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40/187)

양파의 노래 - 3

아칸이 처형을 위해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을 총동원해서 광장을 봉쇄하면서 시민들의 출입을 막았다.

아칸을 처형한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지만, 급한 대로 픽트족의 전사들까지 동원한 콘스탄티누스의 병사들에게 막혀 광장으로 가지 못했다.

텅 비어있는 광장을 바라보며 아칸은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에 병사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으나, 아칸은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배웅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아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발걸음은 더없이 쓸쓸했다.

평생을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위해 살아왔던 아칸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기나긴 삶이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짧은 기간 동안 확연히 늙어버린 아칸은 후련하게 웃으며 말했다.

“늙으면 죽어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처형대에서 아칸을 기다리고 있던 콘스탄티누스가 검을 뽑아 들으며 물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콘스탄티누스를 돌아본 아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단하구나···. 스틸리코, 당신도 그러신가?”

아칸은 입을 다물고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이윽고 콘스탄티누스의 기합 소리와 함께 아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

알라리크가 이제 막 노리쿰을 벗어나고 있을 무렵.

새롭게 편입된 게르마니아의 영토를 순찰하던 막시무스 장군은 국경을 향해 접근하는 고트족 군대와 마주쳤다.

“저건 뭐지?”

“야만족들인 것 같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겠나? 저들이 왜 이곳에 있냐는 말일세.”

“아, 그것도 그렇군요···. 마리우스각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고트족이라면 대부분 다누비스강 너머에 살 텐데, 이곳은 우리의 영토 깊숙한 곳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어.”

막시무스는 끝없이 늘어진 고트족 군대의 행렬에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22군단의 주둔지로 돌아갔다.

이날 막시무스가 보았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그리피넨시스로 전해지게 되었다.

“대규모의 고트족 침공군이 국경을 넘었다라···.”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무엇을 했기에 고트족이 영토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보고 한 번 없었던 겁니까?”

“막시무스 장군이 확인해본 바로는 올리브리우스가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통과시켰다고 합니다.”

“올리브리우스가?”

호노리우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폴로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올리브리우스가 그동안 우리 모두를 속인 겁니다. 겉으로는 스틸리코 장군을 지지하는척하면서, 뒤로는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숙부가 마리우스의 딱 절반만큼만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호노리우스의 말에 가우덴티우스가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지금부터 저들을 반란군으로 지정하고,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진압해야 합니다.”

“그러기엔 돈이 없습니다. 후원금을 받거나 돈을 빌리려고 해도, 그만한 돈을 빌려줄 사람이···.”

세르비우스가 흠칫하며 말을 멈췄고, 주변에 모인 다른 이들도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호노리우스를 바라보니, 활짝 웃고 있는 호노리우스가 말했다.

“마리우스한테 빌리면 되잖아.”

“폐하!”

“마리우스각하의 기둥뿌리마저 뽑으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랬다가는 올리브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전에 마리우스각하께서 먼저 들고 일어나실 겁니다!”

“마리우스각하께서 들고 일어나시면···.”

세르비우스는 조심스럽게 군사지도에서 게르마니아 위에 놓인 로마군 조각을 모두 치워내고는 적을 상징하는 검은 조각들을 올려놓았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군단이 사라지고, 새롭게 수십만의 적이 나타나는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여전히 방긋 웃을 뿐이었다.

“마리우스는 충성스러우니까 괜찮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반란군을 때려잡고 황도에 있는 황실 재산을 떼어주면, 마리우스도 이해해 줄 거야!”

“그럼 적들을 때려잡지 못하면, 애꿎은 각하의 재산만 날아가는 거로군요.”

“으음···. 그렇지.”

폴로가 이마를 ‘탁’ 쳤다.

“알라리크를 상대할 사람으로는 누구를 보내실 생각이셨습니까?”

“내가 직접 갈 건데?”

“가시려거든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폴로가 강경하게 나가면서 황제를 뜯어말렸고, 다른 이들도 호노리우스에게 애원하니 아무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황제라고 해도 뜻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이나 쌍욕이 오고가는 치열한 토론 끝에 인선이 정해졌다.

세르비우스, 폴로, 가우덴티우스, 막시무스 등등, 그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장군들이 토벌군에 합류했다.

그러자 이런 쟁쟁한 장군들을 지휘할 사령관이 문제였지만, 참여한 모든 장군의 만장일치로 마리우스로 결정됐다.

물론 당사자의 의견은 듣지도 않았고 말이다.

******

한편, 마리우스는 중국에서 건너온 향나무 상자에 비단으로 곱게 포장된 아칸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급격히 늙어버린 아칸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잠시 아칸의 얼굴을 둘러보던 마리우스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상자를 덮었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야.”

“시원섭섭하신 모양이군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소중한 이가 빠졌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용맹한 맹수라고 해도 이빨이 빠지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만도 못합니다.”

