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개의 시간 - 2
전투가 점점 길어질수록 병사들은 지쳐만 갔다.
기를 써서 성벽을 기어 올라가면, 그 위에서는 색슨족 병사들과 마리우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이 성벽을 넘어서 성문을 열려고도 시도했지만, 말 그대로 시도에서 끝났다.
“한 명이 올라오면 세 명이 달라붙어! 죽일 생각보다는 밖으로 떨어트리는 데 주력해라!”
“화살을 아끼지 말고 계속 쏴라! 지친 병사들은 다른 병사와 교대하는 것을 잊지 말고!”
“아무리 급해도 주변에 있는 동료들을 챙기는 걸 잊지 마라! 급할 때 네놈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게 동료다!”
정신없이 성벽을 뛰어다니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적들이 많이 넘어와서 위태로워 보이는 곳에서는 검을 휘두르면서 직접 싸우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적들이 성벽을 넘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성벽을 틀어막아야 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성벽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켜서 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전하! 적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싸움이 치열하니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뒤로 물러나시지요!”
“물러나기는 무슨···. 어차피 저놈들도 준비가 덜 돼서 공세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는 없어!”
그 말대로였다.
내가 고통스러우면 적은 몇 배는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있듯이, 헤라클리우스 부대의 피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성벽을 제대로 올라가는 병사들보다는 미처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장군,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병사들을 뒤로 물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으음···. 자네 말이 맞네, 일단은 병사들을 물리고 새롭게 준비를 해야겠어.”
머릿속을 꽉 잡고 있었던 분노가 차갑게 식은 헤라클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내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고, 퇴각 나팔이 울려 퍼졌다.
“후퇴! 이대로 물러난다.!”
“부상자 챙겨서 후퇴한다.!”
“궁수들은 병사들을 엄호해!”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천천히 성에서 물러났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은 퇴각 나팔소리에 무기를 집어 던지거나, 줄 하나에 의지해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와아아아-!”
“전하···!”
“오늘은 어떻게든 무사히 지나갔네.”
성벽의 난간을 짚고서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적들이 물러나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부상병들이 신음하는 모습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다른 쪽들의 상황은 어때.”
“대부분의 공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혹시 모르니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적이 물러나고 나니 긴장이 풀려, 빵빵하게 부풀려져 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건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주변의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몸을 기댄 채로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야! 본대 녀석들은 어디서 뭘 하기에 왜 이렇게 늦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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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지카와 브레누스, 그리고 사루스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리를 맞대고서 대책을 의논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럼 여태까지 어디로 왔다는 말입니까?”
“원래 도착해야 할 카물로두눔보다 훨씬 북쪽에 도착한 것 같은데···. 지도를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브레누스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지금 전하께서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텐데, 당장이라도 배를 타고 남쪽으로 다시 내려갑시다!”
“이봐 브레누스! 지금 멀미로 앓아누운 병사들이 몇 명인 줄 알고서 그러는 건가!”
“멀미가 뭐가 대수라고···.”
“그러는 자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미로 죽을뻔하지 않았나.”
“그건···!”
이를 지켜보던 사루스가 둘을 말리면서 말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크흠···.”
“말해보시지요.”
“일단은 주변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 것 같으니, 멀쩡한 병사들을 추려서 정찰병들을 보낸 뒤에 육로를 통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루스의 말에 브레누스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가 더 소요되겠지요.”
“그동안 전하께서는 적의 맹공을 견뎌내셔야 하겠군요. 부상도 당하신 분이!”
“브레누스 경, 너무 각하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각하께서 오천 명의 병사들 데리고 가셨으니, 브리타니아에 수십만의 적군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에야 무사하실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저는 사루스 경의 충성심에 의심이 드는군요.”
게지카 또한 브레누스의 편을 들며 말했다.
“저도 브레누스의 말에 동의합니다. 지금 각하께서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느긋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느긋한 게 아니라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이대로 병사들을 움직여서 급히 합류한다고 해도, 이 병사들이 도움이나 되겠습니까?”
사루스는 곳곳에서 멀미로 신음하는 병사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르치며 말했다.
“게르만 부족들의 용맹한 전사들이 땅이나 빌빌 기어 다니는 상황인데, 이런 상태로 행군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건···. 뭐···.”
“그리고 작전 중에 잠깐 일정이 어긋날 수 있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병사들을 푹 쉬게 하면서 본래의 체력을 찾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브레누스와 게지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루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각하를 완전히 버려두자는 말은 아닙니다. 회복이 빠른 병사들을 따로 배에 태워서 보내고, 나머지는 천천히 내려가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야···.”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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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그, 그렇지? 사실 나도 나들이는 별로야.”
