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47/187)

검은 군단은 가장 강력하다. - 3

올리브리우스의 즉위 소식이 주변으로 퍼져나가자마자 로마가 뒤집혔다.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갈리아와 마리우스를 지지하던 게르마니아는 당연하게도 올리브리우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브리타니아 또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픽트족 관련 문제들과 아직 살아남아 있는 아칸의 잔당들 때문에 그쪽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속주는 올리브리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대부분의 총독은 베로나 평원에서 벌어질 전투결과에 따라서 언제든지 편을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방의 에우트로피우스는 올리브리우스의 즉위 소식을 듣고서는 코웃음을 치면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마리우스를 적대하려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뿐이었다.

지금 그의 고민거리는 그런 쓸모도 없는 이야기보다는 오늘내일하고 있는 황제의 상태와 연신 국경을 위협하는 훈족의 대규모 침공이었다.

“원정군까지 대패했다고···?”

“적의 유인 전술에 걸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트리비길드의 미숙함이 일을 그르친 것이겠지요.”

“티마시우스의 저주로군.”

에우트로피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비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에우트로피우스에 말했다.

“지금이라도 사투르니누스를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티마시우스와 가까운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그놈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이야.”

“합하, 지금은 시시각각 훈족 놈들이 국경을 초토화하는 지금 사람을 가려서 쓸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파비우스의 절박한 말에도 에우트로피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을 가려서 써야 하는 것일세, 당장 일이 급하다고 아무 놈이나 써버렸다가는 그놈이 언제 내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알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놈을 보내느니, 차라리 훈족들과 협상을···. 잠깐, 협상···. 그래! 협상을 하면 될 일이군!”

“예? 아니, 그런 흉악한 녀석들과 어떻게 협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보게 파비우스, 우리는 이제야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화해놨어. 그런데 두 번째 티마시우스가 될법한 녀석을 다시 키워주자는 건가?”

“그렇다고 야만인들과 협상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고 우리 국경을 두들길 게 분명합니다!”

파비우스는 훈족과의 협상 건으로 에우트로피우스와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하급자인 파비우스가 조용히 넘어가고는 했다.

하지만, 파비우스는 훈족과의 협상 건에 대해서는 에우트로피우스와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쉽게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저는 정치 같은 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저 녀석들과 협상했다가는 나중에 더 큰 피를 흘리게 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네는 어째서 시대의 큰 그림을 읽지 못하는가! 지금은 저들을 돌려보내는 게 중요해! 나중의 일은 대비하면 될 일이야!”

“지금 국경을 짓밟는 녀석들을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다음에는 얼마나 불어나서 돌아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파비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에우트로피우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나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나는 이미 결정을 끝냈으니, 자네는 따라오기나 하게.”

“합하! 저들은 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어째서 그걸 모르십니까!”

“어허, 그만하라고 했네!”

“합하!”

에우트로피우스는 더는 듣기 싫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파비우스는 다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잰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 올리브리우스의 즉위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는 그를 비웃었다.

“어차피 오래가지도 못할 텐데,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스틸리코는 조금 전에 들어온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노동자들의 숙소부터 지으라고 전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굼벵이처럼 느린 것인가.”

“그, 그것이···. 사람은 많지만 마땅한 자재가 없습니다···.”

“자재라···. 우선은 쓸모없는 배를 해체해서 자재를 마련해봐.”

“그, 그렇게 되면 돌아갈 배가···.”

“어차피 당분간은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다. 마요리아누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자리를 지켜야만 해.”

스틸리코는 무심하게 서류를 처리하며 말했다.

“노동자들을 너무 혹사하지 않게 잘 배려하도록. 그동안 혹사당해서 쓰러진 이들도 잘 치료해주고 말이야.”

“예, 합하.”

보고하러 온 장교가 떠나려고 하자, 스틸리코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잠깐, 지난번에 그거···. 그거는 어떻게 됐나?”

“그거라니···. 아,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그 건은 마요리아누스님 편으로 잘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스틸리코는 이제 되었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집무실에서 다시 혼자가 된 스틸리코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남자로 태어나서 황제 자리가 탐이 났겠지···. 그 끝이 이카로스가 될지, 아니면 다이달로스가 될지는 뭐···. 잘 모르겠군.”

스틸리코는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놓으면서 두 다리를 쭉 펴서 책상 위에 올려놨다.

******

더위가 한풀 꺾인 베로나 평원에서 알라리크와 마리우스의 부대가 다시금 마주했다.

모두 잔뜩 긴장한 채로 죽을 것만 같은 침묵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지토와 마커스도 있었다.

“지, 지토 이제 싸, 싸울 건가 본데···?”

“그렇겠지.”

“이, 인마···. 진짜로 싸운다고.! 씨발 훈련받던 거랑은 다르다고!”

“너 때문에 나까지 긴장된다 인마. 그동안 훈련받아온 것만 기억해.”

“아이씨···. 그게 말이 쉽지···.”

대열의 최선두에 선 마커스와 지토.

지토는 마리우스를 상징하는 검은 소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서 있었고, 마커스는 그런 지토의 곁에 서 있었다.

깃발을 든 지토는 망설임 없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마커스는 씨발씨발 거리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씨발, 하, 하늘에 계신 아버지···.”

