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35/187)

늑대와 개의 시간 - 5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알렉산드리아의 자랑인 도서관이 불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시민이 떼죽음을 당했고 수많은 거주지가 불타올랐다.

물론 길도의 병사들도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갈리아 군단에 쓸려나갔다.

“빨리빨리 걸어!”

“이 새끼가 어디서 요령을 피워.”

수만 명에 달하던 길도의 병사들은 고작 사천 명만 살아남아 포로로 잡혔다.

이들 중 대다수는 길도의 휘하에서 스틸리코의 상륙을 막다가 사로잡힌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죽여버렸다.

도시 곳곳에서는 시체가 넘쳐났고, 거리에 흐르는 피에 발목이 잠길 정도로 알렉산드리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완전히 끝나버렸군.”

“총독과 주교, 의원들까지 모조리 죽었습니다. 처음에 탈출한 몇몇 의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 도시를 정상화하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돌아버리겠군.”

스틸리코는 알렉산드리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해봤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역유지들이나 의원들에게 맡기려고 해도 그들 또한 대부분 죽거나 몰락했고, 군정을 실시하려고도 해봤지만,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고 이번 원정에서 별다른 활약도 보여주지 못하고 카르타고에 발목이 묶여있던 콘스탄티우스에게 맡기기에는 불안했다.

“마리우스를 다시 불러야 하나···.”

잠시 그런 고민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마리우스는 스틸리코가 다루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겉으로는 자신의 파벌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마리우스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으로 탄생한 현시점에서 그 녀석을 건드려봤자 좋아질 게 없었다.

“합하, 생존자 수색과 화재진압이 끝났습니다.”

“수고 많았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예, 도서관에 있던 의원이 말하기를 이 도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전염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알렉산드리아의 전투 당시에 도시 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아서 병사들이 크게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증세가 심각한 이들은 배에 태워서 다른 곳으로 보내 치료받게 했다는군요.”

“아니, 그게 무슨···!”

스틸리코는 부관의 말에 정색하며 소리쳤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미친 짓을 벌였단 말인가!”

“듣기로는 그렇게 전염력이 높지 않아서 했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병사들의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고, 시체는 전부 태워버려!”

“예, 알겠습니다.”

“환자가 발생하면 격리구역을 설정해서 전부 그곳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도 잊지 말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배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도 알아 와!”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스틸리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합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들어오라고 해.”

총독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잿빛 머리칼에 단아하면서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코와 총명한 두 눈을 반짝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던 스틸리코도 그녀의 미모에 잠깐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로마의 섭정이신 스틸리코 합하···. 맞는가요?”

“아, 실례했군. 내가 스틸리코라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그게···.”

히파티아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말했다.

“혹시, 도시를 재건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그건 아직 논의된 바가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시면 알겠지만, 도서관과 등대를 제외한 대부분 건물이 박살 나버렸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히파티아는 실망했다는 얼굴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스틸리코가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지난 전투로 도서관이 조금 망가졌어요. 다행히도 안에 있는 장서들은 무사한데···. 빨리 건물을 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거에요.”

“도서관을 후원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부탁하려니···.”

스틸리코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듣자 하니 게르마니아에 유능한 선생들이 필요하다던데···. 관심 있나?”

“게르마니아···?”

******

“마리우스···.”

“또 뵙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죽이겠다는 듯이 말이다.

“네놈이 종종 미친 짓을 벌인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친놈일 줄 몰랐네.”

“알면서도 당한 놈이 멍청한 거 아닐까?”

“후우···.”

헤라클리우스는 피를 많이 흘렸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아, 알면 빨리 끄, 끝내주지 그래···?”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아, 보통 이럴 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물어보지 않나?”

“나, 남길 말이라···.”

떨고 있던 헤라클리우스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 나이 마흔다섯에 로마의 전역을 누비면서 일생을 로마와 함께했다! 비록 마지막에는 힘과 지혜가 부족하여 이런 결과가 되었지만, 아쉽지는 않다.”

잠시 기침을 하면서 숨을 고른 헤라클리우스가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내 죽음이 로마의 끝은 아니지만···. 내 사후에 휘청거릴 로마를 생각하니, 조금은 후회도 들고 아쉽기도 하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자네가 남아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다음 생에도 군인이 되신다면, 이번에는 정치에서 관심을 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장군께서는 사람 보는 눈이 영 아니거든요.”

“참고하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라클리우스의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고통 없이 깔끔하게 끝난 것이었다.

“목은 깃대에 높이 꽂아서 적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시신은 잘 수습해줘라.”

“예.”

헤라클리우스의 목이 높이 걸리고, 나와 병사들은 당당하게 카물로두눔으로 진군했다.

한창 피 터지게 싸우고 있던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뒤편에서 나타난 병사들의 모습에 동요했고, 깃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헤라클리우스의 머리를 보고는 경악했다.

“자, 장군!”

“장군께서 돌아가신 건가···?”

“이제 어떻게 하면···.”

병사와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당황했다.

그들을 지휘해야 할 지휘관이 사라진 지금 시점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들이라면야 별문제 없이 전투를 이어갔겠지만, 이들 중의 대부분은 신병이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6군단의 병사들도 제대로 된 경험이나 교육 없이 장교나 부사관에 오른 것인지라 그 혼란은 대단했다.

