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03/187)

새마을 운동, - 2

“게르마니아 경제발전 5개년계획···?”

“생각나는 대로 끄적인 거라 제목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걸 처음부터 생각하고 계셨다고요?”

“그냥 생각만 했죠. 뭐···.”

사실 서류 더미는 백지나 다름없었다.

제목만 거창하게 써놨을 뿐.

뭔가를 제대로 해보려는 계획은 세워놓질 않아서 차일피일 미뤄뒀을 뿐이었다.

틀은 잡아뒀는데, 그 안에 들어갈 속 알맹이가 텅 비어있는 상태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 이 계획으로 각하는 뭘 하시려는 건가요? 솔직히 게르마니아 총독의 임기 내에서 전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히파티아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야 중앙정부가 혼란스러운 탓에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의 왕위를 하사받았지만, 이 혼란이 가라앉은 뒤에도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의 대추장으로 남아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미 게르마니아는 저만의 왕국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중앙의 정치인들보다 저를 신뢰하고 있지요.”

“그 말은 조금 위험하게 들리는데···. 각하께서는 왕이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

“왕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저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왕이로군요. 아이러니하지요?”

마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매번 위기는 찾아왔습니다. 하나같이 악독할 정도로 쉽지 않고 골치 아픈 일투성이였지요.”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시는 거죠?”

“게르마니아는 그런 곳입니다. 친위대장으로 남의 밑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던 이가 스스로 일어선 곳이자, 무언가를 바꾸기 시작한 곳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신 거로군요.”

히파티아의 질문에 마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시대가 원하고, 게르마니아가 원합니다. 저는 거기에 숟가락만 얹을 뿐이지요.”

“시대가 원한다니···. 재밌는 말이네요.”

히파티아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을 이전할 장소와 그 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을 뿐.

내가 왕이 되느니 하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제대로 따지고 보자면,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제가 게르마니아의 왕이 맞다고 인정하셨으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도서관은 아그리피넨시스로 이전하는 거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물론입니다. 게르마니아는 새로운 학자들을 언제나 환영하니까요.”

그렇게 히파티아가 집무실을 나가고 나니,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데키무스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언제나 여인들의 앞에서만 점잖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뭐? 내가 뭘 어쨌다고 또 모함이야?”

“보십시오. 조금 전만 해도 잘 배운 귀족 집안 도련님처럼 구시더니, 이제는 뒷골목 양아치처럼···.”

“뭐가 어쩌고 어째?!”

******

히파티아가 떠나고, 마리우스는 게르마니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 고민했다.

구상할 때만 하더라도,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싶었던 것들이 지금 와서 돌아보니 말도 안 되게 허술해 보였다.

모름지기 어떤 일이라도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마련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마리우스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으음···. 일단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재가공해서 파는 건 너무 오래 걸려서 문제야···. 시간이 해결해 주긴 하겠는데, 그러다가 기술 누출로 경쟁에서 밀려 나갈 수도 있고···.”

마리우스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강철 제련기술과 설탕 정제기술이 유출되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설탕 쪽을 관리하는 코프루스와 강철을 관리하는 데키무스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기술이 흘러나갈 것이고, 이건 막을 수가 없는 흐름이었다.

예전에 마리우스가 만들었던 등자와 안장만 하더라도, 이미 그 유용성과 편리성이 입증되어 로마 전역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던가?

이제는 게르만 부족민들도 번쩍거리는 황금 등자를 뽐내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각하, 아에티우스 도련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아에티우스가? 들여보내게.”

“안녕하셨습니까.”

아에티우스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한결 의젓한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래, 아버지는 잘 보내드렸느냐?.”

“예, 각하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잘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왔습니다.”

“그래, 잘 보내드렸다니 다행이로구나···. 가우덴티우스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어린 너를 남겨두고 이리 떠났는지 원···.”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에티우스, 네 아버지는 너를 내게 부탁하셨다. 혹시 알고 있었니?”

“예,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당분간은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면서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아라.”

“각하.”

마리우스의 말에 아에티우스가 바로 대답했다.

“각하는 무슨···. 숙부라고 불러.”

“예?”

“마음 같아서는 양자로라도 들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네가 후계자 다툼에 말려들어 가서 험한 꼴을 볼까 두려워서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더구나.”

“아···.”

“가우덴티우스가 너를 내게 부탁한 이상. 너도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편히 지내거라.”

“예···. 숙부님···.”

아에티우스는 고개를 떨구고서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

“숙부님, 저는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뭐?! 절대로 안 돼!”

