지라고 아틸라를 노려봤다.
아직은 움직이지 못하게 강보로 둘러놓은 어린아이일 뿐이었지만, 몇십 년 뒤에 로마를 발칵 뒤집어놓을 괴물이 될 아이였다.
“흠···.”
“제 조카들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로군요···?”
“아, 뭐라고 했지?”
“제 조카들을 귀여워 해주시니 감사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조카들이 똘똘하게 생긴 것이, 나중에 큰일을 할 것 같군요.”
마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틸라에게 손을 뻗어 천천히 가녀린 아틸라의 목으로 향했다.
단숨에 목을 비틀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아직 눈도 못 뜬 어린 아틸라가 가녀린 손을 뻗어서 내 손을 붙잡는 순간.
“아···.”
마리우스는 아틸라를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고서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마를 뒤집어놓을 미래의 폭군을 쓰다듬고 있으니, 마리우스의 기분이 참으로 묘해졌다.
“저희에게 필요한 건, 당장 말을 기르고, 양을 칠 수 있는 약간의 땅뿐입니다.”
“고작 스무 명이 뭘 하겠다는 건가.”
“최소한 전하께 손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피해라···. 좋은 말이긴 한데, 자네가 한가지 잊은 사실이 있는 것 같군.”
“그게 뭡니까? 알려주십시오.”
마리우스는 어린 아틸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게르마니아에서 나를 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로마를 통틀어봐도 나를 건드릴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아, 그렇군요···.”
“정착할 땅이 필요하다면 주겠네.”
마리우스의 말에 루길라의 표정이 한결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게르마니아를 둘러보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에 정착하게나,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죽기 전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이른 것 같군. 나도 자네에게 요구할 게 하나 있으니 말이야.”
“요구라 하면···?”
마리우스는 블레다가 안고 있는 아틸라를 제품으로 안아 들며 말했다.
“이놈은 내 궁정에서 열다섯이 될 때까지 내 손에서 길러질 것이네, 동의하는가?”
“아틸라를···.”
루길라는 떨리는 눈으로 블레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아틸라와 마리우스의 제안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루길라의 모습에 블레다가 조심스레 그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말했다.
“숙부님···.”
블레다의 간절한 눈을 본 루길라가 그제야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아틸라에게도 좋은 일이겠지요.”
“좋은 판단이야.”
“숙부님!”
“블레다. 너도 가고 싶은 게냐?”
“그게 아니라···. 동생을 저 먼 곳으로 보내신다니,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영원히 떨어져서 살 것도 아니지 않으냐.”
“숙부님···!”
루길라는 웃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그런 훈족들을 뒤로한 채로 아틸라를 데려가면서 데키무스에 말했다.
“데키무스, 이번 일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각하의 판단이니, 분명히 잘 풀릴 것입니다.”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군.”
마리우스는 품속에서 칭얼거리는 아틸라를 바라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
마리우스가 아이를 데려왔다는 소식에 마리우스의 가족들이 한 데 모여서 그가 데려왔다던 아이를 한 명씩 번갈아 보며 둘러봤다.
“이게 훈족의 아이인가요?”
“뭔가 신기하게 생겼네요.”
“동생이 늘었어!”
“바루스, 아이가 잠들었잖아. 소란스럽게 굴면 안 돼.”
“형! 그러지 말고, 나가서 족구나 하자!”
“이제 공부할 시간 아니었어?”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네~”
바루스는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니, 에우독시아가 바루스에게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바루스, 그런 노래는 누가 알려준 거니?”
“아버지가 공부하기 싫으면 노래나 부르라고 하시면서 알려줬어요!”
“그래? 그렇구나···.”
에우독시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아에티우스는 조용히 바루스에게 속삭였다.
“야! 그럴 때는 적당히 둘러댔어야지!”
“그런가? 몰라! 그냥 놀래!”
“장남이라는 녀석이 저렇게 놀기 좋아해서야 원···.”
테르만티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어린 아틸라와 남게 된 아에티우스는 조심스럽게 아틸라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를 잃은 아틸라의 일이 자신과 닮아있음을 느끼던 아에티우스는 말없이 한참이나 아틸라를 내려다봤다.
******
한편, 동방으로 떠난 호노리우스가 뜬금없이 성벽을 확장한다는 소식에 의아함을 느낀 스틸리코는 은밀하게 자신의 딸인 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일을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돌아온 마리아의 편지를 읽어본 스틸리코는 분노에 앞서 허탈함을 느꼈다.
“허···. 마리우스···. 이제는 황제를 제 손안에서 가지고 놀겠다. 이건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무래도 황제가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야.”
“예?”
스틸리코의 부관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 폐하라면은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요?”
“내 조카 놈 말이야···. 아무래도 마리우스 놈이 자기 딸을 밀어 넣어서 자기 손자는 황제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아, 그런 겁니까?”
부관의 멍청한 대답에 스틸리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호노리우스가 아무 생각 없이 마리우스의 딸을 보고서는 한눈에 반해서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놈도 머리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건가?”
스틸리코는 전에 없이 날카로운 직관으로 진실을 꿰뚫어 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게 진실인지 몰랐다.
그저 마리우스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순진한 자신의 조카를 꼬드겼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거기에···. 벌써 애까지 생겼다니···. 쓰읍···.”
