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94/187)

백합 세 송이 - 3

에우트로피우스는 권력에는 귀신같았다.

복마전 같은 황궁에서의 권력투쟁에서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향방을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행동력 덕분이었다.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아 왔고, 살아남았으며, 살아남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당신의 앞에서 제안합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필요하다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달라는 건가?”

“아니요.”

에우트로피우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평화를 돈 주고 사겠다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을 고용하겠다는 뜻이지요.”

“고용? 고용이라···. 외적을 동원해서 자신의 적을 치겠다. 그런 건가?”

“적이라니요.”

에우트로피우스가 손짓하니, 노예들이 낑낑거리면서 거대한 궤짝을 들고 왔다.

거대한 궤짝을 본 울진은 위엄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선은 궤짝을 향하고 있었다.

“돈으로 우릴 사겠다는 건, 건···. 가?”

“당신네를 사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위한 선물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노예들이 궤짝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황금으로 된 기운찬 황금 조각상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어찌나 반짝이던지, 울딘의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에우트로피우스는 웃고 있었다.

******

한편, 이 사실에 못마땅해하던 파비우스는 에우트로피우스를 따라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에 남았다.

명목상으로는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준동할 군부의 반란세력을 감시하라는 역할이었지만, 실상은 땍땍거리면서 협상을 파투낼까 봐 두고 간 것이었다.

“훈족 놈들은 믿을게 못 된다니까···.”

파비우스는 황궁에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황궁의 복도를 거닐던 파비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아르카디우스의 방 앞으로 와버렸다.

몇 년 동안 얼굴도 본 적 없는 황제였지만, 그날따라 파비우스는 술기운에서였는지 아니면 처량한 자신의 처지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방문을 열었다.

“폐하, 파비우스입니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방안을 둘러봤지만, 황제는 보이지 않았고 웬 구질구질하면서 역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어둑한 방안의 모습과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바깥에 있던 촛대를 들고 와서 방안을 밝혔다.

“쯧쯧···. 환기라도 제대로···. 헉!”

환기라도 시키고자 어두운 커튼을 열어젖히자, 밝은 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더니 이내 침대에서 썩어가는 한 구의 시체를 보여줬다.

파비우스는 매우 놀라서 뒤로 넘어졌고, 촛대가 부서지면서 촛불이 꺼져버렸다.

“이, 이게 웬 시체가···?”

파비우스는 단숨에 술에서 깼다.

천천히 일어나면서 다시금 시체를 살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제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눈앞의 시체를 본 파비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커튼을 치고서는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왔다.

다리가 풀려버린 파비우스는 벽에 기대고서는 주저앉아버렸다.

“황제가···. 황제가 죽었다···?”

파비우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이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황제에 대한 소식을 못 들어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방안에 칩거하여 방탕하게 지낸다는 게 다였다.

“그리고···. 티마시우스···. 그자가 폐하에게서 친서를 받았다고 했지.”

뭔가가 생각 날듯 말 듯 하는 것이 머리가 아팠다.

마리우스나 에우트로피우스라면 명쾌하게 해답을 내줬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섭정공···. 지금 제일 의심되는 건 그 사람이다.’

파비우스는 한참이나 머리를 굴렸지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황제의 죽음을 숨김으로써 이득을 본 게 에우트로피우스뿐이라는 것이었다.

“사투르니누스···. 그자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겠지.”

한참을 고민하던 파비우스는 꽤 오랫동안 황제의 방앞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숙고하던 파비우스는 친위대 병사들을 불러 황제의 방문을 지키게 하고서는 사투르니누스를 찾아갔다.

******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까무러치게 놀라는 거 있죠?”

“아, 예···.”

마리우스는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은 프로바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마리우스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더운데 좀 떨어지시는 게···.”

“제가 몸이 차가워서 괜찮아요.”

“주변에 보는 이들의 시선이···.”

“시선이 왜요?”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부럽다고 생각할 뿐, 딱히 그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을 한다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에게서 마리우스를 욕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늘의 태양을 욕할 수나 있겠는가?

바라보다가는 눈이 멀어버릴 뿐이었다.

“끄응···.”

“와···. 필체가 깔끔하시네요.”

“감사합니다만···. 조금만 옆으로 가주시겠습니까?”

“헤헤헤···.”

그녀에게 꼬리가 달려있다면 프로펠러처럼 휘젓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마리우스가 단호하게 그녀를 떼어놓으며 말했다.

“이보세요! 저는 이미 부인과 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가정이 있다는 뜻이지요! 아가씨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로마의 황제도 이제 세 명인데···. 부인도 셋 정도 둘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

“말이 그렇다는 거죠.”

프로바는 마리우스의 당혹스러운 얼굴에도 방긋 웃으면서 마리우스를 이끌었다.

그런 마리우스의 모습을 올리브리우스가 보낸 첩자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데키무스가 프로바를 따라온 수행원들을 검사해야 했지만, 그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은 반짝이는 금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거기! 금화에서 손 떼!”

“이렇게나 많은데, 이 중에서 하나쯤 슬쩍한다고 눈치나 채겠습니까?”

“자네 손 하나만 자르면 금화가 100닢인데, 그걸 반으로 나누는 건 어떤가?”

“......죄송합니다.”

데키무스는 광적일 정도로 금화에 신경을 썼다.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면서 주변을 병사들로 에워싸버린 탓에 마리우스도 접근하기 힘들 정도였다.

“금화는 구경도 못 해보는구먼.”

