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46/187)

검은 군단은 가장 강력하다. - 2

호노리우스가 지난 몇 달 동안 공들여서 만든 새로운 대장간은 쉴 틈도 없이 품질 좋은 강철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열흘 만에 막대한 양의 강철이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기존의 대장간들에서 병사들이 사용할 무기와 장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자! 이번 일이 끝나면은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포상한다고 하셨으니 모두 힘들 내라고!”

“예!”

대장간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들이 힘들여서 만든 무기와 장비들은 수레에 실려서 베로나평원으로 향했다.

******

그렇게 베로나평원에 주둔 중인 마리우스의 병사들 대부분은 훈련소에서 새로이 보급받은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왔다.

특히나 게르마니아의 기병대에게 전부 마갑이 지급된 것은 눈에 띄는 성과였다.

마리우스가 몇 번이나 이들에게 마갑을 씌워주려고 했지만, 강철의 값이 비쌌고, 그걸 또 가공하는 돈이 천문학적이라 예산문제 때문에 뒤로 미뤄졌는데, 오늘에서야 이뤄진 것이었다.

“참으로 늠름합니다.”

“그럼, 여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보통 장구류는 개인이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로 부임한 이후부터는 개인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바뀌었다.

처음에 이 방식대로 바꾸려 했을 때, 수많은 반대가 뒤따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데키무스조차도 마리우스를 뜯어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의사를 관철했고, 그 결과가 오늘에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도 별 움직임이 없나?”

“예, 군영에서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있습니다.”

“말로는 단숨에 우리를 짓눌러 버릴 듯이 말하더니,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질 않는군.”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쪽의 준비도 끝난 지 오래고, 병사들의 사기도 충만합니다.”

브레누스는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브레누스, 자네의 용맹은 인정하네만 이 세상에는 의지와 정신력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전하와 제가 말머리를 함께하고 적진에 들이박으면 어떤 적이라도 놀라서 도망갈 게 분명합니다!”

“브레누스, 용기와 만용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해.”

마리우스도 지금 상황이 굉장히 답답했지만, 그에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놈의 더위는 도무지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아군이나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힘들게 했다.

야간전을 펼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야간에는 가뜩이나 시꺼먼 장비로 무장한 게르마니아 병사 간에 피아식별이 힘들었다.

현대라면 조명탄을 터뜨리고 온갖 후레쉬를 비쳤겠지만, 지금 시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한 치 앞이나 겨우 보일까 말까 한 횃불들로 대신해야 했으니, 야간에 전투를 벌인다는 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쯧···. 비전투 사상자는 얼마나 나왔나.”

“더위로 탈진한 병사가 다섯쯤 됩니다.”

“적은 더 심각하겠지.”

“그럴 것입니다. 아군이 호수주위를 순찰하는 탓에 적은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지 않습니까? 분명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그러겠지···.”

이대로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적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내면에 있는 묘한 감각이 경고의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자신을 도왔던 감각이었기에 쉽게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왜 적은 가만히 있는 거지···?”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적이 뭘 할 수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움직임이 없어.”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의 부채질을 받으며 알라리크의 진형을 노려봤다.

******

“주군, 이제는 한계입니다.”

“더위에 쓰러진 병사만 해도 이미 수천 명이나 됩니다. 이대로 물러나던가, 싸워야 합니다.”

알라리크는 묵묵히 찬물을 들이켰다.

그래야만 새까맣게 태워버릴 듯이 불타오르고 있는 속을 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알라리크는 기지에 틀어박혀서 동생인 아타울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리브리우스의 장담대로라면, 로마에 입성한 올리브리우스와 아타울프가 곧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서 베로나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도 아타울프가 끌고 간 정예병력 1만이 본대와 협력하여 마리우스의 부대를 양쪽에서 협공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다만, 그 합류 타이밍이 언제인지를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타울프에서 오던 전령은 끊긴 지 오래였고, 이곳에서 로마까지 거리가 먼 탓에 아타울프와의 긴밀한 연락이 불가능했다.

그저 동생을 믿으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주군!”

“시끄럽다. 이번 싸움은 시간과 싸움이야! 아타울프가 먼저 오던지, 아니면 우리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던지 둘 중 하나란 말이다!”

“주군, 아군의 식량 사정도 고려해주셔야 합니다. 당장 보존식을 제외한 모든 식량이 상한지 오래입니다.”

“뭐?! 추가적인 보급은!”

“그런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곳은 우리의 세력권과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으음···. 그래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나.”

“일주일 정도···. 아껴먹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병사들이 더위에 지쳐 쓰러질 겁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

알라리크는 눈을 감은 채로 계산에 들어갔다.

더위에 대한 대비도 없이 내던져진 상태에서 식량까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일주일.

그게 알라리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의 기회였다.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지원을 해줄 수가 없다니!”

“이곳의 상황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네.”

“그건 모르겠고, 빨리 병사들을 지원해주던지 보급품을 지원해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끄응···. 이러기에 최대한 빨리 로마로 돌아오자고 한 게 아닌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원로원이 둘도 아니고 셋으로 갈라졌단 말일세!”

올리브리우스의 말대로였다.

그가 알라리크와의 협상을 위해서 자리를 비운 동안, 흥분이 가라앉은 로마 원로원은 좀 더 냉철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아, 알라리크보다 스틸리코가 먼저 돌아오면 어쩌지?”