“오···. 그럼 황제 폐하의 뒤를 이을 분이 생겼다는 말이로군요!”
“뒤를 잇기는! 아직 호노리우스는 젊어! 그리고 그놈은 그냥 사생아일 뿐이야!”
“아···. 실언이었습니다.”
“우선은 마리우스에게서 그 사생아와 마리우스의 딸을 이곳으로 데려와야겠어.”
“예? 마리우스가 순순히 딸과 손자를 보내겠습니까? 나름대로 가족들을 아끼던 것 같던데요.”
“내 명령인데, 그놈이 거부할 리가 있나?”
제법 복잡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이번 일을 군사적인 측면으로 스틸리코가 판단한 ‘아군’ 사이의 간단한 치정극쯤으로 보고 있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 들을 올리브리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고 계시는군.”
올리브리우스는 이번 일이 단순히 개인적인 치정극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기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스틸리코의 가문과 신흥가문인 마리우스 가문 간의 알력다툼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번 일을 잘만 긁으면, 제법 튼튼하게 보였던 마리우스와 스틸리코의 관계에 흠집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요리아누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예? 저는 곧 은퇴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번 일이 마지막 일이 될 거야. 내가 약속하겠네.”
“그러면야···.”
올리브리우스는 수많은 재화와 상당량의 식량들과 편지를 마요리아누스 편으로 마리우스에게 보냈다.
스틸리코 또한 편지를 보냈지만, 올리브리우스가 훨씬 빨랐다.
“흠···. 데키무스, 자네가 나와 몇 년이나 일했지?”
“아마 8년에서 9년쯤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게나 되었지···. 일반병으로 복무하던 때까지 합치면은 11년은 거뜬하게 넘어가겠지.”
“젊은 시절을 로마에 헌신하셨군요.”
“헌신은 개뿔···. 그냥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겠지.”
“우리는 그런 걸 보고 헌신이라고 하지요.”
데키무스는 좋은 말로 마리우스를 달래보려고 했지만, 마리우스는 도통 분노를 터뜨리지도, 터트리지도 않은 채로 조용히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그 사실을 잊은 모양이로군.”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오해···. 오해라···. 그동안 스틸리코 장군과 나 사이에서 오해가 몇 번이나 겹친 거지?”
“그건···.”
마리우스는 전에 없이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천천히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내가 게르마니아로 쫓겨나듯이 발령 났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날에 게르마니아가 지금 이 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거야말로 전하의 공이지요!”
“전하께서 오셨기에 게르마니아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게르마니아가 받아왔던 차별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합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를 비롯한 게르만 인들은 그동안 억눌리고 살아왔던 것을 폭발하듯이 터뜨리면서 이에 대한 복수를 원하고 있었지만, 데키무스와 세르비우스를 비롯한 로마계열은 마리우스와 스틸리코 간의 불화에 난색을 보이었다.
게르마니아 밖의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를 평가하는 것과 그들이 피부로서 느끼는 게르마니아의 잠재력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다른 속주의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은 게르마니아의 약진 속에서도 고작 변방의 속주 취급일 뿐이었지만, 그들이 느낀 바로는 나날이 늘어나는 병사들과 예비 병력자원, 그리고 갑작스럽게 닥친 식량 위기도 자력으로 이겨낼 정도로 내실도 제법 튼실했다.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데키무스의 말이 옳습니다. 일단 스틸리코 장군께 사람을 보내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본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로마파의 주장에 게르만파들이 반발하면서 소리쳤다.
“매번 다른 이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알아서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게 맞습니까? 왜 매번 전하께서 양보하고 눈치를 살펴야 합니까?”
“브레누스가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요.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왜 매번 우리가 눈치를 살피면서 알아서 설설 기어야 합니까?”
“오히려 로마인들이 설설 기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자 세르비우스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그럼 로마와 결판이라도 내야 한다. 이 말입니까?”
“다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겁니까?! 우리 손으로 로마를 박샐 내자고 하시는 겁니까?”
“로마를 박살 내다니까요? 어차피 반역자들의 정권 아닙니까? 그들을 끌어내리고, 이번 기회에 마리우스 전하께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게르마니아의 전략회의는 전에 없이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로마파와 게르만파,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쉽사리 결론이 나질 않았다.
정작 이 상황을 중재해야 할 마리우스는 말없이 스틸리코의 편지를 몇 번이나 정독할 뿐이었다.
“딸과 손자를 내 손으로 바쳐라···.”
마리우스는 한참을 둘러보던 편지를 화롯불에 던져버리고서는 한창 싸우고 있는 두 집단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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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라 루길라는 어디로 간 거지.”
“씨이팔···. 형님이 도망간 곳을 내가 어찌 알겠소? 클클클···. 울딘, 이 늙은이야 너는 평생 형님을 못 찾을 거다.”
“아무래도 덜 맞은 모양이로군.”
울딘이 손짓하니, 굵직한 가죽 채찍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면서 문주크의 등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살가죽이 찢어지면서 피가 흐를 정도였지만, 문주크는 이를 악물고서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울딘은 한숨을 내쉬면서 부하에게 명령했다.
“아무래도 저놈은 입을 열 놈이 아닌 것 같구나.”
“자식들의 생사가 걸려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일단은 루길라의 흔적을 뒤쫓아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렵지만···. 전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
“그래, 병사 팔백을 붙여줄 테니 당장 출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