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의 노래 - 1
론디니움의 낡아빠진 성문이 삐걱거리는 기분 나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칸과 그 외 떨거지들이 마중 나와서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시지요. 마리우스 장군.”
“이제는 각하라고 부르셔야지요. 반역자 아칸.”
“후후후···. 각하라···. 못 보던 사이에 직위가 많이 올라가신 모양입니다.”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시겠습니까?”
“우리 사이가 앉아서 하하호호 농담 따먹기 할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이 아니었습니까.”
“아직도 과거에 매여계시는군요.”
“흘러간 세월을 돌아보는 게 늙은이의 말년에 소소한 낙입니다.”
아칸은 역시나 아칸이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그를 조롱하면서 화나게 하려 했지만, 아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넘어갔다.
“이 늙은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론디니움의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에 와서 전부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포기라···. 애초부터 이룬 게 없는데, 무엇을 포기한다는 말씀입니까.”
아칸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세상에 달관한 신선을 보는듯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아니, 이을 게 아니지.
“인제야 자비를 구하시는 겁니까? 메디올라눔을 개박살내시고, 평화롭던 브리타니아를 혼란스럽게 하신 분이 말입니까?”
“제가 아니라 브리타니아의 속주민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지요.”
능글맞은 아칸의 얼굴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별말 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대충 내 의사를 눈치챈 병사 두 명이 뛰어나와서 아칸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그를 데려가 버렸다.
아칸은 끌려가면서도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각하! 판노니아에서의 지난 일들을 브리타니아에서 반복하시면 안 됩니다!”
아칸의 말에 주변에 모여있던 론디니움의 시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둘러싼 론디니움의 시민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하자, 거리는 금세 시끄러워졌다.
“판노니아의 일을 뭐야?”
“나는 저분의 이름도 처음 들어봤는데?”
“아칸님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무서운 일이 있었던 것 아냐?”
“막 사람들 죽이고 그런 거?”
“죽이기만 했겠어?”
“그럼? 뭐가 더 있나?”
“돈도 뺏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어우···.”
“어휴···. 생긴 건 여리여리하게 생겼는데, 사람이 뭐 저리 악독하담?”
“쯧쯧쯧···. 야만인들이 다 그런 법이지, 병사들도 야만인에 장군도 야만인이잖아?”
“그, 그럼 우리도 그렇게 되는 건가?”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론디니움의 시민들은 마리우스와 그의 병사들을 적대하고 있었고, 그런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전하, 주변 상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나도 보고 있어.”
“저 늙은이가 수를 쓴 것 같습니다.”
“쯧···. 만나자마자 혓바닥을 도려냈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진즉에 들고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으음···. 골치 아픈 일이구나.”
론디니움의 시민들은 병사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거나 병사들과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노려봤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아칸은 우리 개새끼였고, 굴러들어온 우리는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존재였다.
“우선은 시민들을 해산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전부 해산시켜!”
“해산!”
병사들이 시민들을 거칠게 밀치면서 해산시켰다.
시민들은 병사들에 밀려나면서 소란이 일어났다.
곧 아이 우는소리와 몸싸움으로 거리가 개판이 나버리니, 그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그래도 본대가 올 때까지는 기다리셔야 할 게 아닙니까?”
“후우···. 본대고 나발이고, 콘스탄티누스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전부 떠넘기고 우린 갈 길 가자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될 건 뭔가. 놈에게 아칸의 목을 베라고 한 뒤에 우리는 목만 챙겨서 떠나면 돼.”
마리우스는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반항하는 론디니움의 시민들을 둘러보면서 학을 뗐다.
그리고는 굉장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본대는 뭘 하기에 아직도 소식이 없어!”
“전서구는 가끔 오긴 하는데···. 길을 잃었다는 말이 대다수입니다.”
“시발···. 돌아가면 독도법부터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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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졌던 사루스와 게지카, 그리고 브레누스는 서로 호언장담하고 헤어졌지만, 결국에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만나게 되었다.
칼레도니아의 북쪽 끝을 찍고서야 결국 해안가를 따라서 행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오랜만에 만난 셋은 어색한 침묵으로 인사했다.
“......”
“흠흠···.”
셋은 거지꼴이 다 된 채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서로 거지꼴을 한 채로 이곳저곳 무너진 장벽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했다.
“돌고 돌아서···. 겨우 여기군요.”
“다들 고생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후···. 픽트족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얼마나 끈질기던지···. 하마터면 질뻔했습니다.”
“그놈들이 얼마나 엉겨 붙던지···.”
“몇 번 지더니, 아주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게···.”
“다들 똑같은 경험을 하셨군요.”
이들은 칼레도니아에서 도합 사십여 개의 부족을 박살 내고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칼레도니아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뤄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마리우스에게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문이 닫혀있군요···.”
“지키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낭패로군요.”