“기도하나?”

“저, 전하! 아니, 각···.”

“그냥 편한 대로 불러.”

근처를 지나던 마리우스는 크게 들려오는 험한 소리가 섞인 기도문을 듣고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지토는 먼발치에서나 보던 마리우스를 가까이서 봤다는 사실에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마커스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자네들 이름은 뭔가.”

“저, 저는 카, 카토 백인대의 군단기수 지토이고, 이 친구는 마커스라고 합니다!”

“지토···. 지토라···. 그리운 이름이군.”

마리우스는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초록 피부의 외계인을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외국어를 참 잘하는 친구였는데 말이야···.”

“예?”

“아무것도 아닐세.”

마리우스는 잔뜩 긴장한 지토와 마커스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첫 전투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입대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

“이, 이제 이, 이이···. 이년···.”

“삼 년이야 멍청아!”

“아! 삼 년···.”

그 모습에 마리우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삼 년이라···. 그동안 실전은 처음이란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좋을 때야. 내가 한창 신병일 때는 자대배치 받고 이틀 만에 고트족 새끼들이랑 싸웠는데 말이지···.”

마리우스는 잠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이 즐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들도 공을 세운다면, 나나 폴로처럼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네.”

“전하···!”

“그럼 우선은 오늘 전투에서 살아남아야겠지.”

마리우스의 말에 지토와 마커스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전하, 전투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슬슬 시작해야겠군.”

“원래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흐음···.”

마리우스는 지토와 마커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왠지 이곳이 마음에 드는군.”

“예?”

“브레누스와 사루스에게 우군을 맡기고, 기병대는 가우덴티우스에 맡긴다. 적의 기병대를 박살 내고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치라고 해.

그리고 세르비우스와 데키무스는 좌군을 이끌고 적의 우익을 박살 내라고 하고, 후방에 막시무스가 남아서 예비대를 지휘하다가 밀리는 쪽을 지원하라고 해.”

“예, 전하!”

“게지카, 자네는 나와 같이 중군을 맡지.”

“영광입니다. 저도 드디어 전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싸울 수 있겠군요.”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머쓱한 얼굴을 한 마리우스는 지토와 마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거기 둘은 무조건 내 뒤만 따라오도록. 그러면 내가 쓰러지기 전에는 무사할 거야.”

“예?! 예!”

“기합이 잔뜩 들어갔군.”

“병사들 긴장도 풀어줄 겸···. 병사들에게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그럴까?”

마리우스는 말머리를 돌려서 병사들을 바라봤다.

한눈에 전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병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리우스의 입이 열렸다.

“우리는 서로 생긴 것도 다르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로마인으로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였다!

모두 주위를 둘러보고 동료들의 얼굴을 봐라!

그들이야말로 너희들이 지켜야 할 이들이자, 너희들을 지켜줄 이들이다!”

이윽고 마리우스는 검을 빼 들면서 소리쳤다.

“하나 되어 싸우고, 승리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모두 죽지 마라!”

“와아아아아-!”

“마리우스 대추장 만세!”

“로마 만세!”

“ROMA INVICTA!”

병사들의 열렬한 반응이 뒤따랐다.

애초에 사기가 충만한 이들이었기에 긴장감이 사라지니, 그 자리를 전투의 열기가 대신하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검을 든 오른손을 높이 뻗었다.

그리고는 전방을 가르치며, 베로나 평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목표는 전방의 적군이다. 중군이 앞장설 것이니, 모두 나를 따르라!”

진군나팔과 온갖 고함이 들려오면서 마리우스의 병사들이 발맞춰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열 맨 앞에는 마리우스와 게지카가 있었다.

******

“지긋지긋하군.”

베로나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무렵에 마요리아누스가 이끄는 함대는 어느덧 나폴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요리아누스의 대함대를 본 나폴리의 시민들은 당황하였고, 나폴리의 시장은 인근의 병사들을 끌어모으며 올리브리우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로마에서 출병을 준비 중이던 올리브리우스는 우선 아타울프에 3만 명의 병사들을 떼주어서 북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2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나폴리에서 마요리아누스를 맞이했다.

“쏘지 마시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왔소이다!”

“평화···?”

나폴리에 나타난 마요리아누스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기력이 쇠약하니 어딘가 아파 보이는 이들뿐이었다.

처음에 항복한다는 마요리아누스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올리브리우스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참상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스틸리코는 과거의 총기를 잃고서 발악하는 한 마리의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알렉산드리아에 시민들을 불러모은다고, 인근의 피난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서 재건작업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호오···. 아칸을 잡는다고 속주들을 불태우던 솜씨가 어디 가지 않는군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올리브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요리아누스 경 같은 훌륭한 기병 지휘관이 저희와 함께하겠다니,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만···. 우선은 제 부하들을 도와주십시오. 알렉산드리아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한 탓에 힘들고 지쳤습니다.”

“그거야 물론이지요. 제가 될 수 있는 한 끝까지 그들을 도울 것입니다.”

올리브리우스는 한껏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바라보는 마요리아누스 또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에 화답했고 말이다.

그런 그들의 뒤로 수천 명의 병사가 파리한 안색으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