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의 노래 - 4
“하, 씨발.”
힘겨웠던 브리타니아 전역이 끝나고 게르마니아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전부 게르마니아에서 날아온 한 통의 전서구 때문이었다.
“올리브리우스···? 이건 또 뭐 하는 멍청이길래 알라리크하고 손을 잡는 거야?”
“로마의 귀족들이야 항상 똑같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말입니다.”
“후우···. 이러니까 나라가 쳐 망하지···.”
“예? 망하다니요?”
“별 것 아닐세, 그것보다···. 게르마니아로 돌아가자마자 또 전쟁터로 끌려가게 생겼군.”
마리우스는 가슴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역심이라는 녀석이 양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매번 반란군이나 야만인들을 토벌한다고 개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건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새로운 전장이었다.
장인어른이나 황제 폐하는 나름대로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은 장기판 위의 말이 아니다.
일하면은 쉬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다못해 매번 마리우스의 이전, 그러니까 마리우스가 아직 나상훈 병장으로 불리던 시절의 대한민국 군대 또한 주말에는 쉬게 해줬다.
“생각해보니, 주말에도 예초기를 돌렸던가?”
“예초기···? 그건 또 뭡니까.”
“아, 혼잣말일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라리크라면은 이미 장군께 크게 혼이 났던 이가 아닙니까?”
사루스는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지만, 별로 위로가 되질 않았다.
“차라리 그때 붙잡아서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시지요.”
“이봐 사루스, 알라리크 놈에 대해서 뭐라도 알고 있는 게 있나?”
“알다마다요. 그놈과 저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습니다. 그놈의 부족이 매번 우리 부족을 쳐들어와서 식량을 뺏어가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지요.”
“으음···. 그것 말고는?”
“알라리크는 언제나 자비롭고 관대해 보이길 원하나, 때때로 감성적이면서 충동에 쉽게 흔들리는 인물입니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라···. 애새끼라는 말을 너무 돌려서 말하는 것 아닌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놈은 곁에 있는 부하들의 조언을 듣긴 하거든요.”
사루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거 내 이야기 아닌가?”
“알라리크와 각하가 비슷하긴 하지만, 세세하게 따져보면은 아주 다릅니다. 아무리 놈이 날고 긴다고는 해도 각하에 비한다면, 사자와 고양이 정도의 차이점이 있겠군요.”
“내가 사자 맞지?”
“그럼요. 그리고 각하와 놈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차이점? 그게 뭔가.”
사루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께서는 우리에게 관대해 보이려고 행동하시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이 챙겨주시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전투 때마다 누구 보다 앞장서서 전투에 뛰어드시는 반면에 알라리크 놈은 맨 뒤에서 전투를 관음할 뿐이지요.”
뭐지 욕하는 건가.
******
마리우스가 아그리피넨시스로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병사들이 출병 준비를 끝낸 뒤였다.
그러니까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말이다.
“...가족들 얼굴도 한번 못 보고 또 전쟁터로 떠나야 한단 말입니까?”
“마리우스,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는데 어쩌겠어.”
호노리우스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애원했다.
안토니나 또한 황제의 뒤편에서 나를 배웅해줬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면서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그런 딸의 모습에 마리우스의 마음에 납덩어리가 끼어있는 듯이 무겁고 답답해졌다.
“아버지···.”
“얼굴을 보아하니, 잘 지낸 모양이로구나.”
“아버지께서 전쟁터로 가셨는데, 어떻게 제가 편하게 지냈겠어요.”
“으음···. 안토니나, 네가 아버지라고 하니 적응이 안 되는구나! 예전처럼 아빠라고 불러주겠니.”
안토니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도리도리 내저으면서 거절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그것보다 아버지께 알릴 소식이 하나 있어요.”
“소식? 무슨 소식 말이냐.”
“작은어머니께서···.”
“아멜리아가 왜?”
가슴이 철렁했다.
테르만티아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는지 걱정되는 마음이 일었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요. 아버지께서 브리타니아에 가신 동안에 작은어머니께서 세쌍둥이를···.”
순간 뇌 정지가 온 듯이 멈춰 섰다.
세쌍둥이···?
벌써 태어났단 말인가?
“세, 세쌍둥이?! 아멜리아는? 아멜리아는 무사한 거냐!”
“어머니와 동생들은 모두 건강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하하 전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자식들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주변들이 축하해주니 입꼬리가 절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 든 부인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이 병사들의 사이를 가르면서 내게 걸어왔다.
“늦지 않게 오셨네요.”
“크흠···.”
“그래도 이번에는 사지 멀쩡하게 오셨네요.”
“지난번에는 피를 흘리면서 수레에 실려 오셨었는데 말이죠.”
“아니, 그래도 이번에는 멀쩡히 돌아왔잖아···.”
“그리고 또 전쟁터로 가시는 길이죠.”
에우독시아는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호노리우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품속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게 건네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이를 안아 든 마리우스의 두 눈이 사르르 풀리면서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헤헤헤···.”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난 가족이라고는 엄마뿐이었거든.”
“저기요? 제 팔이 떨어질 것 같은데, 아이들 좀 받아주시겠어요?”
