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세 송이 - 6
사투르니누스가 보여준 편지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판단은 자네 몫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파비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리우스가 에우트로피우스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는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안 나오면 나오게 만드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정 안 되겠다 싶으면은 그냥 안에서 영원히 잠이나 자게 하시고 할 일이나 하시죠.]
얼핏 봐서는 별 내용이 아닌 듯싶었지만, 황제가 죽은 현 상황에서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각하께서 그럴 리가···.”
“이 세상에 믿을 놈은 없는 법이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파비우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투르니누스를 노려봤지만, 사투르니누스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가장 믿는 사람일수록 의심해야 하는 법일세.”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보게 파비우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절대라는 건 없지만, 마리우스 각하께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장군께서 이 편지를 보여주신 것도 제게 의심을 심어주려고 하신 게 아닙니까?”
“그건 너무 억측인 것 같군.”
사투르니누스는 앞에 놓은 꿀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자네가 진실을 외면하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 진실은 장군께서 만드신 진실이 아닙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
“장군께서는 마리우스 각하를 모르시기에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음?”
사투르니누스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인가.”
“마리우스 각하는 생각하고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단 움직이고 나서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도···.”
“그러니까,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
사투르니누스는 파비우스의 말에 할 말을 잊었다.
파비우스가 나름대로 마리우스를 변호한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럴 머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 음···. 그렇구먼···.”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이곳을 떠날 때, 아예 이곳과는 관심을 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지금 각하를 몰아가는 것을 보니 제 생각에 확신이 들기 시작하는군요.”
파비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투르니누스, 당신을 황제 폐하 시해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뭐?”
“들어와.”
파비우스의 말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사투르니누스의 자택으로 들이닥쳤다.
“가족이건 고용인이건 구분 없이 전부 잡아들여.”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처음에는 섭정 공을 의심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는 건가?”
파비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사투르니누스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저택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후···. 자네라면 이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
“의심되는 이들은 모두 잡아들이려고 합니다.”
“내가 잡혀가면은 다른 이들이 가만있을 것 같나?”
“글쎄요. 제 생각이지만, 가만히 있는 편들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파비우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는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
에우트로피우스는 훈족을 돌려보내고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황도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기에 돌아오는 길도 흥겹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계획했던 대로 적당히 돈을 받은 훈족은 약탈품을 들고서 돌아가 버렸고, 동쪽의 국경을 위협하는 페르시아만을 약탈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었다.
물론 그다지 믿을만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도에 있는 의원들의 불만을 잠재울만한 수단은 되었다.
“합하, 곧 콘스탄티노플입니다.”
“파비우스는 우릴 마중 나왔겠지?”
“마중 나온 인원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 으음···. 이상하군.”
평소 같았으면 그를 마중 나왔을 파비우스였건만, 오늘은 보이질 않고 있었다.
“황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럼, 사람을 먼저 보내볼까요?”
“그렇게 하지, 황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파비우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확인하게.”
“예, 알겠···. 어? 저기 친위대 병사들 아닙니까?”
“음? 파비우스가 조금 늦은 모양이군.”
저 멀리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친위대 병사들의 모습에 의아함을 가진 장교가 말했다.
“합하,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뭐가 말이냐.”
“병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거기에 완전무장한 것이 마치 우리를 잡으려는 듯이···.”
“잡으려고 온 다라···.”
에우트로피우스는 눈살을 한껏 찌푸리면서 몰려오는 친위대 병사들을 노려봤다.
늙은 탓에 눈앞이 뿌연 것이 잘 보이질 않았지만, 평소보다 먼지구름이 더 높이 일어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자네 말이 맞는군.”
“하, 합하 우선은 몸을 피하심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일단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에우트로피우스는 다급하게 몸을 피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말을 달려서 친위대 병사들을 떨쳐낸 에우트로피우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파비우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음···.”
에우트로피우스는 고민했다.
무엇이 파비우스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아니, 무엇이어야만 파비우스가 자신을 잡게 만들 수 있는 건가?
그 대답을 고민하던 에우트로피우스는 곧 그 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황제로군.”
“폐하께서 합하를 쳐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반대야.”
에우트로피우스는 찰랑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싶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오래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네, 아마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우울감과 깊은 절망감 때문이겠지.”
“그렇다는 말은···.”
“그래, 내가 숨겼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에우트로피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장교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그 사실을 말해서 좋을 게 있나?”