“인제 와서 되돌아보면 스틸리코가 미숙했던 것이지, 우리에게 악의가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우선은 협상을 시도하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스틸리코와의 협상을 도모하는 온건파.

“이런 개돼지 같은 이들을 보았나!”

“협상은 무슨 놈의 협상!”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요!”

“맞습니다. 스틸리코가 그동안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이번 기회에 스틸리코와 그 가족들까지 모조리 매달아서 우리의 분노를 보여줘야 합니다!”

당장 스틸리코와 한판 붙자는 강경파.

“뭐···.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요···?”

“마지막에 남는 자가 승리자라고 하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어차피 우리와는 별 관계도 없는 일이 아닐지요.”

이도 저도 아닌 중도파가 있었다.

그들은 온건파와 강경파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몸을 사릴 뿐이었다.

이들의 대립은 점점 심해져만 갔고, 이들의 무력충돌이 벌어질락 말락 한 시점에서야 올리브리우스가 도착했던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올리브리우스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찢어지려는 원로원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어쩌겠습니까, 당장은 당신네에게 뭘 해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쓰으읍···. 그럼 우리만이라도 먼저 전선으로 떠나겠습니다. 형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혼란스러운 로마에서 당신들마저 사라진다면, 제 뒤를 받쳐줄 만한 세력이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우리는 동맹이지, 당신이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노예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타울프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보였다.

올리브리우스는 그런 아타울프를 달래가면서 로마에 붙잡아두려고 애썼다.

“이보게, 내가 그동안 자네들의 사정을 많이 봐주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내 사정도 봐주게.”

“크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형님이 위험에 빠져있단 말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내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곳 로마가 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거리를 둘러보게나.”

올리브리우스는 시내 곳곳에서 무기력하게 돌아다니는 빈민들과 삶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민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저들이 뭐로 보이나.”

“시민들이 아닙니까.”

“그래, 저들은 시민들이야. 반대로 말하자면 내 돈줄이자 무력의 근간이기도 하지.”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올리브리우스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 로마에 거주 중인 시민들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도시 외곽이나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얼마겠나?”

“그건 왜···.”

잠깐 고민하던 아타울프의 눈이 다섯 배 정도 커졌다.

“설마, 저들을 무장시켜서 전투에 내보내겠다···. 그런 겁니까?”

“안될 이유라도 있나.”

“미쳤습니까? 병사라는 건 그냥 무기만 들려준다고 병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네들을 불러온 게 아니겠나, 일단 내부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난 다음에 병사들을···.”

“그럼 너무 늦습니다!”

아타울프는 좀처럼 설득되질 않았다.

애초에 알라리크를 도우러 가야 한다는 아타울프의 목적과 로마에 남아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올리브리우스의 목적은 서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브리우스는 아타울프와 그 병사들을 포기할 수 없었고, 아타울프 또한 형인 알라리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올리브리우스와 아타울프는 극적으로 협상에 성공하였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5만 명의 시민들을 징집해보겠네, 자네가 알라리크를 도우러 가는 동안에 그들을 훈련해 주게.”

“알고 계십니까? 이건 정말로 미친 짓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렇게 정확히 열흘이 지났을 때쯤.

알라리크와 마리우스가 베로나평원에서 대치를 시작할 때쯤.

올리브리우스는 로마의 교황이었던 아나스타시오 1세와의 모종의 거래를 통해 월계관을 수여받고 새로운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시민들의 삶은 혼란에 빠져있고, 제국의 앞날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아야 할 황제는 너무나도 어리고, 이를 돌봐줘야 할 섭정인 스틸리코는 그렇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나는 선언하노니, 오랜 세월 동안 로마를 수호해온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서···. 로마를 바로잡겠다.

로마인들의 신앙과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여 사그라드는 로마의 번영을 되살리겠노라!”

“신께서 제게 전해주신 권한으로···. 당신께 이 월계관을 바치니, 로마를 지키는 방패이자 로마의 적을 무찌르는 검이 되어주시오소서.”

아나스타시오 1세가 월계관을 씌워주니,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시민과 원로원의원들이 환호하며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축복했다.

물론 그곳에 모인 시민들 사이에는 올리브리우스가 고용한 바람잡이들이 섞여 있었고, 원로원의원들 또한 올리브리우스가 회유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올리브리우스는 그토록 고대하던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황제가 되었다.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생각하는지는 둘째치고서 말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물론이지. 자네가 필요한 걸 말해보게.”

반쪽짜리 황제였던 올리브리우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대대적인 징병했던 것이다.

올리브리우스와 여러 가지 모종의 사정으로 얽힌 이들은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었고, 그의 명령에 따라서 각지의 민병대와 퇴역군인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또한, 노리쿰에서 들여온 품질 좋은 강철들은 이들을 무장시킬 갑옷과 무기가 되었고 말이다.

******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마리우스는 그제야 알라리크가 준비한 계획이 무엇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지원을 기다리는 거였군.”

“지금 당장 들이쳐야 합니다!”

“더위도 한풀 꺾인 지금이 적기입니다!”

“흘러나오는 소문에 따르면, 이미 수십만의 대군이 루비콘강 너머에 속속들이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각하! 결단을!”

“전하! 결단을!”

휘하의 장군들은 결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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