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93/187)

백합 세 송이 - 2

황제가 떠난다는 소식에 수많은 아그리피넨시스의 시민들이 그를 배웅해줬다.

이곳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황제가 게르마니아에 보인 관심에 시민들은 그를 좋아했다.

황제가 베푼 은혜로 게르마니아에는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특산품이 생겨났다.

기존에 노리쿰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강철 사업에 비집고 들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몇 달 만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기에 호노리우스가 만들어둔 연구실에서는 그의 조수들이 황제가 남긴 납을 금으로 바꿔 달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이것 좀 볼래?”

“뭔데 그래.”

“아편을 좀 만지작거렸는데, 신기한 게 나왔어.”

“으윽···. 아편? 너 그런 거 가지고 노는 거야?”

“이건 순전히 내 학문적인 호기심에···.”

“됐어 약쟁이 새끼야.”

“아니, 잘 들어봐 이새끼야!”

눈 밑이 시커먼 이가 동료에게 찰랑거리는 투명한 액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나 잘 봐.”

말을 꺼낸 이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동료는 액체보다 주사기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건 또 뭐야? 그거 어디서 났어.”

“이거? 폐하께서 심심해서 만든 거라던데, 위험한 거 다룰 때 쓸만하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나도 챙겨줘.”

“안돼, 이거 특수한 바늘 만드는데 얼마나 비싼데 그래.”

“그냥 대충 만들면 되는 거 아냐?”

“장난해? 이거 만든다고 스노든 할아범이 일주일을 꼬박 새웠다고!”

“으음···. 유리에 바늘까지···. 비싸 보이긴 하네.”

“이거 하나에 말 두 마리 값이야.”

“와···. 역시 황제 폐하인가···?”

“아무튼! 이거나 잘 봐.”

주사기에 액체를 쪽 빨아들인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손등에 있는 혈관에 꽂아 넣었다.

액체를 쭉 밀어 넣자 그의 눈동자가 마치 점처럼 작아졌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각칼로 팔을 죽 그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하나도 안 아파!”

“아니, 미친 녀석이!”

동료가 황급히 붕대를 가져와서 그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틀어막았다.

뼈가 보일 정도로 제법 깊게 팬 모습에 동료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안 아픈 거 맞아? 뼈까지 내리찍은 모양인데···. 일단 병원부터 가자!”

“이거 한 대면 고통을 못 느낀다니까 그러네? 이건 엄청난 물건이라고!”

“미친놈아! 그걸 증명한다고 네 팔을 결딴낸 거야?!”

“그렇지.”

동료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유용해도 이렇게 비싸면은 쓸모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에라 쓸모없는 놈아.”

그렇게 오늘도 호노리우스의 연구실은 평화로웠다.

******

한편, 게르마니아를 떠난 이도 있는 반면에 게르마니아를 찾아온 이도 있었다.

“듣던 것과는 다른데.”

“아이구···. 게르마니아는 처음이신 모양입니다.”

“뭐···. 알렉산드리아를 벗어난 적도 없었거든요.”

“알렉산드리아···. 먼 곳에서 오셨구먼요.”

“음···. 원래 여기 사람들은 말이 많은 편인가요?”

“그런 편이죠. 뭐.”

히파티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 밖으로 바라봤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그리피넨시스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신기한 곳이네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말이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사기꾼이거나 장사꾼이던데···.”

아그리피넨시스의 시내에 도착한 히파티아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아그리피넨시스는 알렉산드리아보다는 작았지만, 사람은 더 많았고 거리에는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어디론 가로 몰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히파티아는 호기심을 가지며 지나가던 시민에게 물었다.

“이봐요.”

“예? 저 부르신 겁니까?”

“네,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네! 뭐든지 물어만 보세요!”

남자는 히파티아의 미소에 무장해제당했다.

“별다른 건 아니고···. 저 아이들 말이에요. 전부 떼로 몰려가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아, 다들 교회로 공부하러 가는 겁니다.”

“공부를? 교회로요?”

“예, 전하께서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하셨지요.”

“그래요? 대단하신 분이네요.”

히파티아가 마리우스를 칭찬하자 신이 난 남자는 물어보지 않은 것도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리우스 전하께서 게르마니아에 오신 뒤로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저도 몇 년 전에는 집에서 놀기만 했는데, 마리우스 전하와 황제 폐하께서 제게 새 일자리를 주셨죠!”

“아, 그렇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게르마니아를 거들떠 보지도 않던 상인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왔다니까요?”

“아, 예···.”

히파티아는 눈을 떨면서 대화를 끝내고 싶어 했다.

쓸모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지친 그녀는 그의 말을 끊고서 인사를 했다.

“대답 감사해요. 저는 이만···.”

“자, 잠깐만요···!”

히파티아는 도망치듯이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쉴 틈 없이 강철을 뽑아내는 거대한 대장간과 해맑은 얼굴로 교회로 향하는 아이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시장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이민족들을 보고는 이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리우스···. 마리우스라···. 신기하네.”

******

마리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수 있는 볼로냐에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볼로냐와 플로렌스 사이에 나 있는 기나긴 산길을 지나가면 로마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진격 정지 명령이 있기도 했고, 올리브리우스가 했던 말도 있었기에 마리우스는 일단 기다리기로 판단했다.

“각하, 황제 폐하께서 라벤나로 출발하셨답니다.”

“그래? 별일이네, 평생 게르마니아에 붙어계실 줄 알았는데 말이지.”

“또 뭔가 사고를 친 게 아닐는지 두렵군요.”

