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44/187)

양파의 노래 - 7

“지금 현 시간부로 플로렌스 공략은 포기하고, 군을 두 개로 나누도록 하겠다.”

알라리크의 말에 아타울프와 다른 장군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이 결연한 얼굴이었지만, 올리브리우스는 크게 당황하며 알라리크에게 물었다.

“장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군을 두 개로 나누신다니···. 설마 북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여기 있는 제 동생 아타울프가 당신과 함께 로마로 갈 것이오.”

“아니···. 그래도···.”

“아타울프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도 마리우스를 박살 내고 합류하겠습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올리브리우스는 불만이 들었지만, 헛기침하면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우리는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약속을 어기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을 하시는구려.”

“뭐···. 결론적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우리가 약속을 안 지켰다라···.”

알라리크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내 단검을 꺼내 탁자 위에 거꾸로 꽂아놨다.

“뭐, 뭐하신 겁니까!”

“우리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스스로 합당한 처벌을 내리려고 합니다.”

알라리크는 단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가져다 댔다.

단검이 점점 알라리크의 살갗을 파고들수록 주변에 있던 장군들의 표정이 흉흉해져만 갔고, 올리브리우스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서워졌다.

“그, 그만하시오!”

“그만? 왜 그만두라는 겁니까.”

“내, 내가 실언을 했소이다. 그러니 그만두시오!”

“그러시다면야.”

알라리크가 단검을 집어던지니, 그의 동생 아타울프가 다급하게 천으로 알라리크의 상처를 감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라리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도록.”

“예!”

뜨거운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알라리크의 두 눈을 본 올리브리우스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특단의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한편, 베로나 인근의 평원에 도착한 마리우스의 부대는 인근의 거대한 호수 근처에 군영을 펴고 자리를 잡았다.

더위에 지친 수많은 병사가 일제히 호수로 달려드니, 호수는 물 반 사람 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데키무스는 마리우스에게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더운 날씨입니다.”

“그러게, 이런 날씨라면 전투도 힘들겠어.”

“조금만 늦었어도 행군 도중에 병사들이 퍼져버릴 뻔했습니다. 지금도 드문드문 더위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나올 정도입니다.”

“올해 여름은 지독하게도 덥고 습하군.”

마리우스는 머리까지 차갑게 식혀주는 보리차의 시원함에 미소를 지었다.

“더울 때는 느긋하게 쉬는 게 제일이지. 알라리크는 지금쯤 행군한다고 개고생을 하고 있겠지?”

“이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병사들의 절반 이상이 쓰러져 있겠지요.”

그 말대로였다.

마리우스는 현대 한국에서 여름마다 겪었던 살인적인 더위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호수 근처에 군영을 세우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그가 겪은 수십 년간의 경험상 이런 더위는 밤늦게까지 열대야로 이어지는지라 최대한 병사들의 몸 상태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병사들에게 물을 자주 마시게 하고, 작업이나 훈련은 꼭 필요한 것만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하게 해.”

“에, 각하.”

“그리고 틈나는 대로 천막에 물을 뿌려서 열을 좀 식히는 것도 잊지 말고, 특별식으로 병사들의 기력을 보충해주게.”

“특별식 말입니까? 어떤 걸 준비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각하께서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 각하의 입맛에 식단을 맞춰야지요.”

마리우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했던 것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던가, 아니면 진짜로 먹을 게 없어서 식단을 통일했던 것뿐이었다.

보급이 잘되고 있는 이번 전투에서는 평소 먹던 대로 따로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하려 했지만, 데키무스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은 이미 병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브리타니아에서 너무 오버했나···.”

“예?”

“아무것도 아닐세, 후우···. 오늘 저녁은 닭고기 요리로 준비해줄 수 있겠나?”

“음···. 닭이 조금 모자라기는 하겠지만, 인근의 베로나에서 더 구해오면 될 것입니다.”

“되도록 병사 한 명당 닭 한 마리는 먹을 수 있도록 하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데키무스가 자리를 떠나자, 마리우스는 다시금 보리차를 들이켜면서 중얼거렸다.

“지랄 맞게도 더운 날에는 치킨이지.”

태양은 종일 마리우스의 머리 위를 내리쬐었다.

******

에우트로피우스는 슬슬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훈족의 왕 울딘의 침입으로 한창 정신없는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계속해서 날아오는 지원 명령서에 이제는 넌덜머리가 났다.

“스틸리코가 점점 선을 넘는군.”

“그만큼 알렉산드리아의 사정이 매우 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급박하기로 치면 본토의 상황이 더 매우 급하겠지! 빗금 알라리크와 그의 일당들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서 로마를 노리고 있는데 말이야!”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에우트로피우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놈이 정치에 끼어든 뒤로 제대로 하는 일이 뭐가 있었는가! 대부분의 일은 심마쿠스와 암브로시우스가 해결하지 않았나!”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그렇긴 한 게 아니라 그게 맞아! 심마쿠스가 얼마 전에 죽고, 암브로시우스가 골골거리면서 도움을 줄 수가 없으니 슬슬 문제가 드러나는 게 아니겠나.”

에우트로피우스가 잔뜩 흥분한듯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파비우스가 당황하면서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합하, 일단은 진정하시고 알렉산드리아와 섭정 공의 현 상황을 살펴보시지요.”

“끄응···. 벌써 세 번이나 그 작자의 요구를 들어줬는데, 또 들어주란 말인가?”

“알렉산드리아가 중요한 무역항이자,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아니겠습니까, 우선은 원래대로 돌리는 게 중요하지요.”

“북아프리카와 리비아 속주의 해안 도시들이 초토화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 혼자 살아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파비우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돌려보낼까요?”