“그, 그렇군···.”

마리우스는 단순히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을 뿐이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알레피우스는 자기 생각까지 덧붙여서 뭔가 그럴싸하게 포장해냈다.

마리우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픽트족은 잘 지내고 있나?”

“생각했던 것보다 칼레도니아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상점 주인들은 그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고, 지역의 유지들은 그들에게 땅을 빌려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 콘스탄티누스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것이···.”

마리우스의 병사들이 차근차근 철수준비를 해가는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마리우스의 명령은 잊고서 그동안 고생했던 병사들을 위해서 조금 이른 축배를 들고 있었다.

아칸이 죽기 전까지는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나, 아칸이 죽고 마리우스의 철수도 확실시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것이었다.

대대로 브리타니아는 반쯤 버려진 땅이었고, 중앙에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고, 세금만 꼬박꼬박 내면은 돼지처럼 받아 처먹으면서 꿀꿀거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잔도 채워주겠나.”

마리우스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리우스의 모습에 콘스탄티누스는 크게 당황했다.

“가, 각하께서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자네가 술을 마시고 있다기에 나도 같이 마시려고 온 것이지.”

마리우스는 잔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채워봐.”

“각하, 아무리 그래도···. 부하들의 앞인데···.”

콘스탄티누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뒤로 뺐고, 마리우스는 그런 콘스탄티누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콘스탄티누스.”

“예, 각하.”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를 전하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각하라고 부르는군.”

“그, 그것은···. 하하하···.”

마리우스는 웃고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눈앞에 다시금 잔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두 번 말하지는 않겠네, 채워.”

“......”

마리우스의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술이 제법 들어간 상태인지라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보다. 자신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고자 했다.

“이보시오! 말이 너무 심···.”

백인대장쯤 되어 보이는 이가 탁자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으나, 순식간에 알레피우스의 손에 제압당했다.

“각하의 앞이다. 언행에 주의하도록.”

“끄으윽···.”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자네야말로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부하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법 화난 듯이 보였다.

마리우스는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추처럼 붉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가 픽트족을 잘 돌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들은 바로는 그들은 물건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한다던데···. 맞나?”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그런 일 하나하나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 그래···. 이거야 원···. 내가 또 바쁜 사람을 붙잡은 모양이로군.”

“그, 그건···.”

“그렇지? 응? 내가 바쁜 사람을 붙잡고 개지랄하고 있었어.”

마리우스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휘둘러 콘스탄티누스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품질이 좋은 유리는 아니었는지, 유리잔이 순식간에 깨져나가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이마에 상처가 났다.

“아악!”

“자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브리타니아를 맡기고 떠날 수가 없지 않은가.”

“장군!”

“아무리 마리우스각하라지만, 너무하신 것···.”

“어허, 가만히 있어.”

알레피우스가 검을 뽑아 들고 그들을 막아섰고, 이내 병사들이 들이닥치면서 순식간에 방 안에 있는 인원들을 제압했다.

마리우스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신음하는 콘스탄티누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콘스탄티누스, 내가 시킨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브리타니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관리하라는 거 말이야.”

“아,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끊은 지 며칠 만에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는 거지?”

“......”

“나는 두 번이나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네, 내 말···. 잘 알겠나?”

“예, 전하.”

“그래, 그럼 됐네.”

알레피우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던 마리우스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며 말했다.

“아, 참고로 내가 게르마니아로 돌아갔는데, 또 문제가 생겨서 브리타니아로 돌아오면···. 그때는 기대해도 좋을게야.”

마리우스의 말에 콘스탄티누스는 피가 흐르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마리우스와 휘하의 게르만 병사들은 다시금 배에 올라서 게르마니아로 향했다.

한창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사루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 콘스탄티누스 경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신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죽여야지.”

“아니, 각하.”

마리우스의 단호한 말에 사루스가 당황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그놈을 마주한 건 며칠뿐이지만 놈의 성정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어. 그놈은 마음속에 시커먼 생각이 가득해.”

“아니, 그 말씀은 놈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기에 이번 원정에서 브리타니아의 힘을 최대한 빼둔 것이야. 지금의 브리타니아는 인력이 씨가 마르고, 남은 인력이라고는 픽트족들뿐인데···. 놈이 제대로 관리할 수나 있을까?”

“그럼 더 큰 문제가 아닙니까? 픽트족이 브리타니아 전역을 정복할 수도 있습니다.”

사루스의 걱정스러운 말에 마리우스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픽트족? 콘스탄티누스조차 어찌 못한 이들이 브리타니아 전역을 도모한다? 웃기는 말이지.”

“으음···. 듣다 보니 그럴 듯합니다.”

“그럴듯한 게 아니라 완벽한 거야. 내가 오랜만에 머리 좀 굴린 결과라고.”

마리우스는 득의양양하게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리우스의 머리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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