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당신에게는 양심이란것도 없으십니까? - 2
전에 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마리우스일가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강보에 싸여서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쌍둥이를 제외한 전원이 모인 것이다.
그동안 집안에서는 전에 없이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던 마리우스는 싸움터에라도 나온 듯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안토니나를 압박했다.
“이 아이···.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의 아버지는 누구냐.”
“......”
안토니나의 입은 빗장으로 걸어 잠근 것처럼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호노리우스. 맞니?”
“아빠, 제가 다 설명할게요. 설명할 수 있어요!”
“맞냐고 물었다.”
“아빠, 그게···.”
안토니나는 처음 보는 마리우스의 싸늘한 눈빛에 고개를 떨구면서 대답했다.
“네, 맞아요.”
“후우···. 그래,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아빠, 폐하께서는···.”
“들어가서 쉬라고 하지 않았니? 그러면 너는 들어가서 쉬면 될 일이야. 안 그런가 코프루스?”
마리우스의 곁에서 조용히 시중을 들고 있던 코프루스는 고개를 조아리고는 안토니나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테오도시우스는 제가 데려갈게요.”
안토니나가 마리우스의 품에서 아이를 데려가자마자 아이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면서 몸부림쳤다.
“얘, 애가 왜···.”
“쯧쯧···. 이리 줘봐.”
마리우스는 허둥지둥거리면서 어정쩡한 자세로 아이를 달래는 안토니나의 모습에 혀를 차고는 테오도시우스를 자신의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테오도시우스는 울음을 멈추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마리우스를 올려다봤다.
“아빠를 많이 따르네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라.”
“네, 아빠···.”
안토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코프루스를 따라서 방을 나가자, 곁에서 지켜만 보던 에우독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가 참 귀엽죠?”
“귀엽기는···. 지금 호노리우스를 어떻게 손봐줄지 고민 중이니까, 나 좀 내버려 둬.”
“에이···. 황제의 장인이 되는 일인데, 좋지 않아요?”
“좋기는!”
마리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큼지막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에 마리우스는 순식간에 바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를 달랬다.
“까꿍! 우루루루···.”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르만티아나 에우독시아, 둘 다 마리우스의 그런 모습에 미소를 지으면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가만히 지켜보던 에우독시아가 테오도시우스의 통통한 볼살을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손주 얼굴 보니까 그렇게 좋아요?”
“좋기는···.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네? 뭐가요?”
“손자···? 내 나이가 이제 서른다섯인데···. 벌써 할아버지가 됐다고···? 이게 무슨···.”
마리우스는 허탈함에 멍한 표정을 지었고, 테오도시우스는 그런 마리우스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허, 요놈 봐라?”
“아우···!”
마리우스는 삐죽삐죽한 수염을 힘껏 잡아당기는 테오도시우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만 당겨 이놈아.”
하지만 그런다고 아이가 알아들을 리가 있나, 그저 까르르 웃으면서 힘껏 수염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데키무스가 쭈뼛거리면서 마리우스를 찾아왔다.
“저기···. 각하, 저 데키무스입니다···.”
“데키무스? 들어오게.”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온 데키무스는 마리우스의 품 안에 안긴 채로 마리우스의 수염을 쥐어뜯고 있는 아이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척하면서 경례를 올렸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데키무스를 본 마리우스가 헛기침하며 에우독시아와 테르만티아를 번갈아 보며 슬그머니 말했다.
“잠깐 자리를 비켜줄래?”
“네, 그러죠. 뭐. 조금 있다가 저녁때 봬요.”
“그렇게 중요해 보이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같이 들으면 안 돼요?”
테르만티아가 투정 부리듯이 가볍게 한마디를 던지자, 에우독시아가 눈치를 줬다.
“아멜리아, 쌍둥이들을 보러 가셔야 하지 않나요?”
“알았어요. 가면 될 것 아니에요.”
둘이 방을 나서자, 그제야 마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데키무스에 말했다.