테르만티아는 힘겹게 두 아이를 들어서 마리우스의 품 안에 안겨주었다.
졸지에 주변의 모든 관심이 마리우스에게 쏠렸지만, 당사자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왜 그러십니까?”
“사루스, 애들 좀 봐 천사 같지 않아?”
“아, 그,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마리우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리우스, 왜 울고 있는 거야.”
“애들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게 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퍼서 그렇습니다.”
마리우스의 말에 주변이 숙연해졌다.
다들 브리타니아에 이어서 이번 반란 진압까지 연이어서 맡은 마리우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당장 어린 황제와 로마를 도울 사람은 마리우스뿐이었다.
“미안해 마리우스.”
“폐하께서 미안하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전부 올리브리우스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랑 제가 놓친 알라리크라는 나쁜 놈 때문인 것을요.”
마리우스의 거친 말에 에우독시아가 마리우스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으며 말했다.
“애들 들어요.”
“으음···.”
마리우스는 아이들을 유모에게 맡기고는 뒤로 돌아서서 병사들을 바라봤다.
지난 색슨족 토벌전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와 준 수만 명의 게르만 병사들은 잔뜩 지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병사이자 형제들이여, 나는 새로운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담담하게 시작된 마리우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은 마리우스를 쫓았고, 두 귀를 활짝 열고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대들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내게는 기쁨이었고, 또 영광이었다. 나는 새로운 전쟁터로 떠나지만, 자네들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그대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
마리우스가 말을 끝마치고서는 말에 올랐다,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무언의 인사를 나눈 마리우스가 대기 중이던 로마군의 대열 앞으로 치고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세르비우스가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각하.”
“준비는 끝났나.”
“예, 완벽합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막 출발하려고 하니, 게지카와 브레누스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태연하게 마리우스의 옆에 서면서 말했다.
“저희도 로마를 구경해보고 싶었습니다.”
“로마에서 귀한 장신구를 사가면, 부인도 용서해주겠지요!”
“그래? 그럼 실컷 구경해야지.”
마리우스는 사루스가 건네주는 투구를 받아 그대로 뒤집어쓰며 미소를 지었다.
******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서 출발할 무렵.
스틸리코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로 황급히 돌아온 콘스탄티우스는 아슬아슬하게 올리브리우스나 알라리크보다도 먼저 플로렌스(지금의 피렌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우스가 도착한 날 밤.
플로렌스에 고트족이 일제히 횃불을 드니, 어둠이 걷히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불꽃의 바다가 플로렌스를 가득 뒤덮었다.
“자, 장군···. 적이 들판을 가득 메웠습니다···!”
“나도 보고 있어.”
“태, 태어나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봅니다!”
성을 포위한 알라리크의 수만 대군이 함성을 지르는 통에 플로렌스의 병사들과 시민들은 밤잠을 설친 것을 물론이거니와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었다.
플로렌스는 부유하기는 했지만, 튼튼한 라벤나라던가 황도였던 메디올라눔에 비해서는 작은 편이었다.
거기에 플로렌스는 공성전을 치를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이 모든 것을 성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공성전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부터 말입니까?”
“그래, 빈집은 허물어서 공성전에 쓸 자재들을 확보하고, 시민들이 대피할 장소를 마련해둬라.”
“지원이···. 올까요?”
“글쎄···. 스틸리코 장군이라면 얼마나 오래 걸리든지 오시겠지···. 다만, 그때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가 문제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곳까지는 아무리 빠른 배로 달린다고 해도 보름은 있어야 합니다.”
“그곳의 일을 처리하고 오시려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석 달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석 달.
아득하게도 멀게만 느껴졌다.
콘스탄티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감에 빠질뻔했지만, 마음을 다잡으면서 침착하게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석 달이면 문제없다. 성벽이 높고 튼튼하니, 일 년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거야.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마음 단단히 먹도록.”
콘스탄티우스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병사들과 시민들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뚫리면 로마가 위험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콘스탄티우스는 검을 빼 들으며 소리쳤다.
“함께 로마를 지켜내자!”
“와 아아-!”
병사들의 함성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비해 작았지만, 그 열기만큼은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적을 뛰어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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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를 우회해서 곧바로 로마로 향하시지요. 제 동지들이 장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올리브리우스는 지금 플로렌스를 공격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신 알라리크를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이미 이탈리아로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무작정 로마로 들어갔다가는 우물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될 뿐입니다.”
“형님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도 숨구멍 하나쯤은 마련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만···.”
올리브리우스는 속이 탔다.
지금이야 원로원의 분노를 이용해서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야 했지만, 모름지기 정치라는 이름의 괴물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가는 물어뜯기기에 십상이었다.
한 달쯤 로마를 비워둔 지금.
로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진작에 벌어졌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올리브리우스는 답답했다.
“참으로 부유하고 아담하면서도 고고한 성이로구나, 참으로 내 마음을 홀리는 듯해.”
“형님도 그러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아타울프,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나를 위한 태양이 말이다.”
“로마의 태양은 진작에 져버린 지 오래지요.”
알라리크와 아타울프, 두 형제는 어슴푸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