“아니! 이번엔 내가 직접 친서에 대한 답을 써줄 테니, 자네는 훈족들을 막을 인선이나 구상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펜을 들고서는 그동안의 분노를 담아내려는 듯이 종이에 여백 하나 없이 글자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글자 한 자 한자마다 에우트로피우스의 분노와 스틸리코를 향한 원망과 꾸중이 가득했으며, 마지막에 마리우스에게서 배우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마친 에우트로피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쯧···. 정치만 안 했으면 괜찮았을 사람이···.”

편지는 쾌속선을 타고 스틸리코에게 전해졌다.

에우트로피우스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에 스틸리코가 관심을 보였으나, 이내 편지를 받아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감히···. 일개 환관이 나를 조롱해?!”

“합하, 우선은 진정하시지요. 동방도 훈족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정신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누구는 그까짓 야만인들을 상대해보지 않은 줄 아는 건가!”

“그건 그렇지만···. 동방과 우리는 상황이 다르잖습니까, 합하께서 북방의 국경선을 마리우스에게 맡겨두신 뒤로부터 국경이 안정화 되었잖습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알렉산드리아의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시고 돌아가시지요.”

“진심인가.”

스틸리코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했다.

부관은 얼마 전에 스틸리코의 호위병들에게 끌려나간 장교를 기억해내고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진심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로마로 쳐들어온 야만인들을 몰아내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합하께서 왜 알렉산드리아에 집착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차라리 북아프리카 속주의 재건에 힘쓰시지요.”

“알렉산드리아야말로 무역의 중심지이자 동방의 주요 도시가 아닌가! 이곳을 버린다는 것은 동방을 버리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야!”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것을 힘겹게 붙잡아서 뭘 하겠습니까!”

“자네···. 자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버릴 것은 버리자고 했습니다.”

스틸리코의 두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인지는 알고서 하는 말이겠지.”

“예, 물론이지요.”

“후···. 마요리아누스, 내가 자네를 내 곁에서 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늙은이를 합하께서 좋게 봐주신 것이겠지요.”

스틸리코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마리우스, 전부 내 사위인 마리우스가 자네를 발탁했기 때문이야. 그게 아니라면 적을 앞에 두고서 도주한 이를 내가 왜 쓰겠는가.”

깊은 한숨을 내쉰 스틸리코가 무덤덤한 얼굴로 마요리아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모든 땅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이야. 맞나?”

“어차피 처음부터 지킬 수도 없는 땅들이었습니다. 지금의 평화만 보더라도, 마리우스 각하께서 게르마니아로 가신 뒤에야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마리우스 각하께서 게르마니아를 평정하기 전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부족 단위로 국경을 넘어오던 야만족들과 겨울만 되면 대규모로 연합을 맺어 강을 건너던 야만족들을 말입니다!”

스틸리코는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고작 그런 야만족들이 두려워서 속주들을 포기하자···. 뭐 이런 말인가?”

“예, 두렵습니다. 두렵고말고요. 마리우스 각하께서 로마에 안 계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전쟁터에서 눈먼 화살에 죽거나 병에서 죽었다면···. 말입니다.”

“그래봤자···.”

마요리아누스의 말에 스틸리코가 멈칫했다.

마리우스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던 스틸리코에게 마요리아누스의 말이 이어졌다.

“마리우스 각하께서 없으셨다면, 욕심 많은 루피누스와 가이나스의 내전으로 동방은 초토화되었을 것이고,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같은 국경 인근의 속주들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겠지요.

그뿐입니까? 합하께서는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을 데리고서 이곳저곳에서 몰려드는 야만족들과 끝없는 싸움을 이어나가셨겠지요.”

“그런 쓸데없는 상상을···.”

“과연 상상이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마리우스 각하께 일이 생기거나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장 늘어나는 전선만 몇 개입니까!”

마요리아누스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궤변이군.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을 상상해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건 애들이나 할법한 조잡한 상상일세!”

“과연 그럴까요? 당장만 하더라도 로마의 원로원과 귀족들이 연합하여 합하의 위세에 도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야만인들을 끌어들여서 말이지요.

그런데 마리우스 장군이 안 계셨더라면, 어땠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안팎으로 공격받으셨겠지요!”

마요리아누스의 말에 스틸리코의 표정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살벌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것 같나?”

“합하라면은 이겨내셨겠지요! 그런데 로마가 그를 버텨낼 수 있었겠습니까?! 합하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제국이 그것을 버텨냈겠느냐는 말입니다!”

마요리아누스의 말에 스틸리코는 한결 복잡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고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스틸리코는 문득 머리 위에 쓴 투구가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주변의 시야는 좁았고, 머릿속에는 열이 가득 차서 스멀스멀 땀이 차고 있었다.

“후 우우···.”

잠시 고민하던 스틸리코는 조심스럽게 투구를 벗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동안 갑갑하게 막혀있던 시야가 확 트이면서, 시원한 바람이 땀이 가득 찬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껏 열이 뻗었던 머리가 식으면서, 몸도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던 스틸리코는 나지막이 마요리아누스에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지킬 수 없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지금은 지킬 수 있는 것들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 그렇겠군···.”

두 눈을 감은 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던 스틸리코는 조심스레 눈을 뜨면서 말했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합하···!”

“하지만,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예? 그게 무슨···.”

“자네가 말했듯이 마리우스가 있기 때문일세, 내 뒤에는 마리우스가 있어···. 그래, 이 간단한 걸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

“합하···?”

스틸리코가 기쁨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마요리아누스 자네가 해줄 일이 있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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