“말하게.”
마리우스는 언제나처럼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데키무스에 말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때문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크흠···. 흠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우선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자면. 청어잡이 덕분에 식량 사정이 개선되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러면 나쁜 소식은 뭔가?”
“나쁜 소식은···.”
******
“지토, 이 지랄 맞은 청어 젤리는 언제까지 먹어야 되는 거야?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
“그런 걸 젤리로 먹으니까 그렇지.”
“젤리 말고도 질린다고.!”
“다음 배급 때까지만 참아봐. 지금 시장에서도 먹을 거라고는 청어뿐이잖아.”
지토의 핀잔에 마커스는 투덜거릴 뿐이었다.
“너는 집에서 부모님이 해주시는 맛 난 요리들이나 먹겠지만, 나는 혼자서 시장에서 파는 거나 사 먹어야 한다고.”
“아 맞다. 아버지가 너한테 이거 전해달라고 했는데.”
“삼촌이?”
지토는 동전 주머니에 꾸깃꾸깃하게 접혀있던 증서 하나를 꺼내어 마커스에 건네주었다.
“아버지가 너 생활비 하라고 3번가에 있는 청어조합에 돈 맡겨뒀다더라.”
“아직 전하께 받은 것도 다 못 썼는데, 삼촌도 참···. 그런데 청어조합은 또 뭐 하는 곳이냐?”
“이번에 청어 상인들이 전하께 우르르 몰려가서 청어 유통권리를 받아냈는데, 전하께서 열 명의 대표를 세우라고 하셨었나 봐.”
“그래서?”
“그래서 뭐 자기들끼리 대표를 뽑고 으쌰으쌰 해서 대상인들에 대항하자는 의미로 조합을 만들었는데, 청어 잡는 어부들이 그런 거지.”
자꾸만 말을 하다 마는 지토가 답답했는지, 보다 못한 마커스가 한소리 했다.
“말 끊어먹지 말고 한 번에 말해!”
“낄낄낄, 아무튼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배가 있어야 하는데, 선주들한테 배를 빌리려면 또 돈이 필요했나 봐.”
“그래서 청어조합인가 뭔가 하는 곳에 찾아가서 돈을 빌려다. 뭐 그런 거야?”
“바로 그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가만 생각해보니까, 청어조합에서 독점적으로 청어를 팔아치우다 보니까 어지간한 마을마다 하나씩 생겼잖아.”
“그렇지, 아무리 물려도 지금 먹을만한 게 그거뿐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한테 돈 부칠 때마다 거기다가 돈 조금 떼가는 조건으로 돈을 맡겼고, 조합에서는 확인증을 건네주는 거지.”
“오호라···. 그럼 이것만 있으면 조합인가 머시긴가에 가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거야?”
“청어로도 바꿀 수 있다던데.”
지토의 말에 마커스가 헛구역질하며 소리쳤다.
“줘도 안 먹어!”
“아무튼, 로마사람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라더라.”
“그래? 신기하네···.”
마커스는 정각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지토에 말했다.
“야, 나 이만 가볼게.”
“벌써? 오랜만에 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지.”
“나 약속 있어서 누굴 좀 만나러 가야 해.”
“약속? 누구랑?”
“우리 전우님들을 만나러 간다.”
마커스의 말에 지토가 놀랐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뭐? 아직도 연락해?”
“그럼, 군대 전역한 애들은 다 가입했어.”
“가입?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토의 물음에 마커스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다치고 전역한 애들이 주머니는 풍족해서 먹고살 걱정은 없는데, 가만있으려니 심심한 모양이더라고, 그렇다고 매일같이 술이나 퍼먹고 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또 이상한 거 만든 거야?”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전하께서 만드신 자경대에서 내가 대장일 뿐이야.”
“자경대는 또 뭐야?”
******
“지난 이탈리아 원정 이후에 전하께서 퇴역병들이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나?”
