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군단은 가장 강력하다. - 5
플로렌스에서 알라리크가 물러나고, 초토화된 플로렌스에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콘스탄티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플로렌스를 떠나려고 했다.
아연하게도 그의 부관이 그를 뜯어말렸다.
“장군,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고작 천명으로 무엇을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폰티우스, 우리는 군인이야.”
“가면 개죽음이란 말입니다!”
“군인은 원래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법이지.”
그의 부관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플로렌스를 지킨 것만으로 공은 충분합니다. 그냥 여기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일입니다!”
“이봐 폰티우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하는 건가? 스틸리코 장군께서 우리한테 뭐라고 했나.”
“그거야···. 알라리크를 막으라고 하지 않으셨···.”
“그래,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알라리크를 막으라고 했어, 나는 그걸 행할 뿐이야.”
“아니, 그게 무슨···.”
“자네 말대로 플로렌스에 처박혀있으면, 목숨도 건지고 그럭저럭 괜찮은 공을 세우겠지. 그런데 지금 베로나로 가면?”
“가면, 뭐가 달라집니까?”
콘스탄티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너는 마리우스가 질 거로 생각하나?”
“그건 무슨···.”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나는 마리우스가 이긴다는 것에 모든 걸 걸었다.”
그렇게 콘스탄티우스는 이른 아침에 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플로렌스를 떠났다.
******
“하아···. 이걸 어쩐다.”
“저, 전하···. 이, 이제 어떻게 하면···?”
마커스가 오들오들 떨면서 마리우스에게 물었지만, 아무리 마리우스라고는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전방에서 함성이 들려오더니, 숨어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마리우스를 잡아라!”
“저놈만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저놈의 목만 가져가면 돼!!”
마리우스는 병사들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쳤다.
“너희들이 내 목을 가져간다고.?”
마리우스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적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러자 오히려 적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 버렸다.
“너희들은 내 목이 필요하다면서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나, 시간 없으니 빨리 덤벼!”
“이, 히야아아앗!”
한 병사가 용기를 쥐어짜 내면서 마리우스에게 덤벼들었지만, 눈 깜빡할 순간에 오른손과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에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감히 마리우스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저, 전하를 지켜라!”
지토가 용기를 내어 소리치니 병사들이 마리우스를 중심으로 한데 뭉쳤고, 알라리크의 병사들이 그 주변을 겹겹이 에워쌌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게지카는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빨리 불을 끄고 진입로를 만들어라!”
“예, 장군!”
병사들은 다급하게 장애물들은 부수면서 주변에 있는 흙을 퍼내서 불을 끄려 했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전투 중에 마땅한 소화 장비도 없었으니, 마음이 앞선 몇몇 병사들은 장애물에 몸을 부딪히면서 길을 열려고 했다.
“저, 저런···. 그만둬! 그만두라고 이놈들아!”
“전하를 구해야 한다. 모두 불을 꺼라!”
그 모습에 마리우스가 놀라면서 그들을 제지했지만, 오히려 병사들은 더욱더 거리낌 없이 불길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도저히 불이 꺼지질 않습니다!”
“젠장···! 다른 곳에 진입로가 있을 것이다! 모두 길을 찾아라!”
“길을 찾아라! 모두 흩어져서 진입로를 찾아라!”
게지카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을 무렵, 돌연 알라리크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리우스! 더는 네놈이 빠져나갈 곳은 없다!”
“알라리크?”
병사들의 뒤로 알라리크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타고 걸어 나왔다.
그러자 마리우스에게 겁을 집어먹고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은 알라리크의 등장에 환호했다.
“네 이놈 마리우스! 꼴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굳이 힘들여서 찾을 수고를 덜었군.”
“네놈은 항복해도 목을 베고,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들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줄 것이다!”
“음···. 난 그냥 목만 베려고 했는데.”
“그리고 게르마니아로 쳐들어가서 네놈의 부인들을 병사들에게 돌려주고, 자식들 또한 산채로···.”
알라리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무언가 날아오는 걸 보고서는 황급히 피하느라 말에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알라리크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곁에 있던 부하가 칼이 꽂혀 죽어있었다.
“빗나갔군.”
“네, 네 이놈!”
“나를 욕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족들을 욕하는 건 못 참지. 네놈은 꼭 사로잡아서 네 입에서 죽여달라는 말이 나오게 해주마.”
“끄으응···. 이런 상황에서도 입만 살았구나, 네가 아무리 용맹하다고는 해도 이 많은 병사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마리우스는 알라리크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사자는 양 떼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지.”
“쳐라! 마리우스의 시체 조각이라도 가져오는 자에게는 내가 아끼는 보물들을 나눠주겠다!”
“와아아아!”
적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하자 마리우스의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빈손이 된 마리우스는 지토에 다가가 군단기를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 빌리지.”
“예? 이, 이건 누구에게도 주면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말게나, 내 군대 첫 보직이 기수였어.”
마리우스는 자신의 키보다 조금 큰 군단기를 몇 번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걸로 첫 번째 공을 세웠지.”
그러자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리우스에게 덤벼들었다.
“마리우스를 잡아라!”
“우리도 신세 한번 펴보자!”
