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 - 1
“황제 폐하께서는 골방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목숨을 끊으셨다네, 여기 폐하의 친필로 적힌 유서가 내게 있다네!”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도 친위대 병사들과 친위군단의 병사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훈족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병사들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 폐하의 유언장이 있다니까!”
“그게 폐하의 친서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파비우스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티마시우스 경의 일처럼 합하께서 유언장을 조작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조작!”
“예, 합하께서 주로 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나오겠다?”
“합하께서 훈족과 손을 잡을 줄 몰랐습니다.”
둘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울딘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싸우려고 만난 것입니까? 아니면 진실 공방을 하려고 만난 것입니까?”
“거기 야만인은 빠져있지?”
“야만인?”
울딘의 이마에 단숨에 고랑이 깊게 채이더니, 인상 또한 급격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야만인이면 너는 뭐지?”
“동방 친위대의 대장 파비우스다. 알았으면 당장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야만인.”
계속되는 파비우스의 야만인 소리에 울딘의 이마에는 더욱 깊은 고랑이 파여가고 있었다.
“후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 중에서 아직 두다리로 걸어 다니는 놈은 없다.”
“어쩌라는 거지? 대화에 끼어들지 말고 눈치껏 빠져있어라. 야만인.”
“이 새끼가!”
울딘이 분노하며 뛰쳐나가려고 하자 에우트로피우스가 그를 조용히 막아서며 말했다.
“진정하게나, 파비우스는 일부러 자네를 도발하고 있는 것이야···. 주변을 잘 둘러보면 뭔가 보이지 않는가?”
“도발이고 나발이고, 제가 그런걸 두려워하리라 생각했습니까?! 저는 모욕당했고, 이는 갚아야 할 수치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분노를 참으라는 것이 아닐세, 잠시 뒤로 미뤄두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말이었을 뿐이야.”
에우트로피우스는 사나운 사자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딘을 나긋한 목소리로 말리고 있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친우로서 하는 충고일세.”
“으음···.”
에우트로피우스가 이렇게까지 말리니, 울딘은 화를 가라앉히고는 조용히 에우트로피우스의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파비우스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적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파비우스, 난 내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내 욕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그건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로마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파비우스가 물었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떨구고는 조용히 훈족 병사들 사이로 물러나 버렸다.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군.”
“장군, 아군의 전투준비는 끝난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겠지.”
“......”
친위대의 군영으로 돌아온 파비우스는 전투를 준비 중인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혼잣말처럼 흘러가듯이 부관에게 말했다.
“이걸로 내 세 번의 맹세는 전부 끝나버렸군.”
“맹세 말입니까?”
“처음으로 입대할 당시에 로마의 황제 폐하와 시민들을 위해 싸우겠다던 맹세와 마리우스 각하에게 합하를 잘 보필하겠다는 맹세를 말하는 것일세.”
부관은 묵묵히 파비우스의 말을 경청했다.
“황제 폐하를 지켜드리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 티마시우스의 반란을 진압한다고 애꿎은 시민들이 죽어 나갔지, 지금은 마리우스 각하께서 합하를 부탁했으나 적대하게 되었군.”
“전부 장군의 뜻대로 이뤄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 잘못임은 틀림없어.”
파비우스는 묵묵히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수록 마음을 다잡으면서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길이다.”
“적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병사들에게 위치를 지키라고 전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산처럼 자리를 지켜야 한다.”
훈족의 기마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
게르마니아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오랜만에 재회하는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특히, 마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세쌍둥이는 이제는 눈을 활짝 뜨고서는 꼬물거리는 모습에 마리우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고오···. 아이고···.”
“그렇게도 좋아요?”
“그럼, 누구 자식인데···!”
“아빠! 나도요! 나도!”
오랜만에 게르마니아로 돌아온 마리우스는 자식들과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어딘가를 갈 때마다 항상 바루스와 세쌍둥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강철같은 몸과 황소 같은 체력을 가진 마리우스였지만, 한창때인 어린아이와 놀아주다 보니 금세 체력이 고갈되고는 했다.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일이야···.”
“그럼 보고는 건너뛸까요?”
“그건 안되지···. 무슨 일인데?”
“별건 아닙니다. 국경선에서 몇몇 부족 간에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해결해줄 법관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래? 적당한 놈으로다가 보내줘.”
“이미 처리했습니다.”
데키무스가 이미 처리했다는 말에 마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데키무스를 칭찬했다.
“잘했어. 자네가 잘 처리했다니 믿을만하지.”
“그리고 히파티아라는 분이 각하를 뵙길 청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히파티아? 히파티아···. 히파티아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마리우스에게 데키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파티아라는 분이 말하기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서···? 흠···. 뭔가 기억이 날듯 말 듯 하는데···. 으음···. 뭔가 중요한···. 아!”
마리우스가 무릎을 '탁'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데키무스에 말했다.