“데키무스가 꽁꽁 감춰뒀는데 무슨 수로 찾겠나.”

“왜 저렇게 돈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

“으휴, 곰 같은 녀석아 생각을 좀 해봐.”

“뭐?! 곰!!”

브레누스가 발끈했지만, 게지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 곰 같은 녀석아. 지금 게르마니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나 알고는 있냐?”

“재정상태가 어떻길래 그래.”

“지난번에 알비스를 넘어서 비디메르와 싸운 것부터 시작해서 브리타니아, 그리고 여기까지 왔잖아.”

“그게 왜? 우리 부족···. 아니, 내 영지는 아직도 멀쩡한데 말이야.”

“곰 발바닥만 한 네 영지랑 게르마니아가 같냐?”

“너 지난번부터 자꾸 그럴래?”

브레누스가 투덜거렸지만, 게지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가 이번에 전하께서 여러 가지 정책을 펴신다고 돈을 쏟아부었잖아. 그러다 보니까 돈이 모자라기 시작하는 거지.”

“으음···. 어쩐지 요새 아그리피넨시스의 물가가 좀 많이 오르긴 했어.”

“그만큼 임금이 많이 올랐잖아.”

“그건 그렇지.”

브레누스는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프로바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러다가 전하께서 저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 버리면 어쩌지?”

“마님들을 잊은 거야?”

“아, 그렇지.”

******

“여기까지는 생각한 대로 굴러가고 있군.”

“남부에서 유행 중이던 전염병도 일단은 그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어. 이제 막 한껏 타올랐던 불길을 잡은 것일 뿐이니까 말이야.”

올리브리우스는 매우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는 급격하게 군대를 늘리지도 않았고, 부족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세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가면서 때를 보고 있었다.

“알라리크경, 살아서 볼 수 있으니 다행이오.”

“......저도 그렇습니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알라리크는 전처럼 올리브리우스를 깔보거나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전과는 다르게 한껏 공손해진 태도로 올리브리우스를 대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알라리크가 이끌고 있던 부족연합은 알라리크가 힘으로 다른 이들을 두들겨 패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알라리크가 큰 피해를 보고 돌아오자, 이를 기회라고 여긴 올리브리우스는 알라리크의 직속 부하들과 아닌 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리크의 직속이 아닌 병사들과 족장들을 하나둘씩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알라리크의 병사들을 빼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불어서 전선에서 돌아오는 알라리크의 패잔병들을 각기 다른 부대로 분산 배치하며 그의 힘을 완전히 빼버린 결과.

알라리크의 휘하에 남아있는 병사들은 그가 전선을 벗어날 때 함께하던 병사들 천명뿐이었다.

“알라리크경은 이 일에 대해서 뭔가 해줄 만한 조언 같은 게 있습니까?”

“제 조언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마리우스와 맞부딪혔으니 그에 대한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저보다는 마요리아누스가 더 제대로 알고 있겠지요. 그에게 발탁된 인물이 아닙니까.”

알라리크의 말에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마요리아누스가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제, 제가 마리우스에게 발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게르마니아로 간 뒤에는 연락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마요리아누스의 자기변호에 아타울프가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혹시 모를 일이죠. 마리우스와 몰래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거나···.”

“나는 마리우스가 아니라 로마를 위해 일한다 이 어리석은 야만인아!”

“뭐 그러시겠죠.”

아타울프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 상황을 중재해야 할 올리브리우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다른 이들을 관찰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리우스한테 지고서는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면서, 그 화풀이를 내게 하는 건가?”

“지금 나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그럼, 여기서 마리우스한테 깨지고 돌아온 사람이 자네랑 버르장머리없는 자네 동생 말고 누가 있나.”

“그 혓바닥을 잘라주지!”

“아타울프!”

마요리아누스의 말에 아타울프가 발끈하면서 검에 손을 대려고 하자 알라리크가 크게 호통을 치며 그를 막아섰다.

졸지에 알라리크에게 한 대 얻어맞은 아타울프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알라리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아군끼리 싸워봤자 좋을 것이 뭐가 있어!”

“하지만 저놈은 형님을···.”

“네가 쓸데없이 저자를 도발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냐! 당장 사과해!”

“형님···!”

“사과하지 않겠다는 거냐? 내 명령이 그렇게도 우습게 들렸나 보군.”

“그게 아니···. 억!”

알라리크의 주먹이 동생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알라리크는 아타울프가 바닥을 기어 다닐 때까지 동생을 두들겨 팼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렸고, 말이다.

“그만.”

결국, 보다못한 올리브리우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알라리크를 말리자, 그제야 알라리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멈춰 섰다.

마요리아누스는 그런 올리브리우스와 알라리크를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살폈고, 말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보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점에 사과합니다.”

“아니야. 자네 동생이 기절한 모양인데,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보게.”

“감사합니다.”

알라리크와 그 부하들이 아타울프를 데리고 어전을 빠져나가자 오전에 모여있던 그의 부하들이 한마디씩 했다.

“역시 야만인들이란···.”

“대뜸 사람을 의심하지 않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형제를 두들겨 패버리다니···.”

“자자···. 오늘은 더는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이만들 물러가 보게.”

“예, 폐하.”

모두 어전을 빠져나가자 혼자가 된 올리브리우스는 조용히 노복을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요하이아스, 스틸리코에 편지를 전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편지하나를 내어줄 테니 마요리아누스가 보낸 편지인 척 스틸리코에 전달하게.”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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