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채찍 - 1
호노리우스는 하루라도 빨리 성벽으로 도시를 에워싸고 싶었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생각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10중으로 성벽을 쌓는 것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또 관리하는 것만 해도 재정적으로 큰 압박이 될 겁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굳이 성벽을 그렇게 많이 쌓을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군요.”
“으음···. 그래도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필요한일이 아니겠나?”
“적이요?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무슨 적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호노리우스의 등장 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수그리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의원들이 일제히 호노리우스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황제의 말실수 하나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호노리우스를 살살 긁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리우스에 대한 공포에 잠식되어있던 호노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자네들이 마리우스를 막을 건가?”
그 말에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범상치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막말로 이 자리에 모인 의원들 중에 마리우스에게 자발적으로 기부하지 않은 인원이 드물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에게 마리우스라는 이름은 아직도 두려운 이름이었다.
“아니, 뭐···.”
“마리우스 각하의 일이라면···.”
“더는 콘스탄티노플의 혼란은 사절입니다.”
의원들의 눈빛이 바뀌면서 호노리우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성벽을 새로 짓겠습니까? 아니면 마리우스한테 전부 혼이 날 텐가?”
“잠깐···. 잠깐만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 말이야? 뭐가 궁금한데?”
“도대체 마리우스 각하와는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동안 몇 번이나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던 일을 들어주시려는 겁니까?”
호노리우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게르마니아의 수십만 명이나 되는 야만인들이 쳐들어온다는데, 그것보다 중요한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방벽을 쌓자는 거 아냐.”
“원인을 알아야 대비를 할 것 아닙니까? 무작정 방벽을 쌓자고 하시면은···.”
호노리우스와 의원들 간의 말싸움은 계속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방벽을 쌓아야 한다. - 왜 쌓아야 하는가? - 마리우스가 온다. - 마리우스가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 아무튼, 방벽부터 쌓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똑같은 말만 반복하다 보니, 의원들과 호노리우스 둘 다 지쳐버렸고, 결국에는 나이가 많은 의원들이 포기했다.
“예,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어차피 도시의 확장은 해야 하는 일이긴 했으니 말입니다.”
“좋아, 고마워! 10중···.”
“10개는 안 됩니다. 한 2개쯤으로 줄이시지요.”
“안돼. 10개가 좋아.”
“그렇게나 많이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10개나 되는 성벽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3개쯤 하시지요.”
호노리우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의원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10개.”
“미치겠군···. 그렇게나 많이 지어봤자, 통행만 불편하고 유지비로 재정이 토막 나버릴 겁니다! 그럼 4개로 하시지요.”
“10개!”
“젠장, 그럼 우리는 돈 한 푼도 내지 않고 구경만 할 테니, 폐하께서 사비로 10개를 지으시든지 아니면 우리와 협상해서 5개로 합의하시지요.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겠습니다.”
의원들의 단호한 최후통첩에 호노리우스가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좋아, 5개로 하지.”
“좋습니다. 5개! 감사합니다. 폐하!”
콘스탄티노플의 의원들은 처음으로 호노리우스를 이겼다는 사실에 환호하면서 이 자그마한 승리를 즐겼다.
이 모든 것이 호노리우스의 계획이었음을 알지도 못하고서 말이다.
“폐하, 원래는 3개로 하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저들이 알아서 5개로 올리더라고, 그래서 뭐···.”
“쯧쯧쯧···.”
폴로는 희희낙락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의원들을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그동안의 콘스탄티노플의 혼란기 동안에 저들이 배운 것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아부하는 법만을 배운 것이로군요.”
“그거라도 배웠으니 살아남은 게 아니겠나.”
“그래서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언제 오시는 겁니까?”
마리우스라는 이름을 들은 호노리우스가 마시던 보리차를 뿜으면서 말했다.
“마, 마리우스가 온대?”
“아니, 방금 폐하의 입으로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건···. 그냥 지어낸 말이지···. 설마 마리우스가 아직도 정비가 안 된 게르마니아에서 여기까지 오겠어? 오더라도 몇 년 후에나 오겠지.”
“아니, 그럼 몇 년 뒤의 일 때문에 성벽을 증축한다고 하신 겁니까?”
“이, 일단 마리우스가 와서 대화하려면 성벽이라도 필요하잖아···.”
호노리우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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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콘스탄티노플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얼마나 동원했을 때를 기준으로 합니까?”
“이 식량 위기가 끝나고 나면, 얼마나 동원할 수 있겠나?”
마리우스의 질문에 데키무스가 다급하게 서류 더미를 들춰보고서는 대답했다.
“일단 게르마니아에 있는 인구수는 교회가 파악한 것과 세리들이 파악해둔 것에 훈련소에서 추가로 조사한 바를 교차 검증했을 때, 약 480만 명이 조금 안 되는데, 이들 중에서 병사들을 최대한 동원한다고 쳤을 때는 10만 명 정도 동원 가능할 것 같습니다.”
“10만 명이라···.”
“국경을 지킬 병사들은 제외한 수치이니,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교회라는 말에 집중하면서 데키무스에 물었다.
“교회라고 하면, 아리우스파인가 뭔가 하는 그 친구들이 파악한 것뿐이겠군.”
“예, 새로 점령한 라인강 너머의 인구조사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학자들은 뭘 하고 있는가?”
“아, 그들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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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겁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냥 쓰라고 하셔서···.”
“숫자란 것은 존재하는 것들을 표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 저는 그런 거는 잘 모르는데요.”
“그리고, 여기 이 숫자들의 모양은 또 뭡니까?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모양이로군요.”
