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세 송이 - 1
지난 전투에서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가우덴티우스의 건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다행히도 내부장기가 못 쓸 정도로 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기를 살짝 스치면서 내부 출혈 때문에 골골거리고 있었다.
군의관들이 출혈을 잡기는 했지만, 그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으으···. 으으으···.”
“가우덴티우스 경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솔직히 깨어나실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가우덴티우스에 쓸 약품을 아끼지 말게, 필요한 비용은 내가 전부 처리할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물끄러미 가우덴티우스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고통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한숨을 내쉰 마리우스는 등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쯧쯧···. 미련한 사람 같으니···. 자식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모해서야 쓰겠나···.”
기다리고 있던 데키무스가 물었다.
“이제 돌아가시겠습니까?”
“집무실로?”
“예.”
잠깐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전우들을 만나고 가야겠지.”
“그럼 부상자들의 병동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래, 안내하게.”
******
“이봐 지토.”
“또 뭔데 마커스? 이제는 쉬는 시간도 안 주네.”
“지난번에 군대에 말뚝 박는다는 거 있잖아.”
“그게 왜.”
“네가 나중에 장군이 되면은···. 옆에서 돌봐줘야 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 해서 말이야.”
마커스의 말에 지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커스, 너라면 환영하지.”
“하하하···. 그 말 진심이지?”
“그럼.”
병동의 환자들이 신나게 웃고 떠들던 중에 문득 마커스가 이런 농담을 했다.
“이봐 지토.”
“왜 마커스?”
“전하께서도 너만 한 나이에 공을 세워서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잖아.”
“그래서?”
“너도 못 할 게 뭐야? 너도 충분히 잘난 놈이잖아.”
“마커스,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냐!”
마커스는 잔뜩 흥분한 채로 주절거렸고, 이를 웃으면서 듣던 지토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안색이 굳었다.
“그러니까 전하나 너나···.”
“마커스, 제발 좀 닥쳐.”
“왜?”
“뒤를 봐 멍청아!”
“뒤에 뭐가···. 허어어억···!”
“다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
마리우스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창백해진 마커스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저, 전하를 뵙···.”
“괜찮아, 편히 쉬게나.”
잔뜩 놀란 마커스를 뒤로하고, 마리우스는 말없이 병동 안을 돌아봤다.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들의 없어진 팔다리를 바라보며 슬픈 마음이 들었다.
병사들의 팔다리를 앗아간 것은 적이지만, 이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은 것은 마리우스였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고생들 했구나.”
“아닙니다!”
“아니긴···. 나 같은 놈을 지켜준다고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다. 너희들의 헌신에 보답할 게 마땅치 않군.”
“그···. 전하.”
“뭔가?”
“그럼 저희는 이제 전역하는 겁니까?”
“그렇겠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모아둔 돈도 없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습니다. 이대로 전역했다가는···.”
병사는 우물쭈물하며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마리우스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들 모두에게 먹고살 방법을 마련해줄 테니까 말이야···. 아, 겸사겸사 훈장도 챙겨주지.”
“정말입니까?”
“그래, 자네들은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로마를 위해서 성실히 복무했어.”
“오···.”
보상이라는 말에 다들 귀를 쫑긋 세웠고 눈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병사 중에서 지토를 찾은 마리우스는 지토에 웃으며 말했다.
“지토, 살아있었군.”
“예,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뒤만 졸졸 쫓아다녔더니 멀쩡했습니다!”
“어쩐지 뒤가 든든하다 싶더라니, 자네였군.”
“저만이 아니라 동료들도 함께였습니다.”
“그래, 다들 고생이 많았어···. 정말이지···. 고생이 참 많았어.”
마리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떨어져 나간 팔다리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보상을 약속하지.”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모습에 살짝 열 받은 마리우스는 마커스를 가르치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마커스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자네는 가족이 몇인가?”
“어···. 저는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삼촌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래? 자네 삼촌은 뭘 하시나.”
“게르마니아에 조그마한 양목장을 하십니다.”
“몇 마리나 기르지?”
“마흔 마리쯤···. 될 겁니다.”
“자네의 눈 한쪽과 귀 한 쪽값으로 양 백 마리에 금화 30닢을 지급하겠네.”
“배, 배에에엑···.”
마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마리우스의 말에 다른 병사들 또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마커스와 마리우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의 몸값을 매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네들의 희생에 대한 값을 치러야겠지···. 팔 한 개와 다리 한 짝에 게르마니아산 금으로 만든 번쩍이는 금화를 200닢 주겠다.
거기에 게르마니아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교육도 해주고, 이는 너희의 가족들에게도 적용해 주마.”
“그, 금화가···.”
“이, 이백 닢···!”
금화가 이백 닢이면 단순히 게르마니아에서 품질 좋은 밀가루로만 수백 포대를 살 수 있었고, 대도시인 아그리피넨시스의 중심가에 있는 자그마한 집을 구하고도 돈이 남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런 거액을 턱 하니 내놓는다는 말에 데키무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마리우스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각하, 게르마니아에 그럴만한 재정이···.”
