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34/187)

늑대와 개의 시간 - 4

호노리우스는 고민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 국정운영에 대한 고민보다는 안토니나에 관한 생각뿐이었지만, 가끔은 새로운 취미에 대해서도 고민하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하는 일도 새로운 놀이의 일환이었고 말이다.

“폐하, 이게 전부 무엇입니까?”

“음···. 대장간을 좀 크게 만들어봤어.”

사람 키의 여덟 배는 족히 될법한 거대한 건물의 모습에 폴로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리고 그 건물의 용도가 대장간이라는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말이다.

“폐하, 대장간이 크다고 해서 강철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르는 소리, 마리우스가 모름지기 크면 클수록 좋다고 했어.”

“그분은 워낙에 그런 분이니···. 잠깐만요···. 설마 이번에도 마리우스 각하의 돈을 쓰신 겁니까?”

“아니, 이번에는 주변에 남는 거로 만든 거야.”

호노리우스가 만든 대장간에는 커다란 기둥이 두 개 있었는데, 이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쉴 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폐하! 폐하!”

“성공했어?”

“한번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굴이 온통 시꺼메진 대장장이가 주머니에 고이 넣고 있던 쇳조각을 꺼내더니 두 손으로 호노리우스에게 건넸다.

호노리우스는 반짝이는 강철의 모습에 매료되어 손에 검댕이 묻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쇳조각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폴로, 이것 좀 봐 반짝거려!”

“괜찮아 보이는 강철이긴 하군요.”

“품질 하나만큼은 노리쿰의 강철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습니다.”

“굉장해!”

호노리우스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안에 있는 강철을 유심히 살폈고, 그 모습에 폴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폐하, 그거 만드는데 얼마나 걸린 겁니까?”

“글쎄···. 한 석 달쯤 걸렸지.”

“이야, 마리우스 님은 좋겠군요. 폐하께서 게르마니아에 이런 대장간도 만들어주고, 말입니다.”

“으음···.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문제요? 무슨 문제 말입니까?”

호노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거 하나 만든다고 마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강철 원석이랑 검은 돌을 몽땅 써버렸어.”

“으음···. 원래 어느 정도나 있었기에 그러십니까.”

호노리우스는 연신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대장간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면서 말했다.

“저만한 창고 다섯 개정도.”

“......?”

폴로는 잠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내 호노리우스의 말을 이해하고서는 입을 떡 벌리면서 경악했다.

“그, 그렇다는 건···. 게르마니아에서 쓸 강철들을 전부 날려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

“그 많은 양을 어디에 쓰신 겁니까?!”

“저거 만드는 데 썼다니까 그러네, 이 검은 돌을 회색 돌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고 절반쯤 날려 먹었고, 이 회색 돌로 강철을 만든다고 나머지를 싹 날려 먹었어.”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로마의 역사에 길이 남으실 위대한 발명을 해내신 겁니다!”

대장장이는 애써 황제를 변호했지만, 폴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망했군, 본토에 있는 재산도 전부 털어 드시더니···. 이제는 각하의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빼먹으려고 하시는군요.”

“나중에 내 재산에서 조금 떼주면 되잖아.”

“그걸 전부 스틸리코 장군께서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관리하지 뭐.”

호노리우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용광로 하단에 연결된 관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쇳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뭐지?”

“아, 그건 찌꺼기들입니다. 쓸모가 없어서 대부분 버려집니다.”

“그래? 좀 아까운데···.”

“아깝기는 하지만, 쓸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아 보관하기도 어렵습니다.”

“으음···. 일단 모아둬, 나중에 쓸모가 있을 수도 있잖아.”

“예, 폐하.”

폴로가 뒤에서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호노리우스의 눈은 쇳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

한편, 에우독시아는 오랜만에 안토니나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어느덧 기어 다닐 수 있게 된 바루스는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세상 구경을 열심히 하였고 말이다.

“엄마, 아무래도 남자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황제 폐하 말이에요.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니까 조만간에 결혼하신다던데요.”

“그래? 그거 잘됐구나.”

“잘되기는요···. 나는 몇 년이나 기다렸는데···.”

안토니나는 축 늘어진 듯한 울적한 목소리로 에우독시아에 투정을 부렸지만, 그녀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안토니나,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는 거니.”

“폐하께서는 저를 가지고 놀려고 그러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되면 너희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니?”

잠시 생각하던 안토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나라가 뒤집히겠죠.”

“폐하께서도 그걸 잘 알고 계실 거야. 그런데도 너한테 관심을 보인다는 건···.”

에우독시아는 안토니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폐하의 마음은 이미 너를 향하고 있다는 거란다.”

“그럴까요?”

“그럼, 내가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라도 있었니?”

“그건 그렇지만···.”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는 게 능력이야. 네 아버지도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붙잡지 않았니.”

******

“씨발, 그냥 집에서 편히 쉴 걸 그랬어.”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적의 강력한 공세가 끝나고서 드는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게르마니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라는 말이 있듯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몰려드는 적군과 드잡이질을 하면서 본대를 기다릴 뿐이었다.

“사루스, 게지카, 브레누스···. 셋이서 어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라도 맺은 건가? 왜 이렇게 늦는 거지?”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옛날, 길을 잃은 세 명의 바이킹처럼 길이라도 잃지 않은 이상에야 진즉에 도착해서 론디니움까지 진군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약속한 시각보다 너무 늦는 것 같습니다.”

