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개의 시간 - 1
알렉산드리아는 지난 몇 달간의 공성전으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도시를 감싸는 외벽은 곳곳이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성문 또한 이곳저곳 덧대놓은 탓에 원래의 모양을 잃은 지 오래인지라, 지금은 여닫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은 결국 도시를 지켜냈고, 길도의 병사들은 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러니까, 우리가 성문을 연다면은···. 목숨을 살려주고 재산도 보전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금은보화를 약속한다···. 이 말인가?”
“물론입니다. 우리의 주군이신 길도 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전투들에서 항복한 이들을 모두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그 일은 그들이 겉으로는 항복하는체하면서 우리 주군을 헤치려고 해서였습니다.”
“그렇군···.”
알렉산드리아 의회에서 제법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비투스는 첩자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 일을 나 혼자 결정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다른 이들과도 의논해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시지요. 다만 자칫 잘못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알렉산드리아는 내 집 안마당이나 다름없소.”
아비투스는 그길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의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아비투스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나, 매일같이 격한 전투와 정무에 지쳐있던 총독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히파티아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이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잠깐만, 마차를 멈춰주겠나?”
“무슨 일이 급이니까?”
“저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병사들은 아닌 것 같은데 밤늦게 무엇을 하는 걸까.”
히파티아의 말에 마부가 고개를 돌려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저들은 의원분들의 노예와 식솔들인 것 같습니다. 오밤중에 왜들 모이는 것일까요?”
“그러게 말이야···. 왜 저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지?”
“늦게까지 일하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조금 수상한 것 같은데.”
히파티아는 조금 고민하더니, 하인 하나에게 말했다.
“크리피스, 너는 이 길로 알렉산드리아 총독께 이 사실을 전해주겠니?”
“이 밤중에 말입니까?”
“그래, 미리 알려드려서 나쁠 게 없잖아?”
“바람같이 다녀오겠습니다.”
히파티아는 평소 친분이 있던 총독에게 하인을 보냈고, 총독은 잠결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별 시답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 그런 일을 일일이 알려주는고···. 잘 알아들었다고 전하게나.”
“예, 각하!”
“그래, 나갈 때 문도 닫고 가게.”
다시 침대에 누운 총독은 다시금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조금 전에 히파티아의 하인이 전해준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찝찝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총독은 몰려드는 피로를 쫓아내며 부관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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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부르신 것입니까?”
“잘 자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원···.”
아비투스는 자리에 모인 의원들에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날이 전투가 격해지고 있습니다.”
“그거야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것은···.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도대체 그 말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나 질질 끄는 것입니까? 답답하니 이제는 이야기 해주시지요.”
동료의원의 말에 아비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길도의 진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길도의 진영에서요?!”
“첩자라면 당장에 잡아야지요!”
당연하게도 반응은 격렬했다.
당장이라도 첩자를 찢어 죽일듯한 의원들의 기세에 아비투스가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우선은 진정하시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내일 밤에 성문을 열 생각입니다.”
“성문을요?!”
“미치신 겁니까?! 왜 적을 이롭게 한단 말입니까!”
“자자···. 다들 진정부터 하시고 제 말을 천천히···.”
“듣기는 뭘 듣는단 말이오! 아무리 지금 우리가 위태롭다고는 해도, 로마를 저버리라니요!”
“지금까지 로마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걸핏하면 세금이나 뜯어가면서, 지금 로마군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비투스의 말에 다른 의원들의 감정이 격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그런 이유로 나라를 져버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혹시 다른걸 제의받은 거 아닙니까?”
“무, 무슨 소리···!”
“인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얼마나 받으셨길래 문을 여니 마니 하는 겁니까.”
“크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성문을 열고 항복해야 합니다.”
“그 말을 우리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요.”
아비투스가 탁자를 두 번 두드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와 의원들을 때려눕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러분은 길도의 첩자들에게 살해당하신 것이고, 여러분이 데려오신 하인들은 제가 잘 쓰겠습니다.”
“이, 이러고도 무사하실 것 같습니까!?”
“몇 달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본토의 벌레들이 과연 오기나 하겠습니까? 이미 이 도시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비투스는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조용히 뒤뜰에 파묻어.”
“예, 주인어른.”
“아비투스!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 크헉!”
“저주는 무슨···.”
