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세 송이 - 5
스틸리코는 천천히 알렉산드리아의 일을 처리했다.
여기저기 문제가 될 부분이 많았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많이 바뀌고 있었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우선 상업지구가 재건되었다.
아직은 알렉산드리아 이곳저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전염병 탓에 상인들의 출입을 막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주거 구역이군.”
“일단은 인부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구역을 나누시는 게 맞을 듯싶습니다.”
“얼마 전에 보니, 동문밖에 천막촌이 생겼던데 무슨 일인지 알아봤나?”
“알렉산드리아 재건으로 돈이 흐르기 시작하니,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유민들과 다른 도시의 빈민들이 유입되는 것 같습니다.”
“쯧···. 도시 내에 그들이 거주할 공간을 마련해주는 게 우선이겠군.”
스틸리코는 그날도 알렉산드리아의 재건을 위해서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올리브리우스의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마리우스 또한 연이은 원정으로 골골거리고 있었으니 모든 일이 생각대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일 때, 문제가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마리우스가 미쳐버린 건가.”
“무슨 일입니까?”
스틸리코는 편지를 구기면서 말했다.
“올리브리우스와 마리우스가 손을 잡았다. 마리우스가 조만간 게르마니아로 돌아간다는 소식이야.”
“에이···. 누구에게서 온 편지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마요리아누스.”
스틸리코는 언짢다는 얼굴로 부관에게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마리우스가 올리브리우스의 여동생과 접촉하고 상당량의 돈을 받은 건 사실인 것 같네.”
“그렇다는 건···. 마리우스가 진짜로···?”
“흠···. 마요리아누스가 보내온 소식이니 믿을만한 소식이겠지.”
스틸리코는 잠시 말없이 지도를 노려봤다.
지도를 보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부관은 후자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던 스틸리코는 피식 웃으면서 부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로 돌아가야겠어.”
“벌써 말입니까?”
“알렉산드리아의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일을 끝내야 해.”
******
지난 알라리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콘스탄티우스는 플로렌스에 틀어박혀서 마리우스를 기다렸다.
볼로냐에서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갑갑함을 느낀 콘스탄티우스는 연신 전령을 보내면서 마리우스를 독촉하고 있었다.
[플로렌스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처지입니다. 각하의 도움만이 플로렌스의 병사들과 시민들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게르마니아의 정당한 지배자이시어 보이자 신앙의 수호자이시며, 로마를 지키시는 마리우스 각하께···.]
[게르마니아의 대추장이시어 보이자, 브리타니아의 정복자이신 마리우스 대왕께 아뢰는바···.]
날이 갈수록 편지는 더욱 간절해지고, 온갖 미사여구와 존칭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이런 편지가 매일같이 날아들다 보니, 마리우스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으음···. 콘스탄티우스 이 자식은 알라리크한테 얻어맞았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뭘 이렇게 징징대는 거야?”
“알라리크한테 호되게 당한 모양입니다.”
“쯧쯧쯧···. 지난번에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병사들의 휴가건 말입니까?”
“그래 그거 말이야.”
“최소인원들만 남겨두고 대부분 병사를 인근의 볼로냐로 외출, 외박을 나가게 해 주고 일부는 게르마니아로 휴가를···.”
“야 이 미친 새끼야!!”
마리우스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데키무스가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지금 전염병으로 뒤숭숭한데 병사들을 죄다 내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플로렌스도 멀쩡하고, 병사 중에 병에 걸린 자가 없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머리야···. 다른 도시에 환자가 있으면 어찌할 건데 이새끼야!”
“에이···. 설마 그렇겠습니까?”
마리우스는 이마를 '탁' 치고는 말했다.
“지금 당장 병사들 전부 부대 복귀시키고, 군영 내를 싹 청소해서 빈대나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나오게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알겠나!”
“저, 전 장병 복귀 말입니까?”
“그래, 당장···. 아오···.”
마리우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혐오하고 분노하던 행위를 지금 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로 입이 다물어지고 있었다.
“후···.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복귀시켜.”
“병사들이 안 좋아할 것 같습니다.”
“일단 며칠 동안은 특식을 제공하면서 이번에 받은 금화를 생명 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조금만 뿌려.”
“으음···. 그런다고 화가 풀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데키무스,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돈으로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건 돈이 모자란다는 뜻이야.”
당연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병사들은 뒤집혔다.
세상에 어떤 이가 자신의 휴가가 잘렸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상관의 실수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아잇 씻팔!”
“한창 좋았는데, 이게 뭐냐고!”
“그까짓 병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내 휴가를 자르는 건데?!”
“제발 내보내 줘!!!”
“집에 보내줘!!”
당연하게도 병사들의 반응은 거칠었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줬다가 다시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사탕을 빼앗은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사탕을 다시 돌려준다고 해서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는 않는다.
“미안하다! 전부 내 잘못이다!”
그래서 마리우스는 병사들의 앞에서 사과했다.
마리우스도 휴가를 잘려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이 얼마큼 분노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는 그냥 제일 높은 사람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이건 전부 내 부적절한 지시 때문이다. 너희들의 휴가는 보장될 것이고, 이번일 적에 대한 사죄이자 보상을 하고자 한다.!”
“보상이 뭡니까!”
“아주 좋은 질문이다! 이탈리아에는 맛좋은 식자재들만큼이나 훌륭한 음식들이 많다. 따라서 이번 주 내내 너희들에게는 특식이 제공될 것이다!”
“특식···?”
“적어도 지겨운 짬밥은 당분간은 안녕이네.”
병사들의 분노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전투에 참여한 이들에게 생명 수당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수당을 내리겠다!”