“이번에 발견한 광산들이 있지 않은가? 이참에 제대로 한번 파보자고.”
“그건 국경 너머에 있는데···.”
“데키무스, 지난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나?”
“지난번이라면···.”
잠시 생각하던 데키무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 제대로···?”
“그래, 사람과 돈을 풀어라. 데키무스.”
******
베로나 평원에서의 전투결과가 게르마니아에 전해지자 전쟁터로 자식을 보낸 뒤로 밤잠을 설치던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게르마니아에는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번에 지토가 큰 공을 세웠다는데?”
“그럼 지토도 친위대에 들어가는 건가?”
“친위대? 그게 뭔데.”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자리라고 하던데, 우리 전하께서도 친위대에 들어가서 지금 위치까지 오셨다고 아들놈이 그러더라고.”
“그래? 이야···. 지토 그놈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족들 돌본다고 허리 한번 못 펴고 일하더니만···. 드디어 빛을 보는 건가?”
“역시 하느님이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거지.”
“정확히는 대리자이신 전하께서 굽어살피는 거지.”
“그런가? 하하하.”
지토의 어머니 또한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아들 소식에 기쁘면서도 자식 걱정에 잠을 설쳤다.
그런 그녀를 마커스의 삼촌이 위로해줬다.
아들이 군대에 간 사이에 맺어진 둘은 새롭게 가정을 꾸렸고, 마커스의 삼촌은 결혼을 위해 양을 스무 마리나 팔아치웠지만,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지토 녀석은 강인하니 멀쩡하게 돌아올 거요.”
“그러겠죠?”
그러나 베로나 평원에서의 승리에 모두가 환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던 호노리우스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한숨을 내쉬세요.”
“어, 어어···?!”
호노리우스는 갑작스러운 안토니나 방문에 매우 놀라며 다급히 연구자제들을 정리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제가 오면 안될 곳이라도 왔나 봐요.”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호노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마리우스가 크게 이겼다던데.”
“아버지가 직접 나서셨는데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안토니나는 오른손으로 조금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버지한테는 어떻게 말씀하실 셈이에요?”
“그, 그건···.”
“어머니들은 슬슬 눈치채신 것 같은데···. 아버지께서 손자를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기대되네요.”
“어, 음···.”
호노리우스는 안토니나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몰라고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리우스가 알면···.”
“글쎄요. 폐하께서는 게르마니아의 이름 모를 야산에 파묻히지 않을까 싶네요.”
“으음···. 큰일이네.”
“마리아인가 하시는 분은 어떻게 하실건데요.”
“아···.”
호노리우스의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딱 하룻밤이었다.
그 하룻밤의 불장난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돌아올 줄을 알지 못했다.
안토니나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호노리우스는 그날 이후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크게 기뻤지만, 마리우스와 스틸리코에 동시에 엿을 먹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그를 옥죄어 왔다.
‘어쩌지···. 어쩌지···.’
그동안 매사에 자신감에 차 있던 황제였지만, 이 사실을 마리우스가 안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들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호노리우스는 마리우스를 만나기 이전처럼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더더욱 방구석에 틀어박혔고, 말이다.
그렇지만 호노리우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방구석에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호노리우스는 한가지 결심을 하고서 방구석을 뛰쳐나왔고, 오늘 안토니나와 재회한 것이었다.
“안토니나.”
“네.”
“당신을 라벤나로 데려가 줄게.”
“네···?”
갑작스러운 호노리우스의 말에 오히려 안토니나가 당황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더는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멍청히 구는 건 질렸어. 더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호노리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안토니나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이만큼은 나처럼 살게 두지 않을 거야.”
호노리우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목표를 가졌다.
처음에는 명군이라고 칭송받는 아버지의 밑에서 무언가를 배워보기도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
그리고 강압적인 숙부의 밑에서 웅크려 지내야만 했고 말이다.
스틸리코도 따지고 보면 사촌 누나의 남편일 뿐이었지만, 어느 샌가부터 숙부라고 부르고 있었고 스틸리코 또한 자연스럽게 그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리우스를 만나면서 새로운 일들에 눈을 떴다.
“처음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지.”
“그래요? 신기하네요. 저도 그랬는데···.”
“이제는 더는 기다릴 수만은 없겠지.”
호노리우스는 안토니나의 손을 꼭 붙잡았지만, 손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큰 목소리로 폴로를 불렀다.
“폴로!”
“예, 부르셨습니까.”
“슬슬 라벤나로 돌아가야겠어.”
“음···. 지금은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만···.”
폴로의 걱정에 호노리우스는 끄떡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로마의 주인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데 누가 막아서겠어, 거기다가 폴로와 친위대 병사들이 날 도와줄 텐데 말이야.”
“결심하신 모양이군요.”
“그래, 더 기다리는 건 지쳤어.”
“사고 쳐서 도망치는 거 아닙니까?”
폴로의 장난스러운 말에 호노리우스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있지···. 마리우스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도망가자고.”
“아마도 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습니다.”
“무엇을 했는지보다는 왜 했는지가 중요한 법 아니겠어?”
“다른 사람들이 폐하의 행동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시는 게 아닙니까.”
호노리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