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42/187)

양파의 노래 - 5

낮이 되자마자 알라리크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들판을 메운 끝없는 야만인들의 파도 속에 플로렌스는 폭풍우 속을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사방에서 들이치는 야만인들의 물결 속에서 플로렌스를 책임지고 있는 콘스탄티우스는 매일매일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장군! 동쪽벽에 적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중앙에 따로 편성해뒀던 예비대를 동문으로 보내서 병사들을 돕게 해라!”

“예! 장군!”

플로렌스의 협소함은 병사들의 움직임을 수비 측 병사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성의 협소함으로 인해 적의 공격 방향과 숫자가 제한된다는 것이 수비 측의 부담을 덜어줬다.

거기에 시민들의 협력까지 이어지니, 콘스탄티우스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벌써 열흘째입니다. 그동안 당신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고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올리브리우스는 자기 생각과는 달리 무덤덤한 알라리크의 모습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장군께서 저 조막만 한 성은 금방이라도 넘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넘고 있잖습니까, 아닙니까?”

“지금 저와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말장난이라···. 그럼 전선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은 개죽음이겠군요.”

“장군!!”

올리브리우스가 빼엑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알라리크는 시선 한번 주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당신의 수하가 아니고 엄연히 협력관계라는 점을 잊지 마시지요. 당신이 우리를 믿지 않는 만큼이나, 우리도 당신네를 믿지 않습니다.”

“그, 그게 무슨···.”

“간단히 말하자면···.”

알라리크가 그제야 올리브리우스를 돌아보면서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러워 이새끼야.”

“이, 이새끼···?!”

“이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로마에서 저를 막아설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다가는 스틸리코나 마리우스가 금방이라도 대군을 이끌고서 올 거란 말입니다!”

올리브리우스의 말에 알라리크가 흠칫하더니, 이윽고 얼굴이 마구 구겨지기 시작했다.

험악한 얼굴이 된 알라리크는 올리브리우스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으면서 말했다.

“스틸리코건, 마리우스건 상관없습니다! 몇 놈이거든 간에 전부 해치워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당신에게 필요한 건 로마의 월계관이 아닙니까!”

“내, 내가 실언을 했군···. 미안하네.”

“마리우스 그 자식이 얼마나 끌고 오든지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일을 할 거고, 제 형제의 깊은 원한을 갚을 거란 말입니다!”

“그, 그렇지. 자네라면 분명히 가, 가능할걸세.”

알라리크는 여전히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검을 뽑아 들고서는 성을 가르치며 소리쳤다.

“더는 미룰 시간이 없다. 전군! 총공격하라!”

“와아아아아-!”

“총공격하라!”

알라리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본진에서 대기 중이던 예비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언덕이 움직이는 듯했다.

******

알라리크가 이탈리아에 입성했다는 소식은 동방의 황궁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창 군 내부숙청에 열을 올리던 에우트로피우스는 갑작스러운 알라리크의 침공과 올리브리우스의 반란 소식에 고민에 빠졌다.

티마시우스의 일을 처리한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리아를 내버려 두다시피 한 에우트로피우스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특히나 알렉산드리아의 일로 가족을 잃거나 재산을 크게 잃은 이들은 에우트로피우스를 증오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동방의 정계를 꽉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에우트로피우스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물론 마리우스가 붙여준 파비우스가 그의 손발이 되어주기는 했지만, 파비우스는 지지층이 되어줄 수 없었다.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 또한 방에 틀어박혀서 파업한 지 벌써 몇 년째였다.

지난번에 티마시우스를 이용한 친위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부터는 유흥과 주색잡기에 빠져서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 상황에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파비우스.”

“예, 합하.”

“고트족들의 수장 알라리크가 올리브리우스와 손을 잡고, 이탈리아로 들어갔다는군.”

“지원군을 보내야겠군요.”

파비우스의 말에 에우트로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겠지만, 우리 사정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

“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울딘이 배가 고프다는군.”

울딘이 이끄는 훈족이 호시탐탐 동방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티마시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국경 인근의 몇몇 마을과 도시들이 약탈당했고, 국경을 지키는 군단들에서 쏟아지는 지원요청만으로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다.

“이번에는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야.”

“상황이 참 기가 막힐 정도로 맞아떨어지는군요. 군 내부의 숙청이 한창 이뤄지고 있을 때 쳐들어오다니···.”

“병사는 많지만, 그들을 지휘할만한 장교가 모자라는 상황일세.”

“제가 갈 수는 있지만,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적은지라 그들을 잘 이끌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일단은 사투르니누스나 트리비길드, 둘 중 하나를 보내려고 하는데···. 좋은 생각 있나?”

잠시 고민하던 파비우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투르니누스는 발렌스황제 시절부터 군에 종사한 노장입니다. 그만큼 이민족들을 잘 알고 있는 경험 많은 장군입니다만···. 티마시우스 파벌 중 한 명이었습니다.”

“트리비길드는 어떤가.”

“가이나스의 친척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별로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제가 평소에 자주 어울리는 편이긴 하지만···. 그 친구는 대규모 군대를 운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오만하고 성격까지 급하니, 이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둘 다 하자 있는 인물들이군···.”

