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45/187)

검은 군단은 가장 강력하다. - 1

한여름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베로나평원에서 알라리크와 마리우스는 오랜만에 재회했다.

둘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알라리크는 마리우스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꽁지 빠지게 도망가느라 뒷모습만 봤던 것 같은데.”

“보냈던 편지는 잘 받았다.”

“내가 글재주가 좀 있지.”

알라리크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갈가리 찢어버리고는 마리우스에게 선언했다.

“남에게 경험을 이야기할 만큼 긴 삶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네놈이 보낸 편지는 전에 없이 불쾌하더군.”

“이게 바로 문명인의 방식이라는 거지.”

“예의를 모르는 것이 문명인의 방식이라면, 예의를 아는 내가 야만인이 되는 건가?”

“그런 셈이지···. 그런 의미에서 묻겠다. 항복할 텐가, 아니면 타지에서 삶을 마감할 텐가.”

“내게 선택권이 있나?”

“고르지 않을 건가.”

“네놈이 날 이곳으로 이끌었으니, 선택하는 것도 네놈의 몫이겠지.”

알라리크는 한껏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마리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전쟁이지.”

“바라던 바다. 네놈과 부하들 그리고 저 뒤편에 있는 도시의 시민들까지 한꺼번에 보내주지.”

마리우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후회해도 난 몰라.”

“이제 대화는 끝이다. 마리우스, 이제부터는 피와 강철의 시간이다.”

“그래 나도 기···. 야!”

마리우스도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알라리크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할 말만을 하고는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리우스는 당혹스러움이 헛웃음을 짓더니, 말머리를 돌려서 본진으로 돌아왔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이런저런 이야기지···.”

“오오···. 역사적인 현장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군요.”

“역사는 무슨···. 전투준비는 끝났나?”

“예, 땡볕에 병사들이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잘 쉰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후우···.”

마리우스는 오른손을 이마에 올리고는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날씨에 싸울 수나 있으려나.”

“가만히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런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게르만 병사들은 반쯤 탈진 상태입니다.”

“저 녀석도 생각이 있으면, 낮에는 싸우려고 들진 않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병사들을 뒤로 물리시겠습니까?”

마리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정도의 날씨면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지칠 정도의 더위였다.

알라리크가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같은 더위에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싸움은 낮이 아니라 밤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단은 병사들을 뒤로 물린 다음에 그늘이나 물가에서 쉬도록 하게, 보초 세워두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 적을 한 시간 정도 관찰해본 다음에 쉬는 것처럼 보이거나, 안 움직이면 병사들 좀 재워.”

“야습입니까?”

“아니, 알라리크가 쳐들어올 거다.”

“아···. 확인했습니다. 그늘에서 휴식에, 적의 동태를 확인 후에 오침. 알겠습니다.”

“자네도 끝내고 보고할 필요 없어, 그냥 가서 쉬어.”

“예, 전하.”

브레누스는 힘차게 대답하고는 멀리 가버렸다.

갑옷이나 장비를 전부 검은색으로 했더니, 더 열 받는듯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이번 라벤나 평원에서의 전투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치이익-

마리우스의 앞머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갑옷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

한편, 게르마니아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호노리우스가 새로이 만든 대장간에서는 흰 연기가 쉴 틈도 없이 뿜어져 나왔고, 거리에는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자···. 오늘 우리가 배울 건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것이에요.”

“선생님!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우리들의 주인은 마리우스 전하라고 하셨는데요!”

“좋은 지적이에요 한스,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게르마니아를 다스리라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분이에요.”

“우와아아···.”

대부분 학교에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큼지막한 마리우스의 초상화가 걸려있거나, 입구에 마리우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는 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 앞을 지날 때마다 마리우스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했고, 교회의 사제들 또한 은근히 마리우스를 밀어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리우스가 오기 이전에 게르마니아에 왔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아리우스파였다.

아리우스파는 신학적인 설명을 나름대로 논리적이고도 간결하게 하였기에 일반 시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와 동방 전역에서 많은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주류가 된 아타나시우스파에 이단으로 선포했고, 그들은 탄압을 피해서 게르마니아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몰락했을 그 시점에서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과 마리우스의 비호 아래에서 다시금 날아오를 수 있었다.

마리우스는 공식적으로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한다거나 보호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리우스에게는 아리우스파건, 아타나시우스파건 둘을 구분하지 못했고, 이 둘이 구분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교육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려던 김에 가까운 교회와 연계했는데, 그게 아리우스파였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아리우스파는 철저하게 마리우스를 이용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마리우스의 명령을 거부했지만, 며칠간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 일들이 자신들에게 새로운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진 게 마리우스 우상화 작업이었다.

“하느님인지 먼지 안 믿으니까, 저리 가쇼.”

“아,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저희는 여러분께 포교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이곳까지는 무슨 이유로 오신 거요.”

“여러분께 마리우스 전하의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고, 전하의 동상을 세워드리려고 합니다.”

“으음···. 마리우스 전하의 동상···?”

