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91/187)

검은 군단은 가장 강력하다. - 8

마리우스가 눈을 뜬 건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으으···. 머리야···.”

“아, 깨어나셨군요!”

“낯선 천장이다···.”

마리우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니, 군의관이 말렸다.

“어이쿠, 너무 급격하게 움직이시는 건 몸에 안 좋습니다.”

“으음···. 생각보다 멀쩡한데?”

“그거야 각하의 몸이 생각보다 튼튼해서 그런 거겠지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죽어서 땅에 묻혔을 겁니다.”

마리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오른손을 몇 번 쥐고 펴며 몸이 멀쩡한지 확인했다.

기이할 정도로 멀쩡하게 움직이는 몸뚱아리에 마리우스는 전율했다.

“오···. 뭐야.”

“제가 여태껏 봐온 환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튼튼한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건 왜 그런 건가?”

“아, 많이 아프십니까?”

“으음···.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야.”

“이야···. 이건 그냥 튼튼하다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군의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수술 도중에 피를 많이 흘리셔서, 수술이 끝난 뒤에는 조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까지 깨어나시질 않는다면···.”

군의관은 뒷말을 흐렸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깨어났군.”

“예, 다행이지요.”

“그동안 별일 없었나?”

“데키무스 경께서 각하께서 깨어나시면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데키무스가?”

******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쁩니다.”

“내가 죽기라도 바란 건가?”

마리우스가 농담조로 말하자 데키무스가 매우 놀라면서 소리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깜짝이야···. 좀 살살 말하게.”

“크흠···.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네, 그래서 아군의 피해 상황은 어떤가.”

“부상자 15791명 전사자 188명으로 총합 15979명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피해가 엄청나군···.”

“부상자의 대부분이 기병대와 우익을 맡고 있던 동방군단에서 주로 나왔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피해가 크군.”

“그리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각하의 휘하에 있던 중군에서 나왔습니다···.”

“알라리크의 함정에 빠졌을 때인가.”

“예, 각하의 곁을 지켰던 병사들 대부분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했습니다.”

“으음···. 내 잘못이야···. 또 애꿎은 병사들이 죽어버리고 말았어.”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지토인가 뭔가 하는 친구는 어찌 되었나.”

“예? 지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처를 입긴 했어도 멀쩡한 병사들이 둘 정도 있긴 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나머지를 말씀드리자면···.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대부분 흩어져버린 듯합니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만 수만 명에 달할 정도입니다.”

“알라리크는? 놈은 멀쩡히 도망갔나?”

“예, 듣기로는 도망치던 알라리크의 군대를 콘스탄티우스 경이 들이쳤는데, 참패했다는군요.”

마리우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렇게나 피를 흘렸는데, 정작 목표였던 알라리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마리우스의 부대는 여전히 베로나평원에서 주둔 중이었고, 로마는 구경도 못 하고 있었다.

“돌겠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탈리아 남부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전염병? 이탈리아에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데키무스는 품속에서 편지 한편과 명령장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리고···. 올리브리우스와 섭정 공께서 편지와 명령장을 보내오셨습니다.”

“도대체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마리우스는 편지와 명령서 중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보며 경악했다.

“이게 무슨···. 정말로 이걸 장인어른께서 쓰신 게 맞는 건가?”

“예,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습니다.”

“이런 제기랄.”

마리우스가 책상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이제 뒷정리만 조금 하고 로마로 진격하면 다 끝날 일인데, 여기서 가만있으라고? 장인어른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예? 여기에 있으라니요?”

마리우스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데키무스에 명령서를 건네주었고, 데키무스는 찬찬히 읽어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이제 강만 건너면 될 일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장인어른께서 이탈리아에 무슨 짓을 하신 모양인데···.”

“올리브리우스가 보낸 편지도 읽어보시지요!”

“아, 그게 있었지.”

올리브리우스가 보내온 편지를 본 마리우스는 편지 안에 적혀있는 내용을 살펴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게 무슨···.”

******

로마에 있는 올리브리우스는 여태껏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힘든 일주일을 보내고 있었다.

동맹으로서 데려온 알라리크는 마리우스에게 크게 패배해서 목숨만 건져서 돌아왔고, 나폴리와 남이탈리아 인근에서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이건 모두 악독한 스틸리코 놈이 벌인 일이 분명합니다! 그놈이 이탈리아에 전염병을 풀고, 마리우스를 보내서 우릴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이제는 놈들이 죽거나, 우리가 죽어야만 끝날 일입니다. 새로이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마리우스를 격 퇴해야 합니다!”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병의 확산을 막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도시 간의 통행을 제한하고, 추가로 의원들을 파견하여···.”

“지금 중요한 건 병이 아니라 마리우스입니다!”

“아니, 지금도 병으로 하루에 수백 명씩 죽어 나가고 있는데, 그깟 마리우스가 중요합니까?!”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부하들과 의원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브리우스가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두 가지로군.”

올리브 리우스가 오른손을 들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퍼 올리며 말했다.

“첫째로 남부에 도는 전염병.”

“둘째로는 북부에서 자리 잡은 마리우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방법은 나도 없어, 다만···. 시간을 벌 수는 있겠군.”