“하, 항복해야 하나?”

“어쩌지···?”

그들은 자신들이 수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로 떨고 있었다.

“이 멍청이들아! 항복은 무슨 놈의 항복이야!”

“그라시아누스?”

그때, 6군단 출신의 병사 하나가 주변 동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말했다.

“어차피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장군이 죽었다고 벌써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그건···.”

“그렇긴 하네···?”

우물쭈물하는 백부장과 장교들을 제치고, 그라시아누스가 앞장서서 병사들의 앞에 서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이 조금은 진정되어갔다.

“쯧쯧···. 쉽게 가기는 글러 먹었구먼.”

“맨 앞에 선 병사가 용맹해 보입니다.”

“아무리 용맹해봤자, 나와 자네들만 하겠는가?”

“그건 그렇지요. 히히···.”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진득하면서도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는 것이, 아무래도 싸움이 쉽지 않을 듯싶었다.

“어떻게 한 번도 쉽게 가는 법이 없냐.”

“저, 전하 저기를 보십시오!”

신세를 한탄하고 있으니, 곁에 있던 병사 하나가 손가락으로 카물로두눔 인근의 강을 가르치며 말했다.

내 시선도 병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그곳에는 줄지어서 강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보였고, 그 배들의 선미에는 누런 소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원군입니다!”

“인제야 왔군.”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카물로두눔의 병사들과 내 곁에 있던 병사들이 동시에 환호했고, 잠시나마 다시금 뭉치는 것처럼 보이던 적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병사들을 독려하던 그라시아누스도 새로운 지원군의 모습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자니, 이윽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

“이건 또 뭐야 싯팔!”

정작 그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고작 천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

한편, 게르마니아에서 한량생활을 하고 있던 호노리우스는 오늘도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시민들을 마주했다.

이를 호위해야 하는 폴로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호노리우스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여기는 설탕이 굉장히 싸네.”

“마리우스 각하께서 새롭게 사탕을 만드시는 법을 알아내셔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구나~”

호노리우스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탕공장을 돌아다니던 중에 흥미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건 버리는 거야?”

“예···. 이건 못 쓰는 건지라···.”

“그럼 나 줘!”

호노리우스의 말에 폴로가 뜨악하며 물었다.

“곰팡이가 잔뜩 핀 것은 어디에 쓰시려고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몰라! 그래도 재밌어 보이잖아.”

“아이고···.”

호노리우스가 한창 흥겹게 곰팡이가 슬은 당밀들을 수거하고 있을 무렵에 검은 갑옷을 입은 친위대 병사 한 명이 급하게 뛰어와 폴로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병사의 말을 들은 폴로의 표정은 세 번 정도 바뀌더니, 마지막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슬슬 라벤나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스틸리코 장군께서 출정하시면서 폐하의 복귀를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라는 말과 명령이라는 말에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명령이라고?”

“...예,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더군요.”

“숙부께서 요사이에 한가지 잊으신 모양이군.”

“폐하···.”

“로마의 황제는 숙부가 아니라 나인데 말이야···. 몇 년 동안 나 대신에 일 좀 했다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건가? 이제는 나보고 오가라 명령이라···. 허, 참으로 내 꼴이 우스워. 안 그래 폴로?”

폴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노리우스는 할 말을 계속했다.

“누가 보면 로마의 황제가 내가 아니라 숙부인 줄 알겠어? 이야, 황제한테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니 대단하지 않아?”

“하인들에게 짐을 정리해두라고 말해두겠습니다.”

“하지 마.”

호노리우스는 전에 없이 무서운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내가 갈 때는 내가 정해.”

“......알겠습니다.”

******

“폐하나 섭정 공이나, 전부 황도를 비워버리면 도대체 업무는 누가 처리한다는 겁니까?”

“심마쿠스 경은 오늘내일하고 있고, 의원들은 사분오열하여 정치적인 구심점이 없으니···. 이거야 원···.”

“올리브리우스경,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시는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섭정께서 황제에게 복귀를 명령하는 전령을 보냈다는 것만 얼핏 들었는데···.”

올리브리우스의 말에 다른 의원들이 화들짝 놀라고 말했다.

“스틸리코 그 인간은 정신이 나간 겁니까? 어떻게 황제 폐하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아직 확실한 게 아니잖습니까, 올리브리우스 경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일 수도 있지요.”

스틸리코를 지지하는 의원들의 말에 올리브리우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서 확언할 수 있소이다.”

“으음···.”

“쯧쯧쯧···. 섭정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전쟁하려고 세금까지 추가로 걷어가지 않습니까?”

“그뿐이겠습니까? 매번 우리의 약점을 쥐고서는 돈을 뜯어 가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로마 원로원에 모인 의원들은 늘 그렇듯이 스틸리코에게 쌓여있던 불만을 토로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험담을 늘어놓다가 끝나고는 했는데, 그날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스틸리코 그놈은 우리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우리를 우습게 아는데 알아봤자지요.”

“그렇지요···.”

뒤바뀐 원로원의 분위기에 평소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의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올리브리우스는 그런 의원들에게 웃으며 말하길···.

“모두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화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제일 잘하는 걸 해야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