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98/187)

백합 세 송이 - 7

에우트로피우스를 놓친 파비우스는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알려지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를 수습해야 할 에우트로피우스는 도망친 지 오래였고, 파비우스 또한 황제를 죽인 살해범을 찾는다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밀레니우스, 너를 황제 폐하 시해 혐의로 체포하겠다. 당장 나와!”

“내가 미쳤다고 폐하를 해치겠습니까?! 이건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제기랄! 난 범인이 아니라고 이 정신병자들아!”

“후우···. 체포해.”

도시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범인을 찾기 위해 도시를 뒤지고 있었지만, 애초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제를 죽인 범인은 이미 관속에서 자고 있는지 오래였다.

파비우스 또한 사건을 파헤칠수록 뭔가 이상함과 의아함을 느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친위대의 흑역사에 한 줄 추가 되겠군.”

“금일 체포한 황제 폐하 시해 혐의자는 836명이고, 이 중에서 38명을 제외하고는 증거가 마땅치 않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젠장, 뭐가 뭔지···.”

파비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투르니누스와의 대화에서는 뭔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갔건만, 대화 도중에 마리우스를 의심하면서 그를 몰아가려는 사투르니누스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그 덕분에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었던 사건은 점점 꼬여만 가고 있었다.

“젠장, 섭정 공은 왜 도망을 치셔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섭정 공을 노리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 중무장한 병사들을 보냈는데, 어이없게도 에우트로피우스가 그 병사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인 줄 알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을 전부 그르쳤다.

상황을 통제해야 할 섭정 공은 자리를 비웠고, 황제는 비명과 함께 죽었으며, 모든 일은 자신에게 돌아왔다.

“뭐가 뭔지···. 젠장.”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일단은 알렉산드리아와 라벤나에 사람을 보내서 지금 상황을 잘 설명해야지.”

“마리우스 장군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까?”

“그래, 이번에 사람을 보낼 때는 마리우스 각하께도 따로 또 보내게 조금의 오해라도 있어서는 안 돼.”

파비우스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은 몸부림은 쓰나미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

아르카디우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스틸리코는 방에 틀어박혀서는 아르카디우스를 죽인 인물에 대해서 고민했다.

‘아르카디우스가 죽었다. 범인은 누구인가?’

‘에우트로피우스? 아니야, 할거였으면 진즉에 했을 사람이지.’

‘파비우스? 으음···. 이자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마리우스가 임명한 자라면 믿을 수 있다.’

‘사투르니누스? 그 늙은이도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런 일을 벌일 만큼 담대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쪽에 가깝겠지.’

한참을 고민하던 스틸리코에 부관이 찾아와서는 동방의 소식을 보고했다.

“합하, 지금 동방에서는 파비우스의 손에 섭정이었던 에우트로피우스가 쫓겨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군사령관인 사투르니누스도 연금당했다고 합니다.”

“파비우스가 그 둘을 찍어냈다고?”

“어, 음···.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일단 제 생각으로는 의도했다기보다는 의도치 않게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의도치 않게 일이 벌어졌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부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것이···.”

부관의 말이 이어질수록 스틸리코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친위대 병사들과의 오해로 도망갔다는 부분에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푸흐···. 그, 그러니까 에우트로피우스 그놈이 자기를 마중 나온 병사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 병사들인 줄 알고 도망갔다는 말인가?”

“파비우스의 변명대로라면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수도에서 죽었는데, 친위대장이라는 놈이 변명부터 늘어놓고!”

스틸리코의 강렬한 분노가 부관을 덮쳤다.

부관은 잔뜩 움츠러들었고,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훈족과의 협상 건으로 에우트로피우스와 파비우스와의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툼? 다퉜다고?”

“드, 듣기로는 그랬다고 합니다.”

“젠장···. 아르카디우스 이 멍청이···.”

스틸리코는 조금 전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침울해진 얼굴로 부관에게 말했다.

“아르카디우스의 사인은 뭐라고 하던가.”

“예?”

“사인이 뭐냐고 묻지 않았나!”

“아, 사인이···. 어···.”

부관은 허둥지둥하며 몇 개의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파비우스 경이 황제의 사인에 대해서는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뭐? 황제가 죽었는데, 그 사인을 밝힐 수는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제게 그러셔도···. 저는 단지 파비우스 경의 말을 전할 뿐입니다···.”

“후우···. 나가.”

혼자가 된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복잡해진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선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음이 아르카디우스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집무실의 창문 너머 광장에 서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동상은 말없이 스틸리코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스틸리코를 말없이 꾸짖는듯한 모습이었지만, 동상은 동상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원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그저 폐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투둑투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동상을 적시기 시작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때 저와 함께하기로 한 동지 중에 남은 이는 저뿐입니다. 저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가고 쇠락해질 뿐입니다!”

소나기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이윽고 세차게 비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때아닌 낭패에 다급하게 물건들을 건물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고, 빗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저도 언젠가는 죽고, 폐하께서 다시금 바로 세우고자 하셨던 이 제국도 죽겠지요. 언제나 영원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스틸리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천지가 요동치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개는 동상 위로 내리쳤고, 동상은 형편없이 무너져내렸다.