“개인적으로는 트리비길드 장군을 보내는 게 바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검을 거꾸로 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요.”

에우트로피우스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국경과 황도를 오가는 전령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가는 상황에 스틸리코 또한 에우트로피우스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의 재건을 진두지휘 중인 스틸리코는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라리크와 올리브리우스가 자신의 제국을 망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재건은 도무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건물을 재건하는 것쯤은 간단했지만, 그렇게 재건한 도시에 시민들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돼버렸다.

그렇기에 스틸리코는 병사들을 풀어서 북아프리카와 리비아 속주의 난민들을 강제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잡아라! 이럇!”

“로, 로마군이야···.”

“도망쳐!”

스틸리코 휘하의 갈리아 기병대는 북아프리카를 떠돌아다니면서 난민들을 사로잡아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기 시작했다.

길도의 약탈과 학살 중에서 살아남은 난민들은 고향 땅을 벗어나기 싫어했지만, 스틸리코에게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요.”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요!”

“시끄럽다. 안전한 도시에서 살게 해주겠다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난민들은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눈물의 길에 많은 이들이 죽고 말았다.

머나먼 길을 이동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난민들은 몇 날 며칠을 걷고, 또 걷다가 연약해진 몸이 견디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면 모두 끝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여기가 알렉산드리아라고···?”

“사방이 무너지고 불타버렸는데···.”

“예전에 봤던 도시와는 전혀 딴판이야.”

“우린 이제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힘겨운 전쟁통에서 살아남고, 고향 땅을 떠나서 머나먼 타지로 온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노동과 터무니없는 식량들뿐이었다.

“양파?”

“고작 양파들을 던져주고,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다못해 보리라도···.”

“시끄럽다! 네놈들이 몰려든 탓에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파가 든 자루를 엎어버리더니, 자루 밖으로 빠져나온 양파를 마구 짓밟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난민들이 황급히 병사를 말렸다.

“아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배가 고파서 그만···.”

“주는 대로 처먹어!”

난민들의 두 눈에서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다.

그것이 양파로 인한 눈물인지, 고단하고 괴로운 삶으로 인한 눈물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스틸리코가 알렉산드리아에 보이는 집착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강박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본토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알렉산드리아를 예전 모습 그대로 되돌리겠다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몇 년이나 걸릴 일을 몇 달 만에 끝내려고 무리하고 있었다.

주변 이들은 그를 말려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돈···. 돈이 모자라···. 어디서 대규모로 자금을 끌어올 만한 곳이 없겠나?”

“저···. 합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아무래도 알렉산드리아의 일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틸리코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꺼낸 이를 위아래로 둘러봤다. 마치 상품을 품평하듯이 말이다.

이미 그의 내면에서는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고, 처분과정과 방법까지 처리가 끝난 것이었다.

말을 꺼냈던 장교는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이내 몸을 벌벌 떨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 그것이···. 지, 지금의 알렉산드리아는 완전히···. 완전히 파괴된 상태입니다. 그, 그런데···. 이걸 복구하려면···.”

“그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모,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예, 그러니까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순위?”

스틸리코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 말은 스틸리코의 평가가 뒤집힐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기회라고 판단한 장교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리아를 재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중요하지요! 다만, 로마를 빼앗기고 알렉산드리아를 재건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예, 지금 우리 군이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리아의 일을 뒤로 미뤄놓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자네가 나와 몇 년을 일했었지?”

“예?”

스틸리코의 질문에 장교의 입이 막혔다.

그만큼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거야···.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휘하에서 복무하실 때부터였으니, 못해도 10···. 13년은 넘었을 겁니다.”

“13년···. 13년이라···. 우린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했네, 그렇지?”

“예, 합하.”

“같이 수많은 전장을 누비면서 로마를 위해 헌신했지 맞나?”

“예, 그렇습니다.”

스틸리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데 자네는 날 속이려고 하는군.”

“예?! 그게 무슨···.”

“호위병.”

스틸리코의 낮게 깔리는 말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몇몇 병사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스틸리코는 손가락으로 장교를 가르치며 말했다.

“올리브리우스와 내통한 자이다. 데려가서 심문하도록.”

“합하! 저는 올리브리우스와 내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자네는 알렉산드리아의 일이 미쳐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이탈리아로 보내려고 했잖나.”

“그건 로마가 위험하기에···.”

“로마가? 위험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콘스탄티우스를 보내서 급한 불을 꺼놨어, 다음은 마리우스가 알아서 해주겠지. 안 그렇나?”

“합하! 지난번에는 그런 말을···.”

무표정했던 스틸리코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올리브리우스의 첩자들에게 내 대전략이 노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지금... 그 첩자를 찾아낸 것 같군. 끌고 가.”

“합하! 제가 합하의 생각에 반대했다고 첩자로 모시는 건···. 합하!!!”

[제게 이러실수는 없으십니다!!!]

앞장서서 말하던 장교가 끌려나가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지만, 스틸리코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 생각에는 동방이 부유하니, 자금을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다들 내 생각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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