아비투스는 그런 의원들을 비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이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방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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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물로두눔의 성벽 앞에서 헤라클리우스는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공격하면 넘어올 듯한 작은 요새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병사들은 쉽사리 성을 넘지 못했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째,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병사들은 아직도 성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나?”
“물러나는 것 말고, 말입니까.”
“그래, 매번 아슬아슬하게 기회를 놓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아무래도 적의 대장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적들이 밀리더라도 그놈이 나타나는 순간에 다시 힘을 내는 것 같더군요.”
“마리우스, 그놈만 어떻게 하면 되겠군.”
“그것 말고도 해자도 골칫거리입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탓에 쉽사리 접근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공성병기를 움직이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부관의 말대로였다.
지난 몇 번의 공격에서 공성 병기들을 동원해봤지만, 공성 탑은 해자 때문에 성벽에 닿을 수도 없었다.
충차 또한, 간신히 성문을 때리려고 해도 집중공격을 받아서 불타오르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 잔해들로 입구가 막혀서 충차를 동원하는 건 애초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되니 남은 것은 사다리를 걸고서 넘어가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일방적으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물러나셔서 적들을 밖으로 꾀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꾀어낸다고.?”
“예, 어차피 적들은 아칸 님을 노리고서 론디니움으로 진군할 것이 아닙니까, 적당한 때와 장소를 고른 다음에 적을 기다렸다가 평원에서 한번 크게 붙는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헤라클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꾀어낸다고 나올 놈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생각해보게, 스틸리코가 저놈을 보내는데 병사를 저만큼만 쥐여줬겠나? 분명히 본대가 따로 있을 거야···. 놈은 그걸 기다리는 거고 말이야.”
“그럼 스틸리코가···. 온다는 말씀입니까?”
스틸리코라는 말에 부관이 잘게 몸을 떨었다.
물론 스틸리코는 알렉산드리아로 떠난 지 오래였고, 마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 온 것도 순전히 화가 난 장인어른을 달랠 선물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이를 알지 못했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으로 본대가 따로 있음을 눈치챘다.
“그건 모를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하긴···. 지금 로마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 어르신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물론 지금의 로마에서 가장 큰 위협은 아칸이 아니라 길도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론디니움으로 후퇴해서 적의 동향을 살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도착할 스틸리코의 본대에 포위당할 가능성이 커.”
“으음···. 그건 문제로군요.”
“차라리···. 칼레도니아에 연락을 넣어보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칼레도니아라면···. 픽트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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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들이 오늘따라 조용한데.”
“여러 번의 전투로 피해가 누적된 게 아니겠습니까? 벌써 다섯 번의 공세를 막아냈습니다. 저들도 슬슬 지치겠지요.”
“일리 있는 말이로군.”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한 채로 적에 맞서서 성을 지켜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지친 병사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사고를 치는 일이 잦아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병사는 통제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주민들은 괜히 돌아다니다가 눈먼 화살에 맞을까 봐 집에 꼭꼭 숨었고, 말이다.
“본대와의 연락은 아직인가?”
“예, 바다는 잠잠합니다. 전령이 온 적도 없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르마니아의 바다는 춥고 거칠기는 하지만, 육지와 가까운지라 사고가 벌어져도 사람이 많이 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네만···.”
고개를 돌려서 식사 준비로 분주한 헤라클리우스의 군영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저녁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오늘도 공격은 없을 게 분명했다.
“슬슬 저녁을 준비할까요?”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
“말린 청어에다 보리빵입니다.”
“보리빵? 먹을게 다 떨어진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하고 뜨악하며 알레피우스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허탈했다.
“아뇨, 전하께서 보리를 좋아하시기에 보리빵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나도 밀가루빵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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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게르마니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호노리우스의 눈에 검은색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폐하, 그건 게르마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돌입니다.”
“검은 돌? 돌이라기에는 너무 물렁물렁하고 쉽게 부서지는데?”
“각하께서는 석탄이라고 부르시기도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검은 돌이라고 합니다.”
“흐음···. 이건 어디에 쓰는 거야?”
“불이 잘 붙고 화력이쎄서, 대장간에서 주로 쓰고는 합니다.”
호노리우스는 석탄을 조심스레 살펴보더니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거지?”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음···. 재밌는 게 생각났거든.”
호노리우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