“어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마리우스는 투덜거리는 브레누스에 한소리 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거나,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에 호로... 아니, 호노리우스가 사고를 쳤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적당히 나이를 먹고 조금 얌전해지기는 했지만, 종종 마리우스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 여전했다.

“가령, 전하의 따님과 사고를 쳤다거나···?”

“게지카,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브레누스의 질문에 마리우스는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셋 중에서 하나만 살아남는 거지.”

“예? 셋이요?”

“나, 장인어른, 황제 폐하.”

마리우스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조금 전에 그가 했던 말은 전부 없애버리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우스가 실제로 일을 벌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올리브리우스로부터 새로운 소식은 없었나?”

“언제까지 돈을 주겠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온 게 없습니다. 남쪽의 방역에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쯧쯧···. 하필이면 이럴 때 전염병이 돌아서리···. 우리 군에서는 환자가 나오지는 않았겠지?”

“예, 각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군영 내의 쥐를 잡고 손 씻기를 생활화하는 데다가 물도 잘 끓여서 마시고 있습니다.”

“훌륭하군. 마스크도 준비됐겠지?”

“각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만들어보긴 했는데···. 천이 모자라서 많이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인데.”

데키무스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3만 장 정도···.”

“으음···.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아직 병이 돌고 있는 게 아니니, 분발하게나.”

“예, 각하.”

뜬금없이 이탈리아 남부에 전염병이 돈다는 소식에 마리우스는 화들짝 놀라고는 부랴부랴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마리우스가 이렇게 놀란 이유는 게르마니아의 대추장 마리우스가 아닌 아직 대한민국의 말년병장 나상훈이었던 시절.

그의 수많은 휴가를 살해했던 모 질병에 대한 악몽 때문이었다.

“내 귀중한 휴가를 또 날릴 수야 없지.”

“휴가를 날리시다니요?”

“별거 아니야. 말 나온 김에 물어보는 건데, 병사들 휴가는 어떻게 되고 있나?”

“예?”

“휴가는 잘 보내고 있냐 이 말이야.”

“아···.”

데키무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휴가에 관한 것은 그가 관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나?”

“그것이 아니고···.”

“모를 수도 있지. 자네와 일한 게 몇 년인데 그런 거로 신경 쓰겠나? 지금부터라도 잘 조사해보게나.”

“알겠습니다.”

“전하! 전하!”

“음?”

데키무스와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기다리던 손님과 불청객이 동시에 찾아왔다.

******

“짜증 나.”

“아가씨, 진정하시고 화 푸세요.”

“가족이라고 하나 있는 게···. 날 이렇게 곤란하게 해?”

“주인님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신 거겠죠.”

“생각? 그냥 시간을 벌겠다고 날 던진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지.”

올리브리우스의 여동생 아니시아 프로바는 물건처럼 팔려나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같이 따라온 유모에게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유모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졸지에 정든 로마를 떠난 그녀의 기분을 쉽게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얼굴도 모르는 늙은이의 비위나 맞추면서 살아가겠지?”

“늙은이요? 아가씨도 참···. 마리우스 님은 아직 서른도 안 됐다고 하던데요.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생겼다고도 하구요.”

“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

“진짜 있네.”

“예?”

“아, 아니에요오···.”

마리우스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바에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하게 대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예? 아···. 네! 마차만 타고 와서 편하기만 한걸요!”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햇볕이 따가우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앗···. 네···.”

다소곳한 그녀의 모습에 유모가 큰 충격을 받으면서 쓰러졌으나, 프로바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마리우스가 매우 놀라며 프로바에게 물었다.

“일행이 쓰러졌는데···.”

“괜찮아요, 유모는 원래 지병이 있어서 자주 그러거든요.”

“저런···. 의원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럼 저야 고맙죠···.”

프로바는 헤실헤실 웃으며 마리우스를 뒤에 바짝 붙은 채로 볼로냐에 있는 마리우스의 임시거처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에게 거처를 안내해준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군영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프로바는 마리우스를 잡아 세웠다.

“볼로냐는 처음인데···. 구경을 해보고 싶어요.”

“그러시군요.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다들 바쁘신 것 같은데···.”

그녀는 마리우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마리우스를 돌아보는 것은 잊지 않았고 말이다.

그 모습에 마리우스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뭐지···?’

마리우스는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여자를 떼어놓고, 올리브 리우스가 보내준 금화를 세보면서 즐겁게 지내려고 했던 참이었다.

“하하하···. 저도 일이 있어서 말이죠···.”

“그래요? 총독의 일이 뭔지 궁금한데, 저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조금 전에는 볼로냐를 구경하고 싶으시다고···.”

“생각해보니까, 볼로냐에는 몇 번이나 와본 기억이 있어요.”

“그러시군요···.”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에 눈짓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데키무스는 마차 가득히 쌓여있는 금화들과 금괴를 비롯한 각종 보석에 눈이 팔렸었다.

병사들 또한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반짝이는 금화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쯧···.”

“빨리 가요.”

마리우스는 프로바를 내려다봤다.

붉은빛이 감도는 흑발에 본인 주장이 확고해 보이는 두 눈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이 뱀처럼 움직이면서 어느샌가 마리우스를 끌고 갔다.

“역시 전하야.”

“여자들한테는 영 힘을 못 쓰시는구나.”

“자네 여동생 앞에서는 산이라도 뽑아 던지시지 않을까 싶은데.”

“뭐?! 내 여동생이 어디가 어때서!”

“솔직히 말하자면···. 파라몬드가 곰이랑 결혼하는 줄 알았어.”

“곰이라니! 그렇게 귀엽게 생긴 곰 봤어?!”

“새끼 곰은 귀엽긴 하···. 악!”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투덕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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