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37/187)

늑대와 개의 시간 - 7

단상 위에 선 길도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 수천 개의 눈동자에 기가 질려버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옛날처럼 자신의 연설을 듣고자 모인 이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죽여라!!”

“저 개새끼!!”

“남편과 아들이 저 악마한테 죽었습니다···.”

“당장 찢어 죽여!!”

시민들은 격하게 흥분한 채로 돌과 썩은 음식 등을 길도에 던지고 있었다.

단상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이를 막아야 했지만, 애초부터 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길도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돌에 맞아서 이마가 찢어지며 붉은 피를 흘렸다.

피를 본 시민들은 더욱 흥분하며 소리쳤다.

“꼴 좋다!”

“죽어라. 이 새끼야!”

“아버지의 원수!”

시민들의 흥분이 한창 끌어 올랐다고 생각할 때쯤.

스틸리코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잔뜩 흥분한 채로 뭐든지 던져대던 시민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조용해졌다.

스틸리코는 단상 위에서 가만히 시민들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길도를 걷어차 버렸다.

그의 행동에 시민들이 환호하였고, 스틸리코는 가지고 있던 말채찍을 휘둘러 길도를 내리쳤다.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길도의 비명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으윽-”

“와아아아아!!”

“죽여라!!!”

하지만 길도의 짧은 비명은 시민들의 환호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의 비명이 커질수록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켜졌고, 피와 살점이 튈수록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한참 채찍을 휘두르던 스틸리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채찍질을 멈추더니, 시민들에게 소리쳤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여! 너희들의 희생과 고통을 로마는 잊지 않을 것이다!”

스틸리코는 그렇게 말하며 채찍을 집어 던지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길도의 목에 겨누었다.

“네 부하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될 것이며, 죽기 전까지 노동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핏값을 보상할 것이다.”

“노···. 동은···. 무슨···.”

“아직도 힘이 남아있었나 보군.”

길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면서 말했다.

“너희 로마놈들은 언제나 똑같았지···. 매번 뒤늦게 도착해서 우리를 위해서 싸운다는 둥···. 모든 속주는 평등하다는 둥···.”

“그게 뭐가 잘못된 거지.”

“너희들은 다른 속주들을 쥐어짜면서 그 모든 과실을 일부 로마인들이 전부 챙겨가지 않았느냐···!”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너도 그 과실을 잘 받아먹지 않았나.”

“그래서 너희들이 다른 속주들에 기생해서 피를 빨아먹는 것은 정당하다는 건가.”

스틸리코는 길도의 목에 댄 검을 천천히 움직여서 길도의 목을 그었다.

깊은 상처가 생기면서 피가 흘러나왔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길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스틸리코는 그런 길도를 단상 아래로 밀어서 떨어트렸고, 수많은 시민이 시체에 달려들어 린치를 가했다.

“알센산드리아 광장이 휑하군요. 예전에는 이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유령도시나 마찬가지야, 사람보다도 시체가 많으니 말이야···.”

스틸리코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를 묵묵히 바라보며 부관에게 말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어디쯤인가.”

“카르타고에서 주둔 중일 겁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내더니만, 결국에는 이런 모습이군···. 기대했던 내가 멍청했지.”

“그 친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부관은 콘스탄티우스를 옹호했지만, 스틸리코는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전쟁이란 건 그런 거야,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란 건 없어. 그놈이 뭐라고 했었나? 계획대로면 카르타고에서 길도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지.”

“그건···.”

“놈의 계획은 시작부터 실패했어, 유력가들이 그를 돕지 않은 것? 나 같아도 그런 풋내기를 어떻게 믿었겠는가.”

“합하, 콘스탄티우스에게 너무 혹독하신 것이 아닙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마리우스 같지는 않잖습니까.”

마리우스라는 말에 스틸리코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나는 그 녀석이 수행할 수 있는 임무를 줬다네, 그걸 행하지 못한 것은 녀석의 잘못이야.”

“모든 작전이 매번 성공할 수만은 없는 일인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게 군인이고, 시민들을 지켜야 하는 게 군인이네, 그런데 놈은 어땠나?”

“......”

“놈은 카르타고에서 느긋하게 시민들이나 때려죽이면서 시간을 보냈지, 길도가 리비아를 불태우고 알렉산드리아로 갈 때까지 말이야.”

그 사이에 시민들도 조금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눈물을 닦으면서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들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광장 한쪽에 마련된 임시 거주지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면서 부관에게 말했다.

“아비투스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잡았나.”

“성문을 연 사람 말입니까?”

“그래, 그 빌어먹을 새끼 말이야.”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죽었다니, 어쩌다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찾았을 때는 밟혀서 곤죽이 되어있더군요.”

“쯧쯧쯧···. 시체는 건졌나?”

부관은 고개를 저으면서 길도를 가르쳤다.

“분노한 시민들이 저렇게 조각조각 찢어버리는 통에 제대로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저런···. 슬픈 일이야 그렇지?”

스틸리코는 웃고 있었다.

******

항해는 순탄했다.

평소에는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미쳐 날뛰던 북해의 바다도 평소와는 다르게 잠잠한 것이 나들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진짜 나들이였으면 좋았겠다만···.”

지금 이 시각에도 황제는 안토니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놀고 있을 걸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반역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정도였다.

“곧 론디니움입니다.”

“그래? 지도 가져와 주겠나.”

굳건하게 성벽을 두른 론디니움은 브리타니아의 주도이긴 했지만, 요새의 성격에 가까웠던 카몰로두눔과는 다르게 해자가 없었다.

