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세 송이 - 4
호노리우스가 라벤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겨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궁전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호노리우스의 귀환을 꺼리기까지 했다.
“어서 오세요.”
“음···.”
그런 궁전 내에서 호노리우스를 반겨주는 이는 그의 부인인 마리아가 유일했다.
마리아는 황제와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호노리우스는 그런 그녀를 부담스러워 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네가···. 안토니나구나!”
마리아는 안토니나를 크게 반겨줬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테르만티아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였다.
마리아는 안토니나를 궁전으로 이끌며 말했다.
“라벤나는 처음이지? 내가 안내해줄게.”
“감사해요···.”
안토니나는 마리아의 과도한 친절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호노리우스 또한 복잡한 심경으로 마리아와 안토니나를 번갈아 보고는 낯선 궁전으로 들어갔다.
호노리우스는 라벤나로 돌아온 그 날부터 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편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스틸리코의 편까지 말이다···.
그렇게 명단을 정리해가던 호노리우스는 생각보다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이렇게까지 믿을 사람이 없다니···.”
“예상하신 일이 아닙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나는 그냥 허수아비였던 건가···.”
“어쩌겠습니까, 그동안 신나게 노는 모습만 보여주셨으니 그럴만하지요.”
“숙부의 눈을 피해서 힘을 길렀다고 해줄래?”
“좋은 말로 하면 그렇죠.”
폴로의 말에 호노리우스가 그를 노려보자 폴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친위대는 전부 장악한 거 맞지?”
“마리우스 각하가 대장이던 시절부터 함께했던 이들이고, 새롭게 충원한 이들도 전부 제 사람들입니다. 폐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친위군단인가 하는 그것도 아직 있어?”
“으음···. 있긴 한데···. 지금은···.”
“왜? 당장 동원하기 힘들어?”
******
호노리우스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병사들이 훈련을 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짓고 있는 거야!”
“이렇게 된 지 좀 됐습니다. 귀족들이나 인근의 유지들이 병사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밭을 경작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 도대체 왜?”
“섭정 공께서 허락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병사들을 데려가서 쓰는 걸 왜 숙부가 허락하고 있냐고! 나한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야!”
호노리우스가 극대노하면서 소리치자 폴로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병사들을 불러들일까요?”
“그래! 당장 전부 불러들여!”
한창 농사일을 하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농사일을 끝낸 농부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본 호노리우스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말했다.
“제군들은 농부인가 병사인가.”
호노리우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멀뚱히 황제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에 결국 분노한 호노리우스가 소리쳤다.
“농부인지 병사인지 묻지 않았는가!”
“병사입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자신들의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분노를 넘어서 황당함을 느낀 호노리우스는 잠깐 병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폴로가 한숨을 내쉬면서 소리쳤다.
“이놈들! 이분이 바로 로마의 수호자이자, 너희들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이시니라!”
“아···.”
하지만 병사들의 반응은 건조하기만 했다.
다들 고된 농사일에 지치기도 했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수입은 농사일 뿐이었던지라, 일을 방해하는 황제가 미울 뿐이었다.
“이놈들! 일하다가 말고 뭣들 하는 거야!”
땅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하인들을 이끌고서는 뛰어나와 병사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황제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돈 받기 싫은 거야?! 도대체가 다들 게을러 터져서 원···.”
“흠흠···.”
“내가 너희들한테 쓰는 돈이 얼마인데 다들 이러고 있는 거야! 당장 일하러 가지 못해?!”
병사들은 호노리우스와 지주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지주는 호노리우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댁은 누구시기에 남의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방해하는 겁니까?”
“댁?”
“자네 지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폴로, 그만.”
호노리우스는 발끈하는 폴로를 말렸다.
지주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기세를 올리면서 황제에게 손가락질했다.
“보아하니 어디 귀한 집 자식 같은데, 쓸데없이 남의 일 방해하다가는 길가다 칼 맞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단지 제 사촌 중에 라벤나 의회 의원이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십시오.”
“그래? 이름이 뭔가.”
“이름을 대면 알기나 하시는지요?”
이제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그의 태도에 호노리우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기보다는 궁금해졌다.
과연 이 인간이 자신이 황제인 걸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말이다.
“한번 말해보겠나?”
“아니, 그런데 아까부터 왜 반말이야!”
“흠···.”
“내 사촌한테 말 한마디만 하면, 네놈은 파두스강에 떠다니는 물고기 밥이 될 줄 알아!”
“그러니까 네 녀석의 사촌이 누구냐고 물었다.”
호노리우스는 어투는 평소처럼 가볍지 않고 진중했다.
“페트로니우스라고 말하면 아는지 모르겠군.”
“페트로니우스···?”
호노리우스가 폴로를 돌아봤다.
하지만 폴로는 알지 못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호노리우스가 모르는듯한 눈치를 보이자, 지주는 한껏 신이 나서 소리쳤다.
“하! 역시 네놈들이 알 리가없···.”
지주는 그제야 호노리우스의 곁에 서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발견했다.
그가 알기로 라벤나에서 온몸에 걸친 모든 장비를 검은색으로 맞춘 병사들은 단 하나뿐이었다.