스틸리코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는 한껏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스틸리코는 옷 소매로 식은땀을 훔치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도···. 저도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만 싶습니다. 당장이라도 전부 관두고 싶단 말입니다!”

거친 숨을마저 몰아쉬던 스틸리코는 무너져버린 동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부러진다고 해도 제 뒤를 이어받을 이가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무너져내린 테오도시우스의 동상의 얼굴선을 따라 빗방울이 쉼 없이 떨어져 내렸다.

******

마리우스는 산더미 같은 금화 더미에 앉아서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돈방석에 앉아보기라는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던 순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았으면···.”

“마리우스!”

“그럴 리가 없지···. 시발.”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수정을 깎아서 만든 수제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우연이네요. 마침 볼로냐 시내를 둘러보던 중에 유모가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지 뭐에요?”

“조금 전에는 아가씨가···.”

“유모? 그랬지?”

프로바의 웃는 얼굴에 유모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우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으음···. 그런데 게르마니아로 떠나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마리우스가 여기 있는데, 굳이 게르마니아로 갈 필요가 있을까요?”

“전에도 말했지만···.”

“전에도 말했잖아요. 상관없다고 말이에요.”

여전히 골치 아픈 상대였다.

대충 게르마니아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나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은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

“각하! 각하! 큰일입니다!”

“또 뭐야···.”

안 그래도 프로바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이제는 사루스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자네의 그 소식이란 거 내 휴식을 방해할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라겠···.”

“동방의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건 지난번에 들었잖아.”

“에우트로피우스가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들으셨습니까?”

“다 들었지.”

마리우스의 말에 사루스가 당황했다.

“저만 몰랐던 겁니까?”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젠장, 그럼 에우트로피우스가 훈족 병사들을 이끌고서 콘스탄티노플로 진군 중이라는 것도 들으셨습니까?”

별 감흥 없이 사루스의 말을 듣고 있던 마리우스는 뜨악한 얼굴로 사루스를 돌아보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니까 지금 황제가 죽었는데, 파비우스가 장인어른을 쫓아냈고 쫓겨난 장인어른께서는 훈족 그 말박이 새끼들이랑 붙어먹었다는 말인가?”

“어···. 파비우스 경의 말로는 서로 소통이 잘 안 돼서 생긴 문제라고는 했습니다만···.”

“그건 지난번에 들었어! 훈족 말이야 훈족!”

“아, 예 그렇다고 합니다.”

“미치겠네, 장인어른이 노망이라도 나신 건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래? 사춘기를 넘어선 오춘기인가 뭔가 그거야?!”

마리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프로바가 한마디 거들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이봐요 프로바, 이건 당신이 참견할 일이···.”

“그냥 당신이 남하해서 로마에 있는 오라버니 엉덩이를 걷어차 버려요. 그럼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요?”

“그게 무슨···. 저는 합하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에서 대기 중인···.”

“그냥 돈 받아서 가만있는 거 아니었어요?”

“크흠···. 아닙니다.”

“어차피 당신 목표는 로마에 있는 제 오라버니를 잡아들이는 거 아니었나요? 그럼 지금이 기회에요.”

“각하, 아가씨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황제의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관심이 동방으로 쏠린 이때.”

사루스는 뒷말을 잇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리우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거참 골치 아프군.”

“골치아플게 뭐가 있어요? 병사들도 준비되었고, 남부의 전염병도 가라앉은 데다가, 오라버니를 지켜줄 병사들도 없어요. 파티 준비가 끝났단 말이에요.”

“이분을 안으로 모시고 다른 이들을 불러와.”

“다른 이들이라면···?”

“네 위로 내 밑으로 전부.”

사루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

“다들 모였나.”

“이 시간에 왜 부르신 겁니까? 한창 볼로냐 성벽 보수작업 중에 불려 나와서는···.”

브레누스가 옷을 탈탈 털면서 일하다 왔다는 티를 팍팍 내자 게지카가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지금 전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먼지 날리잖아!”

“크흠···. 죄송합니다. 버릇이 된 지라···.”

“알면 되었네, 다들 온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하지.”

마리우스는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로마를 지휘봉으로 가르치면서 말했다.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굉장히 간단하네, 나는 로마로 진군할 생각이야.”

“드디어 산맥을 넘어가는 겁니까?”

“그래, 이번 기회에 올리브리우스놈을 끌어내리고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지.”

“겸사겸사 불···. 불···. 로···?”

“불로소득.”

“그래, 그거요.”

마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확실하게 한몫씩 챙겨줄 테니까 말이야.”

“각하! 각하! 각하!”

마리우스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전령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뭔가 일이 벌어진 모양이로군.”

이에 데키무스나 능숙하게 답했다.

“늘 그렇지 않습니까?”

“에우트로피우스가 훈족의 기마부대 삼만 명을 이끌고서 콘스탄티노플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그건 사루스가 했던말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