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아 사파리 - 11
“헤라클리우스, 오랜만에 봅니다.”
“이게 누구인가, 불패의 명장 마리우스가 아닌가!”
“불패의 명장은 무슨···.”
“오랜만일세,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안에서 이야기했으면 하는데!”
“장난은 이쯤 하지요. 쓸데없이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헤라클리우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리우스 경! 우리가 지내왔던 지난날들을 기억해보시오! 내가 알기로는 스틸리코가 당신을 게르마니아 촌구석에 받아버렸다고 들었는데, 그가 원망스럽지 않소이까!”
“거 개쌉소리 그만하시고 돌아가시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내 말에 색슨족 병사들의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한목소리로 헤라클리우스를 비웃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마리우스, 왜 그러는가 우리들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네만.”
“그렇게 좋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만 질척거리시지요. 저는 남자 안 좋아합니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자네만큼은 우리와 함께했으면 했건만···.”
결국, 참지못하고 한소리 했다.
“야 이 반란군 새끼야! 내가 지금 대군을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뭐, 뭐라고?”
“...라고 스틸리코 장군께서 전해달라더군요.”
헤라클리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이내 악귀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두고 보지···. 방금전의 그 말을 후회하게 될걸세.”
“글쎄요.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인제 와서 잘못을 빌어도···.”
“뭐 이리 혓바닥이 깁니까, 그냥 가서 병사들 끌고 오십시오. 안 그러면 화살 맞고 먼저 골로 가실 겁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하더니,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군영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알레피우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굳이 적을 도발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이러면 적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총공격을 가해올 텐데요···.”
“그럴 유도 한걸세.”
“예? 유도하다니요···?”
“헤라클리우스가 이대로 돌아가서 총공격을 명령한다면, 누가 제일 피해를 보겠는가?”
“그거야···.”
“당연히 적들이지, 적들은 방금 도착했지. 그런데 변변한 공성 무기를 준비할 겨를이 있었겠나?”
“아!”
알레피우스가 이제야 이해 간다는 얼굴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헤라클리우스가 돌아가자마자 적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적들이 금방이라도 몰려들 테니까 말이야.”
“이미 성벽에서 준비 중입니다.”
“그럼 자네는 남문으로 가서 지휘하게나, 적이 도망가더라도 뒤쫓지 말고 자리를 지켜. 알겠나?”
“알겠습니다.”
성벽의 난간을 손으로 쓸어봤다.
거칠거칠하고 딱딱한 것이 참으로 안정감을 줬다.
오랜만에 방어하는 처지로 치루는 공성전이라 긴장도 됐지만, 병사들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영원히 싸울 것도 아니었다.
딱,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지키면 될 일이었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옵니다!”
“끓는 물은 아직인가!”
“이제 막 끓기 시작했습니다!”
******
“이대로 총공격한다.”
“장군,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야!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단숨에 성을 되찾는다.”
“장군, 그렇지만···.”
“시키는 대로 해! 어차피 적들도 준비가 덜된 건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헤라클리우스는 잔뜩 열 받은 상태였다.
그동안 카티우스의 밑에서 꾸역꾸역 화를 참아오던 게,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던 마리우스의 조롱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 탓이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카몰로두눔의 병사들이 수성준비가 끝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적의 모습에 재빠르게 수성준비를 서둘렀지만, 수성은 처음인 색슨족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거기에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행군을 통해서 굳은 몸을 푼지라, 딱 전투하기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돌격기 올리고, 돌격 나팔을 불어라! 전군 총공격이다!”
“전군! 목표는 카몰로두눔이다. 총공격하라!”
“와아아아-!”
헤라클리우스 진영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준비는 아직인가?”
“그, 그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씁···. 어쩔 수 없지, 화살은 충분히 가져다 놨겠지?”
“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뭐?!”
병사들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다못해 그들을 지휘해야 할 장교들마저 수성전에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는 듯했기에, 일일이 지시를 해야만 했다.
적은 몰려드는데 이제야 화살을 옮기고, 성문에 지지대를 덧대는 작업이 벌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물이 안 끓는데?”
“왜 그러지?”
“불을 안 붙였잖아 멍청이들아!”
“음식 준비하냐?!”
이제야 끓기 시작한 물.
“기름 냄새가 고소하네, 생선 기름인가?”
“아니, 올리브유라던데.”
“올리브유는 또 뭔가.”
“잘 모르겠···. 어? 불붙었는데?”
“뭐?!”
생선 기름 대신 올리브유를 끓이다가 불을 낸다거나.
“지지대를 단단히 받쳐놔라! 적들이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말이야.”