마리우스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역으로 마리우스에게 따지듯이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제 할아버지도 군인이셨고, 제 아버지도 군인이셨습니다. 저도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네 할아버지도 전쟁터에서 죽고, 네 아버지도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었다. 너도 전쟁터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싶은 것이냐!”

“불귀의 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저는 군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군인이 돼서 뭘 하겠다는 게야? 매일같이 위험한 전쟁터를 불려 다니면서 고생만 할 텐데···. 절대로 안 돼!”

마리우스는 아에티우스가 훌륭한 장군이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먼저 죽은 가우덴티우스를 떠올리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지금의 로마는 아에티우스가 활약하던 시기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이탈리아나 동방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창 스틸리코가 활약하던 시기보다는 나은 편이 아닌가?

게르마니아도 잠잠했고, 게르만 인들도 로마에 순종적이었으며, 국경선에 구멍이 뚫리면서 생긴 갈리아의 골칫거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항상 로마의 골치를 썩여오던 브리타니아 또한 로마에 복속된 이래로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평화가 찾아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네가 아직은 혼란스러운 듯하구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거로 하고 이만 돌아가거라.”

“숙부님, 시간이 지나도 제 목표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마리우스는 결단코 아에티우스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

그러는 와중에도 게르마니아에 있는 아리우스파는 교세 확장에 점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있는 부족들을 전부 돌아보고서는 이제 강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로마의 세력권 내에서 포교 활동을 벌일 때보다도 더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게르만 부족들과의 마찰도 점점 늘어만 갔다.

“우리가 왜 당신네 신을 믿어야 합니까?”

“저는 믿으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그게 그거 아니오? 제법 배운 사람 같아 보여서 부족에 받아들였는데, 이게 뭐 하자는 짓입니까!”

“그것이 아니옵고···.”

이렇게 말다툼이나 추방으로 끝난 경우는 얌전하게 끝난 경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험악하고 끔찍한 결과로 끝이 나고는 했다.

“또 그 친구들인가?”

“무리하게 포교 활동을 벌이다가 인근 부족들과 마찰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쓰읍···. 이번만 벌써 몇 번째지?”

“이번 달만 네 번째입니다.”

“네 번···. 이번에도 복수는 해야겠지?”

“이미 기동대를 준비시켜뒀습니다.”

“그래, 너무 과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우리의 분노를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움직이게.”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게르마니아로 돌아온 뒤로부터 단 한숨도 쉬지 못하고 날마다 일했던 마리우스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몇 년 치 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려니까 죽을 맛이군···. 아니, 진짜로 죽기 직전인가?”

“엄살이 심하시네요.”

“뭐?”

시야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니, 에우독시아가 편지 하나를 든 채로 서 있었다.

“아일라? 여긴 무슨 일이야?”

“제가 못 올 곳이···.”

“못 올 곳은 아니긴 한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어머나~ 이제는 제 말을 잘라먹으시네요?”

“아, 아니 그러려는 게 아니라···.”

에우독시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편지를 건네줬다.

“당신 집무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여자가 이걸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여자?”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던데···. 딱 당신 취향처럼 생겼더라고요···?”

“그, 그래?”

마리우스는 손을 덜덜 떨면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편지지에 적힌 이름과 문장을 확인하고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는 사람이에요?”

“알기는···. 처음 보는 사람이야.”

“그래요? 듣기로는 이번에 공동황제로 지목된 올리브리우스의 여동생이 게르마니아로 따라 들어왔다고 하던데···.”

에우독시아의 압박 수사가 점점 마리우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마치, 나는 다 알고 있으니 당장에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없애버리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그런 일이 있긴 했지···.”

“그래요오···?”

“아멜리아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조금 전에 쌍둥이들을 재운다고 하던데···.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줘요. 이탈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에요?”

결국,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에우독시아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올리브리우스와의 거래와 프로바에대한 일들, 거기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사람들을 긁어모은 일까지 말이다.

“그랬군요.”

“내 잘못이 아니야!”

“흠···. 이를 어찌하면 좋담···.”

“그냥 내쫓을까? 어차피 나도 별로 그렇게 좋게 보던 애는 아니었어!”

“아니에요.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응?”

에우독시아의 말에 의외라는 듯이 마리우스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여자가 당신한테 푹 빠진 모양인데···. 원한다면 이곳에 머무르게 해야죠.”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후후후···. 이런 일은 저나 아멜리아한테 맡겨두고, 당신은 당신일에 집중하세요. 요새 많이 바쁘시잖아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후후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여자가 죽는다거나, 심하게 다치거나 하면 안 돼.”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이 모든 걸 다 참고 견디면 뭐···. 그때라면 인정해 줘야죠.”

마리우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둘기처럼 떨리는 눈으로 에우독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전에 없이 즐거운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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