“친···. 위대?”
“커흠.”
“친위대가 이곳은 왜···.”
이탈리아, 아니 로마의 시민 중에서 새롭게 태어난 친위대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동방원정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위명은 메디올라눔 전투에서 정점을 찍었다.
시민들은 친위대에게 환호를 보내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하곤 했다.
눈앞의 지주처럼 말이다···.
“제, 제가 귀한 분들을 못 알아보고···.”
“커흠···. 내가 아니라 저쪽을 보게.”
“예?”
지주는 호노리우스와 폴로를 번갈아 봤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할 머리는 없는 듯해 보였다.
“후···.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시각부터 내 병사들을 돌려받겠다. 그동안 이들을 부려먹은 값을 제대로 지급하게.”
“예? 당신은 누구시기에···.”
“맙소사···.”
“후우···. 내가 저들의 주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누구겠나.”
지주는 영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호노리우스는 이마를 '탁' 치더니, 인제 그만 치우라는 듯이 폴로에 손짓했다.
“적당히 몇 대 쥐어박아서 구석에 던져놔. 그리고 페트로니우스인지 페테르 인지하는 새끼는 당장 내 앞에 끌고 오고.”
“예, 폐하.”
“폐하···? 황제 폐하···!”
그제야 누군지 깨달은 지주가 애걸복걸했지만, 이미 황제는 자신의 친위대장과 함께 떠난 뒤였다.
“폴로, 이런 일은 라벤나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거겠지? 다른 곳들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
“비슷할 겁니다. 지방의 군대들은 이미 장군들의 사병집단이나 다름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음···. 지금은 게르마니아의 총독이신 마리우스 각하께서 아직 친위대에 계시던 시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리우스가?”
폴로의 말에 호노리우스가 귀를 쫑긋이며 물었다.
“싸울 군대는 없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대는 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류상에 만 있는 부대, 서류에도 없는 부대, 많이 부풀 러며 있거나 그 반대인 부대 등등···.”
“그게 전부 로마에 있다고?”
“뭐···. 그렇습니다.”
“미치겠군.”
그동안 모든 일을 스틸리코에 맡겨뒀던 호노리우스는 그제야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대충 알아차렸고, 말이다.
“의회에 의원들을 소집해.”
“병사들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
파비우스가 사투르니누스를 찾아가니 그가 반갑게 파비우스를 맞이했다.
“파비우스, 오랜만이군.”
“장군,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할 일도 없이 늙어가고 있는 거지.”
사투르니누스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서는 파비우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오랜 세월을 로마를 위해 싸워온 충직하면서도 유능한 군인이었던 사투르니누스였지만, 지금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늘그막에 한가로이 벌이나 치고 있는 사투르니누스는 젊은 파비우스의 방문이 반가울 뿐이었다.
“꿀차라도 하겠나? 내가 직접 기른 거라 꿀들이 꿀맛이라네.”
“하하하···. 예, 한 잔만 주시지요.”
파비우스의 어딘가 개운해 보이지 못하는 무거운 얼굴에 사투르니누스는 그가 괜히 이곳을 방문한 게 아님을 눈치챘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이제는 날 쳐내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하긴 그 늙은 괴물이 너무 오랫동안 날 내버려 두기는 했어.”
사투르니누스는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
잠깐 고민하는 듯이 보이던 사투르니누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파비우스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사투르니누스의 몸이 덜컥 멈춰서더니, 그의 얼굴에서 오만가지 표정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우는 것인지 웃는 건 지모를 오묘한 표정을 짓고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 그렇군···.”
“알고 계셨습니까?”
“내, 내가 알고 있었을 리가···. 있···. 있···.”
말끝을 떨던 사투르니누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충 눈치채고는 있었네.”
“누가 한 짓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장군에게만 처음으로 말하는 겁니다.”
“쯧···. 지금 누구를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아마도 자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닐 거야.”
“에우트로피우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새끼.”
사투르니누스는 잠깐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겨 들었다.
황제와 관련된 자 중에 소리소문없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를 고민해보던 것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아니야.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을 숨겼으면 숨겼지, 죽이려고 들만한 놈은 아니야.”
“그럼 누구겠습니까?”
“티마시우스···. 그 친구는 죽었고, 스틸리코···. 는 동방에서의 영향력이 거세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논외···.”
사투르니누스에서는 로마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정치인과 장군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튀어나왔지만, 이거다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마리우스···. 그래, 이자가 제일 의심되는군.”
“예? 그분이 왜 튀어나옵니까?”
“이번 일로 제일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예? 동방과는 관련도 없는 분이 어떻게 이득을 보신다는 겁니까?”
사투르니누스는 검지로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지금 아르카디우스가 죽으면, 동방에서 황제직을 이을만한 이가 누가 남아있는가.”
“그거야···.”
파비우스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틸리코와 마리우스는 호노리우스를 밀겠지, 그리고 그자가 동서 방의 모든 로마를 통합한다면···. 호노리우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리우스가 이득이겠지?”
“그건 너무 끼워 맞추기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럼 이건 어떤가.”
사투르니누스는 서랍에 있는 종이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편지하나를 꺼내 파비우스에게 건넸다.
“읽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