“로마의 황제가 죽은 사건입니다! 그걸 숨기셨다는 건 합하께 다른 저의가 있다고밖에는···.”
“내가?”
에우트로피우스는 장교를 비웃었다.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상상해보게나, 황좌는 비었고 이를 노리는 사람들은 곳곳에 널려 있었어.”
“결국은 합하께서 황좌에 앉으시려 한 게 아닙니까?”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내가 황제가 되려고 했으면 진즉에 황제가 되었을 거야. 기회는 언제고 있었어.”
“그럼 왜 안 하신 겁니까?”
장교의 말에 에우트로피우스는 말없이 서쪽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듯이 말이다.
잠깐 말없이 지켜보던 에우트로피우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야. 내가 황제가 된다고 그랬다가는 저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뛰어올 테니까 말이야.”
“예?”
장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설명해줄 마음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 우리는 울딘에게로 가자꾸나.”
“울딘이 우릴 받아주겠습니까?”
“그거야 내 세 치 혀에 담긴 것이겠지.”
******
볼로냐에서 주둔 중인 마리우스는 회까닥하고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 말은 황제 폐하께서 폴로랑 짝짜꿍해서 장인어른의 세력을 전부 쳐냈다는 말이냐?”
“명쾌한 요약이십니다. 장군.”
“허허···.”
이 소식만 해도 마리우스를 어질어질하게 했건만, 다른 소식은 그를 뒤집히게 했다.
“동방에서 황제가 죽었는데, 그 범인이 내 장인어른이라 이 말인가?”
“사투르니누스라고 용의자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
“그건 또 뭐 하는 새끼야?!”
“듣기로는 오랜 세월을 군에 종사하시면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한 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설명을 들은 마리우스는 혀를 찼다.
“쯧쯧···. 지난번에 장인어른께서 걱정하시던 게 이거였군.”
“뭔가 알고 계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이번 일은 파비우스가 단단히 잘못짚었어.”
“뭐가 말입니까?”
“황제는 암살당한 게 아니라 자살한 거야.”
“그렇군요.”
데키무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마리우스는 생각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물었다.
“무슨 반응이 그래? 황제가 자살했다니까?”
“예, 뭐···. 여기는 황제가 두 명이지 않습니까? 한 명쯤 죽는다고 뭐···. 무슨 문제라도 생기겠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가 않지!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마리우스는 정신을 번쩍 차리면서 데키무스를 나무라려고 했지만, 데키무스는 마리우스가 방심하고 있는 틈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각하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선물? 무슨 선물?”
“들어오시지요.”
이윽고 마리우스의 집무실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라벤나 의회의 의원들이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제법 넓은 방이었으나 순식간에 밀려든 사람들로 인해 꽉 차버리고 말았다.
“각하! 마리우스 각하!”
“포악한 황제 호노리우스가 우리의 재산을 빼앗고, 맨몸으로 우리를 내쫓았습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마리우스는 두 눈을 깜빡이면서 의원들과 데키무스를 번갈아 봤다.
“조금 전에 폐하께서 섭정 공의 세력을 쳐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거라고?”
“예, 처리는 각하께 맡기겠다는 모양입니다.”
“내가 무슨 망나니야? 폐하께서 정말 보자 보자 하니 너무하시군.”
마리우스가 그동안 호노리우스에게 쌓아온 불만을 조금 터뜨리자 침울했던 의원들의 표정이 한껏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속에 빠졌다가 구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마리우스에게 매달리려는 의원들을 가로막은 것은 데키무스의 말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좋은 곳에 쓰시라고 소정의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소정의 선물···?”
“창밖을 보시겠습니까?”
마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볼로냐로 들어오는 끝없는 수레 행렬이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수레들에는 무엇인가가 잔뜩 실려있었다.
“저게 그 소정의 선물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마리우스와 데키무스가 할 말을 잊고서는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고, 의원들을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키무스.”
“예, 각하.”
“오늘이 크리스마스인가?”
“예? 그건 또 무슨···.”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이 친구들을 어떻게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뭐 그런 말은 없었나?”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데키무스가 건네준 편지를 본 마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후···. 제대로 칼춤 춰보라는···. 음?”
“왜 그러십니까?”
호노리우스의 편지를 둘러보던 마리우스는 한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안토니나와 라벤나로 돌아갔다고?”
“오···.”
“뭐가 오···. 야!”
“각하께서 조만간에 섭정 공을 몰아내시고 황제 폐하의 장인이 되시겠군요.”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는 부들거리면서 소리쳤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