“날랜 병사 몇 명이 성벽을 넘게 해서 문을 열면 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다들 잔뜩 지쳤을 텐데···. 성벽을 넘을 힘이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벽 앞에 가로막힌 세 사람의 한숨 소리가 성벽을 넘을 정도로 커질 무렵.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숲속에서 수많은 픽트족의 무리가 나타났다.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세 사람은 또다시 나타난 픽트족의 모습에 질린다는 얼굴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후···. 마지막까지 귀찮게 구는군요.”
“진짜 징글징글 한 녀석들 같으니.”
“그 남쪽에 하이드라인가 뭐시긴가 하는 놈 같습니다. 머리를 잘라도 계속 튀어나오는 놈 말이오.”
“브레누스, 하이드라가 아니라 히드라다 멍청아.”
“그래, 너 잘났어! 게지카.”
“다투시는 건 적을 무찌른 뒤에도 늦지 않습니다.”
게르만 원정군이 본격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자, 오히려 픽트족의 무리가 크게 당황하더니, 그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늙은이가 손을 흔들면서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만두시오!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게 아니오!]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대에 픽트족의 말을 알아듣는 이가 없으니 원···.”
[모두 무기를 버려라! 무기를 버려!]
노인의 말에 픽트족이 무기를 던져버렸고, 그 모습에 사루스가 크게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설마···. 저 많은 인원이 항복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아무리 봐도 항복하러 온 것 같은데.”
[우리는 더 싸울 여력이 없습니다. 부디···. 우리의 항복을 받아주십시오.]
노인이 무릎을 꿇자,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픽트족의 무리 또한 노인과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무릎을 꿇으면서 항복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게지카와 사루스의 동공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고, 브레누스는 신기하다는 듯이 픽트족을 둘러봤다.
“다행이긴 하지만···. 전하께서 아시면···. 음···.”
“......”
******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일에 치여 정신없던 스틸리코는 이탈리아에 심어둔 감시역들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 주의 깊게 지켜보던 올리브리우스가 알라리크와 손을 잡고서 로마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제일 먼저 꽃병을 깬다더니···. 올리브리우스, 그 미친놈이 제대로 사고를 쳤군.”
“얌전한 고양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마리우스가 그러더군.”
“아···. 그러시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당장 이탈리아 방면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있는가?”
“그 인근에서 급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대는 합하께서 전부 끌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친위대와 친위군단도 게르마니아로 떠났고, 말입니다.”
부관의 말에 스틸리코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모양이군.”
“아, 그것이···.”
“뭔가?”
“그것이···. 폐하께서는 황도로 돌아오라는 합하의 ‘명령’을 거절하셨습니다.”
“뭐?! 거절?!”
스틸리코가 탁자를 힘껏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돌아오라고 전해! 기왕이면 마리우스의 병사들도 데려오라고 말이야!”
“어···. 음···. 합하···. 그것이···.”
“뭔가, 호노리···. 황제 폐하께서 뭐라고 했나?”
“폐하께서는 자신을 모욕한 합하께 진심으로 사과를 듣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으신다고···.”
그 말을 들은 스틸리코는 무서운 얼굴로 자리에 앉더니, 부관에게 말했다.
“조카가 많이 컸군.”
“하, 합하···! 황제 폐하께 그 무슨···.”
“조카를 조카라고 하지, 무엇을 그리 놀라는가.”
“모,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관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모른 체했지만, 스틸리코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기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던 어린아이였는데 말이야···. 이제는 내 말에 반기도 들고, 말이지···.”
“폐하께서도 많은 일을 겪으셨으니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테살로니키에서는 용맹하게 적을 굴복시키셨잖습니까.”
“그거야 운이 좋았지.”
“그뿐입니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마리우스 장군을 믿고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시면서 중심을 지키셨지요.”
“그것 또한 앓아누웠기 때문이야.”
스틸리코의 말에 부관의 입이 다물어졌다.
“애초부터 지금의 황제는 남의 도움 없이는 무엇하나 스스로 해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합하···.”
“어린아이의 투정 하나하나에 대응해줄 수는 없어.”
스틸리코는 지도를 둘러보더니, 이내 부관에게 물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들은 보고에서는 카르타고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고,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원정군의 일부를 떼줄 테니, 자네가 카르타고로 가게나, 가서 콘스탄티우스에게 전해주게.”
“뭐라고 말입니까?”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알라리크를 막으라고 말이야.”
“으음···. 고작 1만 명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네, 마리우스가 남하할 동안의 시간을 벌게 하는 것이지.”
“아···. 마리우스 각하는···.”
부관이 말을 흐리자, 여유롭던 스틸리코는 다급하게 물었다.
“왜, 마리우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황제 폐하께서 알려주신 바로는···.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브리타니아에 문제가 생겨서 그곳에 나가계신다고 합니다.”
“아···.”
스틸리코는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고는 다급히 지도를 살펴봤다.
손가락으로 판노니아에서 이탈리아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던 스틸리코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파, 판노니아에서 북부 이탈리아까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움직인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쯤 걸리겠지요.”
“콘스탄티우스가 잘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스틸리코의 한숨 소리가 점점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