“아, 뱀 숫자도 전하께서 그게 보기 편하다고 그렇게 쓰라고 하셨습니다.”
막상 게르마니아에 도착한 학자들은 본토와는 정반대인 게르마니아의 행정문서를 보면서 학구열을 불태우는 중이라 도움이 전혀 안 되었다.
마리우스의 생각으로는 대충 좀 배운 양반들이니, 행정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하면서 박아둔 것인데, 정작 이들은 마리우스가 자신이 보기 편하다는 이유로 도입한 0과 아라비아 숫자, 정확히는 현대의 1234를 의미하는 서아라비아 숫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그들에게는 로마자가 더 익숙했던 것도 있었지만, 이들은 이 숫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왔는지에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0이라는 존재는 그리스계열 학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존재하고, 또 그것을 숫자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 숫자에서도 이러한 0의 표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요! 라고 학자들은 생각했다.
거기다가 이 숫자들을 도입한 것이 게르마니아의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그냥 일반인이거나 적당히 높은 사람이면, 바로 찾아가서 직접 물어봤겠지만, 게르마니아의 살아있는 최고권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끄응···. 그러면 이게 숫자 일이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숫자 공부부터 다시 하게 될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새로운 숫자가 제법 재밌습니다.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로마자에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은 듯싶습니다.”
“호오···.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일하기도 전에 호기심에 학구열을 불태우는 이들 때문에 가뜩이나 더뎠던 행정업무는 수렁 속에 빠져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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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습니다.”
“돌아버리겠군.”
“그래서 라인강 너머와 알비스 사이에 있는 거주민들의 인구파악은 교회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교회? 그자들이 인구조사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가?”
“아이가 태어나면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방문하여 교인이 되는 순간 또 명부에 기록되니,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사람들의 인명부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잠깐, 그럼 바루스나 칼리아, 칼리나, 케실리아도 전부 세례를 받은 거야?”
“아마 그럴 겁니다.”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품 안에서 검지를 쪽쪽 빨고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볼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럼 일단은 교회 쪽과 긴밀하게 협력해야겠군.”
“그래야겠지요.”
“그럼 그 건은 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거로 하고, 학자들은 그냥 내쫓아서 애들이나 가르치게 해.”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말이 끝났음에도 나가지 않는 데키무스를 보고는 물었다.
“또 보고할 게 남아있나?”
“예,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나? 이놈의 동네는 뭐 이리 일이 많아.”
“하하···. 그래서 죽을 것 같습니다.”
데키무스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서는 보고를 계속했다.
“일단 아그리피넨시스의 도서관 건축과 확장은 생각보다 진척이 빠릅니다. 강 건너편의 지반이 생각보다 단단해서 거대 건축물을 짓이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럼 도서관은 강 건너편에 지어지는 건가? 그럼 강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겠군.”
“예, 그래서 추가로 대형 다리도 두 개 정도 새로 만들어서 통행에 불편이 없게 할 생각입니다.”
“그래, 잘 진행되고 있군.”
“강 건너의 신시가지와 도서관이 완성되는 시간은 8년 후쯤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지.”
데키무스는 다음 서류를 넘기고는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알비스의 국경수비대 보고인데, 조금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 또 알라니 들이랑 이주민들 사이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진 건가?”
“아, 그 건은 지난번에 있었던 협상으로 조금 잠잠해져서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그럼 무슨 일인가? 훈족이라도 쳐들어왔나?”
농담으로 해본 말인데, 데키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진짜로?”
“쳐들어온 건 아니고, 저희에게 몸을 의탁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몸을 의탁한다고.? 누가? 훈족들이?”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훈족들이 뭐가 아쉽다고 게르마니아에 몸을 의탁하러 오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뭐, 부족 간에 내분이라도 있었던 건가?”
“어···. 맞습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니, 이게 맞다고?!”
“예, 보고서에 따르면은 훈족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다스리는 왕인 울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준비하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허···. 그래?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 이들이 삼 형제인데, 이들이 울딘이 스스로 부하들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족이 몰살되었다고 하더군요.”
“쯧쯧···. 그래서?”
“그래서···. 몇 주 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게르마니아에 몸을 의탁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변방에 조그마한 땅을 마련해준다면 그곳에서 머무른다고 하더군요.”
“흠···.”
마리우스는 이대로 훈족 난민들을 받아주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했다.
저들은 받아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그냥 울딘에 넘겨주고서 얻을 이득을 저울질했다.
“저들을 받아주면, 후환을 두기 싫어하는 울딘이 게르마니아로 오지 않겠나.”
“그럴 가능성이 크지요.”
“흠···. 받아준다고 딱히 이득이 있는 것은 아닌데···. 굳이 받아줄 이유가 없긴 하군.”
“그럼 쫓아내는 거로 하시겠습니까?”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생각 없이 데키무스에 물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던 이들을 이끄는 자는 누구지? 이 멀리까지 올 정도면 제법 대단한 사람 같은데.”
“어···. 강을 거슬러온 이들을 이끄는 이는 루···. 루길라라고 하는데, 두 명의 조카들과 수십 명의 부족민을 데리고 왔습니다.”
“루길라···. 루길라라···.”
마리우스는 오랜만에 기억을 뒤져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카의 이름은 블레다에 아틸라···. 좀 특이한 이름이군요. 역시 야만인들이란···.”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예? 뭐가 말입니까.”
마리우스는 다급하게 데키무스를 재촉했다.
“조금 전에 조카들 이름을 말하지 않았나!”
“아···. 블레다와 아틸라 말입니까?”
“아틸라라고···?”
형이 거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