“게르마니아로 보냈던 전령은 돌아왔나?”

“예, 그런데 본대는 저희가 떠나고 이틀 뒤에 출발했다고 했습니다.”

“이틀? 고작 이틀 거리인데,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가 있나?!”

“아마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길을 잃어?”

“사고가 났다면은 그 잔해물이라도 해안가로 밀려왔겠지만, 그런 것이 없으니 길을 잃은 게 맞겠지요.”

“으음···.”

아무래도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이다 보니 생긴 문제 같았다.

이 시대의 항해는 대부분 연안 항해에 의지하고는 했고, 대양항해는 잘 시도되지 않았다.

나침반도 없던 시절이었고,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는 것도 밤에나 가능하니 충분히 길을 잃을만했다.

“너무 서둘렀어···. 조금만 더 기다렸어도 될 문제였는데 말이야···.”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별문제가 없다면 금방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고민했다.

지금처럼 성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하고 말이다.

본대와의 연락이 잘 되지 않고 있는데, 이대로 앉아서 주야장천 성만 지키고 있겠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쯧···. 아무래도 성을 버려야겠다.”

“버린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밤을 틈타서 병사들을 조금 빼놓고, 저들이 성을 공격할 때쯤에 뒤를 치는 거다.”

“적은 대군이고, 아군은 적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알레피우스는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알레피우스, 내가 누구지?”

“예?”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거야···. 게르마니아의 지배자 아닙니까.”

“그래, 내 이름은 마리우스.”

투구를 눌러쓰며 말을 이었다.

“실패를 모르는 남자지.”

******

다음날.

헤라클리우스는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정도면은 손쉽게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벌써 몇 주째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에야말로 성을 넘는다.”

수십 번이나 반복한 말이었고, 매번 결과는 비슷했지만, 헤라클리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틸리코가 이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본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반복되는 소모전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날은 조금 달랐다.

“장군! 병사들이 성벽을 넘고 있습니다!”

“음···? 넘고 있다고?”

“예! 아군 병사들이 용맹하게 성벽을 넘는 게 안 보이십니까?”

잔뜩 흥분한 부관의 말에 헤라클리우스가 성벽을 바라보니, 수많은 병사가 성벽 위에서 싸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착실하게 하나둘씩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갔고 성벽 위에서는 격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마리우스···. 마리우스가 안 보여!”

“다른 곳에서 싸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놈은 제일 취약한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단 말이야!”

“아···!”

“이봐 헤라클리우스, 나를 찾고 있나!”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헤라클리우스의 진형 뒤로 마리우스와 수백의 게르만 전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흉흉한 기색을 내비치면서, 금방이라도 공격해올 듯한 기색이었다.

“배짱도 좋구나,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나오는 것이냐!”

생각과는 많이 다른 헤라클리우스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물론 숫자야 헤라클리우스가 더 많았지만, 그래봤자 얼마 차이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헤라클리우스가 기세 좋게 검을 뽑아 들고서는 소리쳤다.

“안 그래도 네놈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제는 알아서 찾아오는구나!”

“내 앞에서 검을 빼 든다고? 혹시 머리가 맛이 간 건가···?”

“미치긴! 지난번의 일은 잊지 않았다!”

“으음···. 나름대로 이름을 좀 날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로군요.”

“마지막으로 하늘이나 많이 봐두거라, 네가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의 색은 기억해야 하지 않겠나.”

“흐음···.”

헤라클리우스는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반면에 내 병사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갖 괴성을 지르면서 적을 위협하고 있었다.

“마리우스를 죽여라! 놈을 죽이는 자는 백부장으로 진급시켜 주고, 금화 서른 개를 지급하겠다!”

헤라클리우스의 말에 주춤거리던 병사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내 목숨값이 고작 서른 개?”

“저, 저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같으니···!”

반면에 아군은 두 눈에서 불꽃을 튀기면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목줄에 묶인 도사견처럼 내 눈치를 살피던 병사들은 내가 검을 뽑아 들자마자 명령도 다 듣지 않고 뛰쳐나갔다.

“끼요오오오옷!”

“공격하라! 내가 앞···?”

“죽어!!!”

“마리우스 전하를 모욕한 놈들을 죽여라!!!”

눈을 번들거리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색슨족 병사들의 모습에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무리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고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야만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견디기에는 무리였다.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헤라클리우스와 부관이 병사들을 다독여봤지만, 신병들이 대다수였던 병사들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끼요오오오옷!”

그리고 색슨족 병사들이 온몸을 던져오며 대형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자, 진형은 순식간에 박살 나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병사들이 밀려나거나 넘어져 버렸고, 대열은 붕괴했다.

곧 난전이 벌어졌고, 이런 전투에 익숙지 않았던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도살장에 들어온 소들처럼 차례대로 죽었다.

거기에 마리우스까지 난입하여 단번에 여러 명의 병사를 베어내자, 사기가 바닥을 찍은 병사들은 순식간에 거추장스러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 장군!”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적이 도망칠 때까지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부관이 나름대로 열심히 저항하고 있었지만, 쓸모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장군, 물러나시지요!”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걸 알면서도 항복을 안 하니 원···.”

“마리우···!”

바람처럼 헤라클리우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오른손과 오른 다리를 베어서 자세를 무너트렸다.

헤라클리우스는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한 채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았고, 곁에 있던 부관이 그를 도우려 했지만, 뒤로 몰래 다가온 병사의 칼에 숨이 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