하도 바쁜 일이 많아서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이 끝나고, 게르마니아로 돌아올 때 데키무스에 뭔가를 시켰던 게 기억이 나긴 했는데, 그게 지금 데키무스가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각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것 기억 안 나십니까?”
“뭔가를 시켰던 건 기억나는데···. 자네가 하는 말이니 맞겠지. 그래서 자경대와는 무슨 상관인가.”
“퇴역 병들을 모아서 치안을 담당할만한 이들로 자경대를 설립했습니다.”
“흠···. 그런데 퇴역병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상이군인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에게 치안을 맡기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서 최대한 멀쩡한 이들을 우선 선발했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사무직으로 돌렸습니다.”
역시 데키무스였다.
대충 큰 그림을 던져주기만 해도 알아서 잘 굴리는 것이, 믿고 맡길 만했다.
“성능 확실하구먼.”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럼 자경대는 도시경비대와 비슷한 건가?”
“그···.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동안에 조금 바빴던지라···.”
“뭐? 그럼 그동안에 그냥 버려뒀던 거야?”
“오늘에서야 생각나서, 그동안에 올라왔던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봤는데···.”
“읽어봤는데 뭐?”
“설명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키무스는 눈치를 채 마주치지 못하고 내게 건넸다.
그러자 품 안에 안긴 채로 수염을 잡아당기던 테오도시우스가 내 수염을 놓고서는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에 다급하게 보고서를 뺏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것을 빼앗긴 테오도시우스는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봤다.
“어허, 그래도 안 돼. 이건 이 할아버지가 일할 때 쓰는 거예요,”
“각하, 그 아이는···?”
“안토니나의 아들이야. 이름은 테오도시우스고···. 들어보니 황제 폐하의 아들이라더군.”
“아···.”
데키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손에 들린 보고서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굉장히 단순했다.
자경 대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나를 욕하는 사람들을 발견해서 잡았으니, 처벌해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퇴역한 병사들을 모아서 좀 챙겨주려고 자경단을 만들었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애꿎은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당연하게도 시민들과는 사이가 안 좋겠고.”
“그건 아닙니다. 자경 대원들과 주로 마찰을 겪고 있는 것은 각하께서 지난 원정에서 데려온 빈민들이 대부분입니다.”
“빈민들? 그들이 왜? 게르마니아에 잘 정착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몇 주 전즘에 분명히 데키무스가 그랬다.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빈민들은 게르마니아에서 저마다 원하는 땅에 잘 정착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 욕을 하고 다니다가 자경단원들과 마찰이 생겼다니,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황금만을 바라보고 게르마니아로 들어온 이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막상 게르마니아로 와보니, 황금은커녕 농사짓는 것도 힘든 곳이란 걸 깨달은 것이지요.”
“아니, 자기들이 오고 싶다고 해서 와놓고는 뭐가 그리 불만들이 많은 거야?”
“그들 중에 일부는 금이 나온다고 알려진 국경밖에 알라니 들의 땅에 들어가고 있다고 해서 골치입니다.”
“아이고···.”
데려올 때는 제법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했지만, 막상 데려오니 골칫거리들도 이런 골칫덩어리들이 따로 없었다.
괜히 이렇게 많이 데려왔다가 식량은 식량대로 모자라고, 기존에 거주 중이던 주민들과 다툼도 벌어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골치가 아팠다.
그뿐인가? 자꾸만 국경 밖으로 나가서 포교하는 아리우스파를 막아섰더니,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빈민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서 국경을 넘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된 이상, 단호하게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참에 자경대를 앞세워서 전하께 불만을 가지거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을···.”
“아우···!”
“어, 그래그래···.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데키무스가 잔뜩 흥분해서 말하니, 품에 안겨있던 테오도시우스가 발버둥을 치면서 마리우스에게 자꾸만 보챘다.
“일단은 자경단인가 뭔가 하는 게네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알라니 들과 접촉해서 금광을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아봐.”
“예? 아,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