“귀한 분이니 정중하게 모셔와.”
“알겠습니다.”
이윽고 데키무스가 아리따운 여인과 집무실로 들어오자, 마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게르마니아에 온걸 환영합니다.”
“실물로 보니,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예? 아, 그런 말을 듣곤 합니다···. 우선 앉으시지요. 데키무스 자네는 가서 먹을 걸 좀 내오게.”
“예, 각하.”
히파티아는 자리에 앉으면서 마리우스의 집무실을 둘러보더니, 굉장히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모습에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아니, 방이 멋있네요.”
“하하하···. 전임 총독이었던 카티우스가 지은 곳이라 조금 그런 면이 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긴 시민들에게 베풀기를 즐기시는 각하께서 이런 곳에 사신다는 게 이해가 안 되기는 했어요.”
“하하하···. 베풀기를 즐긴다니요.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하하 호호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처음의 어색함이 깨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리우스는 본격적으로 히파티아에게 물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게르마니아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시다시피···. 알렉산드리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지라 도서관을 새로 이전할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가는 일인지라···.”
“아···. 돈이 필요하시다는 거군요.”
“부끄럽게도 그렇네요···.”
히파티아는 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히파티아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돈이라···. 이전에 돈이라···.”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아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가치들을 아신다면은···.”
“돈이 어느 정도나 필요하신지···?”
“대충 이 정도···.”
히파티아는 손가락 일곱 개를 펼쳤다.
그 모습에 긴장했던 마리우스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칠백이요? 뭐 그 정도야···.”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럼···. 칠···. 천?”
히파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마리우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 그럼 칠만···?”
“조금 더 많아요.”
몇 번이나 물어보던 마리우스는 정확한 액수를 듣고서는 격렬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히파티아에게 말했다.
“그런 돈 없습니다.”
“잠깐만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싫어요! 안돼요! 하지 마세요!”
“예?”
“트흠···. 아무튼 그만한 돈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게르마니아에 투자하지, 미쳤다고 도서관에 투자하겠습니까?”
“이번만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어떻게 안 될까요?”
“안됩니다. 도서관 하나 이전시키려다가 게르마니아가 쫄딱 망하게 할 셈이십니까?!”
히파티아가 제안한 금액은 지금의 게르마니아 일 년 예산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물론 올리브리우스에 받은 금액을 전부 털어 넣고, 게르마니아에 있는 광산들과 사탕무 농장을 열심히 굴린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아그리피넨시스로 옮길게요!”
“음?”
절박했던 히파티아는 회심의 제안을 건네면서 마리우스의 관심을 끌었다.
“도서관을 여기로 옮길게요. 도서관에는 훌륭한 학자분들이 많으니, 게르마니아의 귀족자제들이나 각하의 자제분들을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으음···.”
“그뿐인가요?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은 로마···. 아니, 세계에서 제일 방대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건 그렇긴 한데···.”
마리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아그리피넨시스로 들어온다고 하면,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도서관에서 일하는 여러 학자가 게르마니아로 건너온다면, 행정적인 부분이나 기타 여러 분야에서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다.
아무리 과거보다 그 명성이 퇴색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라고는 해도, 그 안에 있는 장서들은 진짜였다.
“그건 좀 흥미가 동하긴 하는데···.”
“그렇죠? 저희가 연구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켜주기만 하시면, 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은 각하를 전력으로 도울 거에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요? 그게 뭐죠?”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에 손짓하더니, 집무실 한쪽에 있는 대형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아그리피넨시스가 그려져 있는 대형지도를 본 히파티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리우스를 돌아봤고, 이내 마리우스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그리피넨시스는 처음 지어질 때부터 계획적으로 도시 구획을 나눴습니다.”
“네, 그래 보이네요.”
“그래서 도서관이 들어오려면 매우 큰 구역을 배정해야 하는데···.”
“아···. 그만한 공간이 없네요···.”
“바로 보셨습니다. 여기서 도서관을 이전한다고 하면···. 도시를 확장하거나, 설계에서부터 다시 뜯어고쳐야 할 겁니다.”
“아···.”
히파티아는 제법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리우스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도서관이 아그리피넨시스로 이전한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도서관을 옮기는데 드는 비용이 더 엄청날 것 같군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이대로 가면, 도서관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안에 있는 장서들이 모조리 썩어버리고 말 거에요.”
히파티아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마리우스를 올려다보니, 그녀의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웠던 마리우스가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있는 거군요!”
“후···. 사실 아그리피넨시스를 확장할 계획은 제가 처음 왔을 때부터 구상하던 거긴 한데···. 그동안은 자금이 모자라서 뒤로 미뤄뒀습니다.”
마리우스는 잠겨있는 책상 서랍을 열고서는 그 안에 있는 서류뭉치 하나를 꺼내서 히파티아의 앞에 내밀었다.
그 서류뭉치의 맨 위에는 [게르마니아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라고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