“특별수당?”
“보너스 같은 건가?”
“그럼 그렇지, 결국 돈으로 때우려는 거 아냐?”
“쯧···. 끽해야 푼돈 좀 주겠지.”
복무한 지 얼마 안 되는 병사들이거나, 마리우스에 대해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병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특별수당···?”
“오···. 안 그래도 아들놈 공부시킨다고 허리가 휘었는데, 다행이네.”
“돌아갈 때는 마누라한테 반지 하나쯤은 사줄 수 있겠네?”
“돈 준다는데 뭐···. 어차피 밖에서 놀 것도 없었는데 잘 된 일이지.”
반면에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오랜 시간 복무한 이들이나, 게르만족 병사들 같은 경우에는 마리우스가 지급하는 ‘특별수당’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매우 흡족해하면서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인당 금화 열 닢!”
“여, 열 닢?!”
마리우스의 말을 들은 데키무스는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으면서 졸도해버렸고, 그 모습을 본 브레누스는 게지카에 물었다.
“열 닢이면 많은 건가?”
그의 질문에 게지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휴···. 이런 놈을 대장이라고 따르는 네 백성들이 불쌍해지려고 한다.”
“뭐 인마?!”
“금화가 열 닢이면, 힘 좋고 튼튼한 말을 세 마리나 사고도 돈이 남아서 염소도 몇 마리 살 수 있어.”
“오···. 그럼 농사일할 때 편하겠네?”
“그래 인마···.”
브레누스가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 돈은 저렇게 쓰는 거로군.”
“그래, 너처럼 쓸데없이 돈을 모으기만 하면 안 돼.”
“내가 뭘! 여동생 결혼시키려고 돈 모으는 중이라니까 그러네!”
“그 곰 같은 여동생?”
“곰 아니라니까 그러네! 너도 지난번에 이쁘다고 했잖아 인마!”
“그거야 네 여동생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 험담을 하겠냐? 바로 허리가 반으로 접혀버릴 텐데 말이야.”
“너 이 자식 말 다 했어?!”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오늘도 변함없이 사이좋게 투덕거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우스의 말에 병사들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그대로 황당해 버렸다.
이윽고 모두 정신을 차리고서는 마리우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리우스! 마리우스! 마리우스!”
“대추장 마리우스 만세!”
“금화···. 반짝이는 금화···. 그래-그래!”
단숨에 병사들의 불만을 휘어잡은 마리우스는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
“폐하, 왜 이 시간에 모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내가 왜 이 시간에 모이라고 했을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페트로니우스가 누구인가.”
호노리우스의 말에 의원들은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바라봤고, 의원들 사이에서 한 명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
“제가 페트로니우스입니다. 그런데 무슨일로 그러시는지요?”
“오늘 아침에 라벤나 인근을 둘러보는데 말이야···. 내가 재밌는 걸 봤지 뭐야?”
“무엇을 보셨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요새 내 친위군단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둘러봤는데···. 내가 뭘 봤을 것 같나?”
호노리우스의 말에 페트로니우스가 조금씩 몸을 떨기 시작했다.
“무, 무엇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와는 관련이 없는 듯합니다만···.”
“그래? 모른다고 하니 말해주지, 내 병사들이 훈련은 하지 않고 자네 사촌 동생의 밭을 갈고 있던데···. 이래도 아는 게 없나?”
“아, 그건 합하께서 지난 특별세를 징수하실 때···.”
“그래서 그 병사들은 누구의 병사들인가.”
“예?”
“누구의 병사들이냐고 물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이제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거야 폐하의···.”
“내 군대지, 네 군대가 아니야. 그리고 스틸리코의 군대는 더더욱 아니지. 맞나?”
“폐하, 섭정 공께서는 폐하를 대신해서 이 넓은 제국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폐하의 군대 또한 섭정공의 군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그렇습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페트로니우스가 곤란해 보이자 동료의원이 그를 돕고 나서면서 호노리우스의 앞에 섰다.
그는 태연하게 호노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하길···.
“폐하께서는 골치 아픈 정치에 손대시려고 하시지 말고 늘 그렇듯이 느긋하게 노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자네들은 그들이 내 병사들이 아니라 스틸리코의 병사들이니 문제없다는 태도로군.”
“에이···. 그러시지 마시고, 제가 오늘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다. 그들은 누구의 병사들인가?”
호노리우스의 조금 거칠어진 말투에 의원들은 서로에게 눈을 굴리면서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페트로니우스는 땀을 뻘뻘흘리면서 사태를 중재하려고 했다.
“폐, 폐하 다음부터는 이런일이 없을테니...”
“누구의 병사냐고 물었다.”
“그건...”
페트로니우스가 우물쭈물하면서 쉽사리 답하지 못하자 호노리우스가 코웃음을 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병사들이다. 마리우스가 새로이 창설해서 내게 바친 내 병사들이란 말이다! 그들을 무시한다는 건 곧 나를 무시한다는 게 아닌가!”
호노리우스의 분노를 맞닥뜨린 의원들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 서로 간에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도대체 뭐가 필요하신 겁니까?”
“일단은 자네들을 치워버리고 싶군.”
“예?”
호노리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어전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내 친위대 병사들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들어왔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하시는 겁니까.”
“잘 알고 있지. 나는 자네들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는 걸 기억하게나.”
“합하께서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은 자네들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폐하!”
“전부 끌고 가서 가둬두게.”
호노리우스의 말에 폴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원래 죽이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그랬는데···.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거든.”
“재밌는 생각이라니···.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숙부한테서 배운 게 있거든.”
호노리우스는 씨익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