아리우스파의 사제들은 게르마니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게르만족들에게 서서히 침투했다.

게르만 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마리우스를 앞세워서 자비를 들여 동상을 세워주고, 거리가 멀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주고는 했다.

이러다 보니 게르만 부족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교리 또한 이해하기 쉬우니 하나둘씩 아리우스파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호노리우스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

“폐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아리우스파인지 뭔가 하는 녀석들···. 전부 이교도 아닌가?”

“글쎄요···. 저는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잘 모릅니다만, 이곳의 주민들이 주로 믿고 있는 게 그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흐음···. 마리우스가 아리우스파를 밀어줄 줄 몰랐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폐하?”

“이교도···. 마리우스가 이교도라···.”

잠시 고민하던 호노리우스였지만, 헛웃음을 지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마리우스가 알아서 하겠지.”

호노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리 질렀다.

“어이-! 거기 준비 다 끝났어!”

“예, 준비 끝났습니다. 폐하!”

“이제 돌린다.!”

호노리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대기 중이었던 장정들이 막아두었던 물꼬를 텄다.

새로운 강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물줄기는 힘차게 물레방아를 돌리기 시작했고, 물레방아가 돌아가자 고로에 설치된 석관을 따라서 뜨거운 열기와 바람이 움직였다.

고로를 빠져나온 열은 다시금 고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부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녹습니다! 광석이 녹고 있습니다!”

“후우···. 다들 불 안 꺼트리게 조심해!”

“예, 폐하!”

호노리우스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땀을 대충 오른손으로 닦아내고는 흐르는 강물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뜨거운 열기 탓에 숨도 못 쉬던 상황에서 차가운 강물과 닿으니, 살 것만 같았다.

“푸하아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또 이상한 취미활동이시네요.”

“응?”

호노리우스가 고개를 들어보니, 심통한 표정의 안토니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토니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뭐···. 그냥 보고 싶어서요.”

“어, 어···? 아···. 그래?”

호노리우스는 갑작스러운 안토니나의 말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농담이에요. 어머니가 말 좀 전해달래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무슨 말?”

“창고에서 물건 좀 그만 빼가라고 하시던데요. 돈이 필요하면 말씀하시래요.”

“으음···. 돈보다는 그 안에 있는 물건이 더 필요한 건데 말이지···.”

“그 안에 있는 건 팔아야 하는 물건들이라고 하시던데요. 폐하 때문에 재정이 다시금 휘청거린대요.”

“아니! 내가 쓴다면 얼마나 쓴다고.!”

“그거야 어머니께서 아시겠죠.”

호노리우스는 그길로 예우독시아를 찾아갔지만, 본전은커녕 호되게 혼나기만 했다.

“폐하, 게르마니아의 재정은 국가의 것이지 황제 폐하의 개인 창고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조금 쓴다고 문제가 생···.”

“조금이요?”

에우독시아의 눈썹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녀의 입가 또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지난 8년간 사용하셨던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십니까?”

“그거야···.”

“모르시겠죠!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쓰셨을 테니까요!”

“어, 어···?”

에우독시아는 그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것을 화풀이라도 하듯이 바루스를 안토니나에 맡기면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제가 집안의 살림을 책임진 지난 8년 동안, 우리 가문의 재산은 불어나기는커녕 매년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글쎄···.”

“그 유명한 폐하의 ‘취미생활’ 때문이 아닐까요? 그 비싼 유리를 물처럼 쓰시고, 시도 때도 없이 건물을 날려 먹고 새롭게 짓고···.”

“아, 아···.”

“그뿐인가요? 최근에는 게르마니아에서 이상한 대장간을 짓는다고 우리들의 유일한 수입원에까지 손을 대시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쏟아내는 말들은 호노리우스를 위축되게 만들기 충분했다.

십여 분간 이어진 에우독시아의 일방적인 팩트폭행이 끝나자, 호노리우스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한 일은 모두 나라를 위해 한일인 것뿐인데···. 진짠데···.”

“후우······. 폐하의 기분을 헤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우리의 사정을 고려해달라고 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만든 대장간은 놀려고 만든 게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은 알겠지만, 나중에는 고품질의 강철을 쭉쭉 뽑아낼 수 있다니까 그러네!”

“당장은 쓸모가 없잖습니까, 지금 전선에 있는 병사들이 먹을 식량과 소모된 장비들을 보급하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모르지.”

“모르면···!”

“그래도 나중에는 모두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걸?”

“하아···. 폐하, 지금까지 제가 했던 말들은···.”

“마님! 마님!!”

그때, 코프루스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면서 에우독시아의 말을 끊어버렸다.

살짝 감정이 상했는지, 에우독시아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아그리피넨시스에 새로 생긴 대장간이 있잖습니까, 그곳에서 지금 강철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작했는데···?”

“하, 한 달 치를 하루 만에 뽑아내고 있습니다!”

에우독시아는 뜨악한 얼굴로 호노리우스를 돌아봤고, 호노리우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뭐랬어? 달라질 거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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