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의 노래 - 6
마리우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 군은 갈리아를 지나 순식간에 이탈리아의 경계선까지 올 수 있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야만인들의 등장에 시민들이 두려워했지만, 아군임을 안 뒤에는 환호를 보냈다.
갈리아는 게르마니아와 인접한 탓에 그동안 게르마니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던 마리우스의 위명을 알고 있었다.
스틸리코와 황제를 지지하는 갈리아로서는 올리브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마리우스의 군대를 격하게 환영했다.
“다 때려 부수고 와라!”
“이탈리아의 돼지 새끼들 엉덩이를 제대로 걷어차 주고 오라고!”
“게르마니아 대왕 마리우스 만세!”
“대추장 마리우스 만세!”
“그런데 대추장은 뭐야?”
“야만인들의 대장이니까 대추장 아니야?”
“그런가?”
“그냥 만세나 불러.”
이런 규모의 환대를 처음 받아본 게르만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배고픔이건 자유를 위해서였건, 무슨 이유에서든지 로마의 국경을 넘은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혐오와 배척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확히는 마리우스를 따르게 된 뒤로부터 그들의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아그리피넨시스는 더이상 목숨을 걸고 찾는 곳이 아니었고, 시장 상인들의 바가지로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거래로 부를 쌓을 수도 있었다.
그뿐인가? 예전이었다면 겨울마다 경계를 침범해오는 타 부족들을 경계하면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야 했지만, 오히려 이제는 불쌍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줄 정도로 풍족해졌다.
아이들은 잘 기른 아기 돼지처럼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고,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노인들이 음식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목숨 걸고 무기를 들 필요도 없어졌으며, 자식들은 더이상 전사나 사냥꾼, 농부들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다.
모두 마리우스의 덕분이었다.
그들이 새롭게 모신 왕은 게르마니아에 빛과 영광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의 배를 불려주었다.
매번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의 창고는 항상 텅텅 비어있었다.
그렇다고 마리우스가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그뿐인가? 전쟁터에서는 그 어떤 전사보다도 앞장서서 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야말로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아군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적들에게는 공포감을 심어주는 영웅의 모습 그대로였다.
게르만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들고서, 반짝이는 눈으로 마리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흠···. 아무래도 너무 오래 행군해서 그런 모양이야. 슬슬 적당한 곳에서 쉬었다 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각하를 우러러 보는듯하군요.”
“우러러본다고.? 날?”
마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 이런···.”
“장군의 진심이 병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루스는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을 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데키무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사루스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각하께서 그동안 게르마니아에 헌신하셨던 것을 저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헌신은 무슨···. 이번에 이탈리아로 가면, 로마를 약탈해서 한 몫 단단히 챙길 거야!”
“예, 그러시겠지요.”
“그럼 원로원 귀족들을 터는 것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이래 봬도 약탈에는 자신 있습니다.”
“어? 장난 아니야! 진짜로 다 털어버릴 거야!”
“예 예···. 햇볕 아래에서 병사들이 지쳤을 테니, 조금 쉬었다 가겠습니다.”
데키무스는 그렇게 통보하고서는 말을 몰고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러 떠났고, 사루스 또한 방긋 웃으면서 입을 닫았다.
“아니, 진짜로 로마를 약탈할 거라니까?”
“콜로세움을 뜯어다가 게르마니아에 옮겨놓는 건 어떠십니까, 시민들이 더 좋은 연극을 볼 수 있겠군요.”
“사루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이쿠, 그렇군요.”
사루스는 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휴···. 앓느니 죽지···. 오늘 날이 참으로 지랄 맞으니,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햇빛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가지.”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마리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열이 멈춰 섰다.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에 데키무스가 마리우스를 위해서 병사들에게 임시천막을 설치하라고 시켰지만, 마리우스는 그런 데키무스를 말리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으니까, 괜히 애들한테 뭘 자꾸 시키지 말고 장군들한테 모이라고 해.”
“군사회의입니까?”
“그래, 슬슬 이탈리아에 다 와 가는데, 알라리크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를 생각해둬야지.”
“요리···? 각하, 혹시 사람고기를···?”
“그런 거 아니야! 관용표현 몰라?!”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전해.”
“예, 각하!”
시원한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 토벌군을 이끄는 모든 장군이 모였다.
다들 더운 날씨에 비 오듯이 땀을 흘렸다.
“다들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가족들과 재회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전쟁터로 오신 각하의 고생에 비하면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자네들을 이 자리에 모은 건 이탈리아로 넘어가기 전에 작전에 대해 논의하려고 함이네.”
“작전이라니요. 그냥 가서 알라리크 놈과 올리브리우스를 때려 부수면 되지 않겠습니까?”
브레누스의 호기로운 모습에 마리우스는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네만, 지금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알라리크가 플로렌스를 공격하는 중이라고 들었네, 플로렌스가 뚫리면 그다음은 로마인 셈이지.”
“그럼 큰일 아닙니까? 플로렌스는 작은 성인지라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알라리크를 이곳 베로나까지 유인해서 싸우면 좋을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이 궁금하군.”
가만히 듣고 있던 세르비우스가 먼저 말했다.
“각하께서는 평원지대에서 단 한 번의 전투로 알라리크의 군대를 궤멸시키려는 겁니까?”
“그래, 바로 맞췄군. 역시 세르비우스야.”