매일같이 실무진들이 브리타니아의 향후 정세와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 대란에 집중하고 있을 때.
호노리우스는 안토니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가셨는데, 제가 어떻게 놀고만 있겠어요? 저도 뭔가 도울 일이 있을 거예요.”
몇 년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온 안토니나는 에우독시아와 테르만티아의 교육 속에서 한 마리의 백조처럼 단아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전쟁터로 떠난 아버지를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호노리우스는 애가 탔고, 그런 그들을 마리우스의 부인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쟤가 뭘 잘못 먹었나.”
“잘못 먹기는요···. 최근에 아멜리아 양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물이든 것 아니겠어요?”
“어머나, 안토니나가 저보다는 큰어머니를 많이 따르기에 조금 섭섭했는데···.”
“그래요? 요새는 제게 인사도 안 오길래, 저는 저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지 뭐에요~”
“그럴 리가요. 매일같이 조잘대는 게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호노리우스가 안토니나의 팔목을 붙잡자, 다시금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폐하께서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아버지를 전쟁터로 보낸 게 폐하 아닌가요.”
“아니, 그건···. 마리우스가···.”
호노리우스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안토니나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던 호노리우스에게 코프루스가 조심스럽게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이건···?”
코프루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호노리우스가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거무튀튀한 덩어리들이 있었다.
“이건, 뭐지?”
“뭐가요.”
“아니, 이걸···.”
“사탕이네요? 저 주시려는 거에요?”
“어? 음···. 그렇지···?”
안토니나는 설탕 덩어리를 입에 집어넣고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가져오신 거예요?”
“응? 그러게 말이야.”
“그게 뭐예요.”
“일단 천천히 걸을까? 날이 좀 추워서 말이야.”
“음···. 좋아요.”
아그리피넨시스 인근의 강가를 거니는 두 남녀를 뒤로한 채로 코프루스는 에우독시아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전해드렸습니다.”
“수고했어요.”
“언제 그런 걸 준비하셨어요?”
테르만티아의 말에 에우독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는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하거든요.”
“그러시겠죠,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살펴 가세요.”
테르만티아가 커다란 배를 감싸면서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도시로 돌아가 버리자, 에우독시아는 강가에 앉아서 바루스에게 주변을 보여주면서 속삭였다.
“아가야, 보이니? 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네 땅이 될 거야···. 모두 네 이름을 칭송하면서, 네 말 한마디에 울고 웃겠지···.”
“아우우우···.”
“그래, 너도 좋지?”
바루스는 어머니의 미소에 화답하듯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가야, 부디 아무 일 없이만 자라다오···. 뒤는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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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과 해류를 제대로 탄 스틸리코의 함대는 불과 열흘 만에 이탈리아의 남단에 있는 도시 크로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정석적인 방법이라면 동방의 해안가를 경유하면서 항해하거나, 방향을 꺾어서 북아프리카의 해안가를 따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스틸리코는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알렉산드리아까지 직행한다.”
“합하, 이대로 물길과 바람길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없다. 알렉산드리아가 얼마나 더 오래 버틸지도 모를 일이니 최단 거리로 가는 게 맞아.”
“바다 한가운데서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함대가 뿔뿔이 흩어질 수도···.”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부대가 흩어지느니 마느니 하는 건가? 로마의 해군이 고작 그 정도 수준이었나?”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저희는 연안 항해 말고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부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 스틸리코는 이마를 '탁' 치면서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후우···. 그럼 이렇게 하지, 일리리쿰과 그리스의 해안가를 따라서 크레타섬에 도착한 뒤에 물자를 재보급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지.”
“뜻대로 하시지요.”
스틸리코의 함대가 돛을 활짝 펴고 이탈리아를 떠날 때쯤에 카르타고에 있던 콘스탄티우스도 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스틸리코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과 이탈리아를 막 벗어났다는 소식을 동시에 받은 콘스탄티우스의 눈동자가 좌우로 떨렸다.
“당장 병사들 불러모아!!!”
“장군,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스틸리코 장군께서 알렉산드리아로 출병하셨다는 소식이다! 우리도 뒤처져서는 안 돼!”
콘스탄티우스의 말에 부관이 물었다.
“섭정공께서 몸소 출전하셨다면, 승리는 따놓은 일이 아닙니까? 굳이 우리까지 출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다! 합하께서 손수 알렉산드리아를 구원하시면, 그동안 근처에도 못 간 나는 뭐가 되겠는가?!”
“아···. 그런데 이대로 떠나도 되겠습니까?”
“문제 될 거라도 있나?”
“지금이야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저희가 카르타고의 시민들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대로 물러나 버리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