대신 남쪽을 템스강이 막아주고 있었으니 방어에 대한 부담이 조금 덜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상륙하자마자 바로 공성전을 치르는 건 무리겠지?”

“성에서 템스강을 살펴볼 수 있을 테니, 빠르게 성을 들이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잠시 고민하면서 지도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중에 한가지 이상한 게 보였다.

템스강에서 갈라져 나온 자그마한 강줄기가 도시안으로 뻗어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이 물줄기는 론디니움 안으로 흐르는 건가?”

“흐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론디니움 사람들이 주로 쓰는 모양이더군요.”

“이 물은 하수도인가 상수도인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으로 병사들을 침투시킬 수 있을까?”

“한번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템스강을 거스르긴 끝에 도착한 론디니움은 여태까지 봐왔던 어떤 도시들보다 작았고, 또 초라했다.

성벽 또한 오랫동안 관리가 되질 않았는지, 곳곳이 무너지고 어설프게 나무를 덧대 보수한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생각보다···. 허름한 성벽이로군.”

“아무래도 제대로 관리가 안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온다고 해서 급하게 보수한 모양인데···.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겠어.”

“어···? 전하 성벽 위를 보십시오.”

“성벽 위?”

성벽 위에서는 몇몇 병사들이 붉은 깃발을 내리고는 하얀 깃발을 올리고 있었다.

“백기···?”

“항복하려는 걸까요?”

“설마···. 아칸이 그럴 리가 있나.”

적의 백기를 보니 의심부터 들었다.

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또 무슨 수를 쓰려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일단은 자네가 가서···.”

알레피우스를 보내려고 했지만, 성벽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아칸의 모습에 마음을 바꿨다.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군.”

“예?”

“상대는 저항할 의사가 없다. 내가 앞장서서 병사들을 이끌 테니, 자네는 후방을 맡아주게.”

“전하, 적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함정이면···. 까짓거 당해주지 뭐!”

“예?!”

배가 물결 위를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자연스럽게 해안가에 닿았다.

“자, 가즈아!”

******

올리브리우스는 알라리크와 말머리를 함께한 채로 대군의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들판을 가득 뒤덮는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그 숫자도 어마어마했지만, 개개인의 무장상태도 로마군보다 떨어지는 곳이 없었다.

올리브리우스의 눈에는 그동안 봐왔던 어떤 군단병들보다도 더 근사하고 잘 훈련된 정예병으로 보였다.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이런 병사들이 있다면 스틸리코도 두렵지 않겠습니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노력과 인내심만 가진다면 어려울 일도 없지요.”

“약간의 노력과 인내심이라···. 좋은 말입니다. 저도 이날이 오기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지요.”

올리브리우스의 말에 알라리크의 한쪽 눈썹이 치켜세워지며 흥미를 보였다.

“무엇을 참고 기다리셨습니까.”

“하하하···. 장군처럼 부하들이나 형제의 복수를 하는 것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그저?”

올리브리우스는 하늘 위에서 쨍쨍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보는 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에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고, 제대로 된 형태조차 볼 수 없었지만, 올리브리우스는 만족했다는 미소를 지었다.

“제 사소한 욕심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그렇군요. 욕심이라···.”

알라리크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서는 생각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타울프, 네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남들에게 칭송받을만한 사람인가?”

“형님 정도면 고트족 최고의 왕이자 전사가 아니겠습니까? 단신으로 수십의 적을 박살 내고, 지략으로 수천 명을 몰살시키면서 부족을 풍요롭게 했으니 말입니다.”

동생인 아타울프의 칭찬에 알라리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부끄러워했다.

“네 입놀림이 요사이에 많이 현란해졌구나.”

“형님, 저는 사실만을 말했습니다. 형님께서는 부족민들을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으음···.”

“동생분과의 우애가 남다르신 것 같군요.”

가만히 있던 올리브리우스가 웃으며 말하자, 알라리크와 아타울프가 그를 돌아봤다.

갑작스럽게 두 형제의 시선을 받게 된 올리브리우스는 당황하며 물었다.

“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아닙니다. 그저 생각을 좀 했을 뿐입니다.”

“그러시군요···.”

“이제 강을 건넜는데, 이탈리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십니까?”

“저는 이 정도로 대규모의 부대를 이끌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의 행군속도를 생각해봤을 때, 두어 달쯤이면 아퀼레이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두 달이라니···.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닙니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타울프,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이번 행군은 나들이와 같을 테니 말이야.”

“하하하···. 맞습니다. 스틸리코도 이제야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테니, 돌아오려면 몇 달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아타울프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올리브리우스에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우리에게 했던 제의는 지켜지는 게 맞겠지요?”

“어떤 제의를 말씀하시는지요···?”

“전부 말입니다. 이번 로마행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로마의 시민권과 정규군으로의 편입을 보장해주고, 형님께는 마리우스와 같은 직책을 내리겠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 말고도 섭섭지 않은 소정의 ‘보상’에 대한 것도 있지요.”

두 형제의 말에 올리브리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로마의 대귀족인 제 신용을 믿어보시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를 속이려는 거라면···.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속이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올리브리우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야만인 새끼들한테 줄 땅이나 시민권 같은 건 없다. 어디서 출신도 모를 벌레들에게 내 권한을 나눠줘? 내가 황제가 되기만 하면 네놈들은 다시 변방으로 쫓겨나갈 거다.’

알라리크 또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하겠지, 우리가 로마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거만하게 굴지는 두고 보자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지만, 둘은 말머리를 함께하면서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꽤 멀고 험난한 길이 되겠지만, 모두 행복한 꿈을 꾸면서 로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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