“평원에서의 전투라면 기병 전력이 우월한 우리가 더 유리하겠군요.”
“거기다가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오기 힘든 위치이니, 패잔병들을 전부 잡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그때 가만히 있던 막시무스가 입을 열었다.
“적들을 베로나로 끌어들이는 게 문제겠군요,”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사루스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루스 경이요?”
다들 고개를 돌려 사루스를 바라봤다.
갑자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사루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알라리크의 성향이나 개인사에 대해서 말해드렸을 뿐입니다.”
“사루스가 말하기로는 비디메르는 부하들에게 쉽게 믿음을 주는 성격이 아니지만, 한번 믿음을 준 부하는 아낀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까?”
“비디메르.”
마리우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놈이 알라리크가 신뢰하는 부하라더군.”
“비디메르라니···. 그놈은 이미 죽었잖습니까.”
“죽었지, 그래서 쓸만하다는 거야.”
“전하,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으로 어떻게 알라리크를 유인하시겠다는···.”
게지카는 말하던 중에 입이 굳어버렸다.
순간 무시무시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게지카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전하···. 설마···. 시체를···?”
“자네는 나를 뭐로 보는 건가,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어도 사자를 모욕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긴···.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산사람은 거리낌 없이 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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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공방전이 시작된 지 보름이나 지났다.
사흘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공방전이 벌써 보름이나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쯤에서 올리브리우스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지만, 휘하의 병사가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라리크 또한 플로렌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성을 함락시킬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았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지나갔겠지만, 매번 아슬아슬하게 성을 넘지 못하는 모습에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을 넘지 못했다.
“형님, 병사들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슬슬 병력을 뒤로 물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일이다. 병사들을 더 투입해라 아타울프.”
“적은 이미 아군의 큰 공세를 막아내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아군을 밀어내는 중입니다. 오늘 전투의 승기는 이미 적에게 넘어갔습니다. 형님.”
“에잇!”
알라리크는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을 반으로 꺾어버리고는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말머리를 돌려서 군영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그의 동생 아타울프가 한숨을 내쉬면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군 본영까지 후퇴한다. 전달하도록.”
“예, 장군! 전군 후퇴하라! 본영까지 물러난다.!”
퇴각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거기에 더불어 검은색의 깃발을 든 병사가 높은 곳에서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댔다.
나팔소리를 들은 지휘관과 병사들은 열려있는 성문을 통해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장군!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네, 치열한 싸움이었는데···.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구나···.”
“우선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동원해서 무너진 성문과 성벽을 보수하겠습니다!”
“전투 중이었던 병력은 쉬게 하고, 뒤에서 대기 중이던 예비병력을 데려가.”
“예, 알겠습니다.”
부관은 잔뜩 지친 얼굴로 병사들을 데리러 갔다.
그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그의 갑옷 사이로 붉은 핏물이 한 움큼씩 흘러내렸다.
콘스탄티우스는 이름 모를 병사들의 시체를 의자 삼아서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방어용으로 세워둔 임시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수많은 병사가 잠들어있었고, 안쪽에도 많은 수의 병사들이 죽어있었다.
“이제 보름···. 앞으로 두달하고도 보름이 더 남았는데···. 버틸 수 있으려나.”
콘스탄티우스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쓸만한 무기와 갑옷들을 수거하는 병사들과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사르르 눈을 감았다.
한편, 성 밖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을 둘러보던 아타울프는 등에 백기를 꽂은 채로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로마군 병사를 발견하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로마 병사는 천천히 말을 몰아서 아타울프에 다가오며 두 손을 들고서는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네놈은 누구냐.”
“저는 게르마니아 17군단의 전령입니다. 마리우스 각하께서 알라리크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마리우스가···. 전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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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편지를 받아든 알라리크는 예상과는 다르게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폭소했다.
“하하하하하하하!!! 마리우스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구나! 으하하하하!!”
“형님, 무슨 내용이기에 그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아타울프는 알라리크가 건네준 편지를 읽고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알라리크는 보시게.
자네의 안목은 그야말로 전에 없이 날카로웠고.
자네의 전략은 빈틈없이 완벽했으며.
자네의 군은 강하고 억세고 정예롭다네.
지난 세월이 자네의 노력을 알아줄 테니, 슬슬 물러나가는것이 어떻겠나?]
“이, 이건···. 대놓고 형님을 도발하는 게 아닙니까!! 마리우스 이 자식을 그냥···!”
“마리우스.”
조금 전까지 숨넘어가게 웃고 있던 알라리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싸늘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놈은 어디 있나.”
“라, 라벤나에서 기다리시겠다고···.”
“라벤나···. 라벤나라···.”
“라벤나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야 있는 곳입니다.”
“이봐, 올리브리우스.”
“말씀하시지요.”
알라리크는 잔뜩 험악해진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로마까지 함게할수 없을 것 같군,”
“그럼 라벤나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분명 우리의 약속은 로마까지···.”
“로마는 됐어! 마리우스 놈이 오고 있다.”
“마리우스가 뭐 어쨌···.”
알라리크는 오른손을 내리쳐서 탁자를 두 동강 내며 말했다.
“나와 놈 사이에는 갚아야 할 깊은 원한이 있다네, 자네 같은 뚜쟁이는 알지 못하는 전사와 전사 간의 결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