단번에 수십 명이 달려들었으나, 마리우스는 깃대를 한번 크게 휘둘러 수십 명의 병사는 단숨에 때려눕히고는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병사들은 어린 시절 할머니나 부모님에게 들었던 전설이나 신화 속의 영웅처럼 보였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잡겠다는 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망이군. 알라리크.”
“허허···. 아니,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주군, 로마군이 군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더 투입하셔서 속히 마리우스를 잡아야 합니다.”
부하의 말에 알라리크가 검을 뽑아 들면서 소리쳤다.
“고작 몇 명을 쓰러트린 거로 으스대는 꼴을 더는 못 봐주겠구나! 모두 한꺼번에 덮쳐라!”
“그렇게 나오시겠다?”
마리우스는 깃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덤벼라! 먼저 오는 새끼부터 개박살을 내주마.”
******
적의 우익을 돌파한 가우덴티우스는 적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우익의 동방군단을 구원했다.
덤벼드는 기병대를 박살 내고 세르비우스에 합류하며 말했다.
“제가 좀 늦었지요?”
“하하하···. 아뇨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하마터면 대열이 무너지면서 전부 몰살당할 뻔했습니다···.”
전장을 가로지르면서 두 번이나 전투를 치른 가우덴티우스의 기병대는 완전히 탈진해버렸지만, 그대로 명령을 모두 이행했다.
적의 우익을 돌파하여 박살 내고, 아군의 좌익까지 구원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후방에서 편히 쉬시지요. 지금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쉬겠습···.”
“장군! 장군!!”
그때 게지카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이 전해준 충격적인 말에 가우덴티우스는 다시금 말 위에 올랐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마리우스를 구해야지요.”
“장군이나 휘하의 병사들은 잔뜩 지치지 않았습니까,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일단은 쉬시지요.”
데키무스의 말에 가우덴티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장군이나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 상태로 각하를 도우러 간다고 해도, 짐만 될 뿐입니다.”
“짐이라···.”
가우덴티우스는 뒤에 늘어선 병사들을 돌아봤다.
축 늘어진 것이 많이 지친 듯 보였으나, 안면 보호구로 가린 얼굴 너머의 눈동자는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마리우스 각하를 구하러 갈 생각이다. 두렵거나 지친 녀석은 빠져도 좋다.”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팔팔합니다!”
“이렇게 힘이 넘쳐나는 건, 신혼 첫날 밤을 제외하고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말에 가우덴티우스가 데키무스를 돌아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세르비우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금방 뒤따라가지.”
“아마 도착하실 때쯤이면, 전부 끝나있을 겁니다.”
“우리 몫도 남겨주게나.”
“가자!”
가우덴티우스와 그 병사들은 지친 말을 바꿔 타고서는 다시금 전장을 가로질러 마리우스에게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키무스가 세르비우스에 물었다.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말릴 수가 없었네, 아니 굳이 말릴 필요가 없었다는 게 더 맞겠군.”
“말릴 필요가 없었다니요? 각하께서 힘들여 키우신 기병대를 전부 날려버릴 셈입니까?!”
“이보게 데키무스, 저들이라고 위험을 모르겠나? 저들은 군인으로서 판단하고 선택을 내렸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들을 도우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세르비우스는 진형이 반쯤 무너진 적군을 갈아버리고 있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자네는 가서 막시무스 장군에게 예비대를 받아오게나, 적이 무너지면 곧바로 중군과 합류해야 하네.”
******
알라리크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다고 한들, 역사의 흐름이나 정해진 숙명으로부터 이겨낼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지난 테살로니키에서의 패배 이후에 수많은 그리스의 비극과 철학들에서 배운 하나의 신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신념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으아악!”
“비, 비켜!”
“아악-!”
마리우스의 손에 들린 깃대의 머리 부분에 꽂힌 황금독수리는 두 날개가 꺾여버렸지만, 마리우스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알라리크의 병사들을 날려버릴 때마다 요란한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은 두렵기까지 했다.
“후우···. 후우···. 이제 딱 열 걸음이다. 기다려라.”
“마, 막아라! 놈을 막아!”
마리우스를 함정에 밀어 넣었다고 안심하던 알라리크였지만, 그가 인간이라고 정해놓은 규격을 넘어서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었다.
사방에 불을 질러서 마리우스가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자신까지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공포감은 더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지휘관이 이럴진대, 가까이에서 상대하는 병사들은 어떻겠는가?
알라리크를 따라 수많은 전쟁터를 거쳐온 베테랑들이었지만, 불길을 뚫고서 동료들을 때려눕히는 마리우스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오죽했으면 그 자리에서 지려버리는 병사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리우스를 잡아라···. 놈만 잡으면 된다!”
“으아아아···.”
“알라리크! 너도 비디메르의 곁으로 보내주마!”
마리우스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지만,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마리우스는 알라리크의 병사들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주, 주군을 지켜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고작 한 놈한테 수천 명이 겁을 집어먹었다고···?”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아리우스가 알라리크에게 거의 근접했을 무렵, 불타오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하던 전장에 요란한 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하! 남쪽에 적이···!”
“뭐?!”
마리우스가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병사와 알라리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