올리브리우스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은 남부에 의원들을 파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해서라도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

“폐하, 그랬다가는 북부에서 내려올 마리우스를 견제할 수가···.”

“마리우스는 내가 상대하지, 놈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할 거야.”

올리브리우스의 자신에 찬 모습에 의원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마리우스 놈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보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올리브리우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말이야.”

******

마리우스는 돈을 좋아했다.

로마에 떨어지고 몇 달 동안 썩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지내던 것이 큰 트라우마가 되어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오는 돈을 가로막지 않았고, 빠져나가려는 돈은 기를 쓰면서 틀어막았다.

하지만 마리우스가 아무리 돈을 좋아하더라도, 모든 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잘못 먹었다가는 탈 나기 마련이지.”

“각하, 이런 더 볼 가치도 없습니다. 올리브리우스 녀석의 제안 따위는 치워버리시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가시죠!”

“가만, 가만히 있어 봐 데키무스.”

마리우스는 올리브리우스의 제안을 곱씹었다.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2년간 이탈리아의 세금징수 권리에다가, 게르마니아의 5년 치 예산을 일시금으로 지급하겠다니···.”

“들어볼 가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거기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두 배로 지급하겠다라···.”

“놈을 믿으시는 겁니까?”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기도 하지.”

데키무스도 그 말에는 인정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러 정책으로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게르마니아에서 억지로 대군을 일으켰으니, 지금 게르마니아의 재정 상황은 사망 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품질 좋은 철광과 탄광, 대규모 사탕무 농장 덕분에 호흡기를 붙이고는 있었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마리우스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자기 여동생인 아니시아 프로바까지 볼모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자식이 아니라 고작 여동생일 뿐입니다.”

“그래도 피가 이어진 혈족을 보낸다는데, 의심을 거둘 수는 있지.”

“그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다른 생각? 그게 뭔가.”

“가령, 미인계로 각하를 꾀어내서···.”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화들짝 놀라우면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데키무스! 자네 평소에 날 그렇게 보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 같습니다만···.”

“내가 부인이 둘인 것은 전부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그러시군요.”

“허허···. 안 믿는구먼.”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어차피 장인어른의 명령도 있으니까 당분간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네.”

“언제까지 말입니까?”

데키무스의 질문에 마리우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게르마니아로 돌아갈 때까지.”

******

한편, 마지막까지 마리우스의 곁을 지켰던 병사들은 한 병동에 머물고 있었다.

대부분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고작 다섯 명뿐이었지만, 이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마리우스와 함께 싸웠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놈이 전하의 머리에 방패를 후려치려고 했을 때, 내가 놈의 머리를 깨버렸다···. 이 말이야!”

“야 인마, 여기에 그런 사람이 몇 명인데 그런 거로 자랑질이야.”

“하하하하···. 그 말이 맞긴 하지.”

지토와 마커스를 제외한 병사들은 전부 팔다리 중에 하나가 없는 상태였다.

심각한 경우에는 두 다리를 잃고, 눈도 한쪽을 잃은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반면에 마리우스의 뒤에 바짝 붙어있던 지토는 가슴에 화살을 세 대나 맞고 허벅지에 창도 찔렸지만, 다행히도 사지는 멀쩡했고, 그보다 조금 뒤에 서 있던 마커스는 눈 한쪽과 한쪽 귀를 잃었다.

“뭘 그렇게 고민 중이야 마커스.”

“으음···.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겠지?”

“쟤네들은 그렇겠지, 너도 조금 애매하겠다.”

“후 우우···. 하나뿐인 아들이 애꾸눈이 돼서 돌아온걸 보면 우리 엄마가 쓰러질 텐데···.”

마커스의 걱정에 지토가 그의 등을 힘껏 두들겨 치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네 상처가 보통 상처냐? 무려 마리우스 전하를 지켜드리다가 생긴 영광의 상처라고 인마!”

“그건 그렇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왼쪽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걱정하지마, 전하께서 그동안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먹고살 걱정은 덜었잖아.”

“이대로 전역하면, 뭐 할지가 걱정이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정 힘들면, 내 여동생이라도 소개해줄까?”

“야! 네 동생은 이제 열 살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

“에라이.”

동기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지만, 지토와 마커서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지만, 마커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면서 침묵이 깨졌다.

“이봐 지토.”

“왜 마커스.”

“넌 계속 군에 남아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요새는 군대에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장기로 전환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공을 세웠잖아. 잘하면 군단기 수에서 부백인장까지는 올라가지 않을까.”

“그렇겠지···.”

마커서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지토, 지난번에 우리 삼촌 이야기 있잖아···.”

“너희 삼촌이 우리 어머니 좋아한다고 했던 거?”

“그래, 그거.”

“그게 왜.”

“지난번에 삼촌한테서 편지가 왔었는데···.”

마커서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주섬주섬 편지를 꺼내더니, 지토에 건네며 말했다.

“어, 음···. 너희 어머니께서 너한테 보내는 편지도 나한테 붙이셨더라.”

“응? 그걸 왜 너한테···.”

“읽어보면 알 거야. 원래는 전투 전에 건네주려고 했는데, 네 마음이 심란할까 봐 지금 준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

편지를 받아든 지토는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내려가더니, 이내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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