“그런데 지지대를 받치는 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성문에 걸쳐놓는 것이지!”
지지대조차 제대로 설치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리우스가 이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봤다면 목덜미를 부여잡고 쓰러졌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는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기에 바빴다.
성안의 병사들이 허우적거리면서 삽질하고 있을 때에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적군 병사들은 성벽까지 다가왔다.
“화살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군.”
“장군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적군이 허둥대면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있습니다!”
“마리우스가 평소에 상대하던 야만인들과는 다른 싸움에 당황하는 것이겠지.”
헤라클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성벽 위에 서 있는 마리우스를 바라봤다.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음에도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헤라클리우스 쪽이었다.
“뭐 저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아군의 압도적인 위용에 몸이 굳어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마리우스 저놈은 그럴만한 놈이 아니야···. 뭔가···. 뭔가가 있어···.”
헤라클리우스가 마리우스가 숨겨놓은 무언가를 찾으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병사들이 힘껏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성벽에 도착하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자가 파이지 않은 성문 쪽으로 병사들이 몰리게 되었다.
“쏴라!”
그러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활을 쏘고, 창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공격쯤은 지난 에보라쿰 공방전에서도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할 필요 없다! 성벽을 기어 올라가라!”
“성벽 위에 제일 먼저 올라가는 자에게 특별한 보상이 따를 것이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화살들에 정신이 없을 법도 했지만, 헤라클리우스의 병사들은 침착하게 갈고리를 걸고서 성벽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끓는 물과 기름을 가져와서 부으면서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어 푸푸···. 뭐야!”
“물이···. 미지근한데?”
“안 올라가고 뭐···. 크아악-!”
원래대로라면 끓는 물과 기름을 뒤집어쓴 병사들의 살이 익어버리면서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지만, 미지근했던 물과 기름 탓에 병사들은 별 무리 없이 성벽을 기어 올라왔다.
물론 성벽이 제법 높고 마땅히 잡을 부분도 없이, 갈고리 하나에 의지해서 성벽을 기어 올라가던 수십 명의 병사는 갈고리가 끊어지면, 여지없이 비명과 함께 밑으로 추락했다.
성벽 위에서도 올라오는 병사들을 막고자 연신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고, 돌을 굴리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하고 있었다.
밑에 있던 병사들도 전부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닌지라 자리를 잡은 궁수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하니, 성벽 위에서도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하! 적의 화살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위험하니 안쪽으로 피하시지요!”
“피하기는 무슨···. 나 없으면 여기가 제대로 굴러가기나 하겠나? 내 걱정하지 말고 저 갈고리들이나 어떻게 해봐!”
“적이 성벽에 올라왔다!”
“돌겠네! 진짜.”
근성으로 성벽을 기어 올라온 병사는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던 병사를 있는 힘껏 밀치고서 성벽 위에 올라 소리쳤다.
“나 그라시아누스가 제일 먼저 성벽에 올랐다!”
“그라시아누스! 그라시아누스!”
병사들은 제일 먼저 올라간 병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호했고, 지지 않겠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서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라시아누스는 능숙한 검술로 색슨족 병사들을 농락하면서 동료들이 성벽을 기어 올라올 시간을 벌고자 했다.
“저거 하나 어쩌지 못하고···. 에이, 내 검 가져와!”
“전하, 상처가 다 낫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검 가져와.”
한 병사가 던져준 검을 받아들고서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칼집을 빠져나오는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은빛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검을 들고서 몸을 움직이면서 몸을 점검하니, 상처가 다 낫지는 않았는지 가슴이 욱신욱신했으나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참을만했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성벽으로 향했다.
놈이 검을 휘두르면서 한눈을 팔 때, 벼락같이 검을 휘두르니 놈이 당황하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내 검이 방패에 부딪히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방패의 가장자리가 깨졌다.
몸만 멀쩡했다면 방패와 몸까지 통째로 베어버렸을테지만, 아쉽게도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크윽...”
“솜씨가 제법이구나.”
“너야 말로... 내 검을 받아내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커헉... 어어어...?!”
병사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시간을 끌려하자, 그의 얼굴을 검 손잡이로 한번 후려치고는 다리를 들어서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병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났나? 빨리 올라오는 놈들을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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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는 전례가없던 특별세가 징수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비공식적인 세금을 걷는 경우가 종종있었지만, 대부분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갈때나 내전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록 국경지대들이 시끄럽고 북아프리카의 반란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최근 몇 년동안은 매우 평화롭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속주민들이 이 특별세에 반감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나라로부터 받은 것은 없는데, 나라는 언제나 나로부터 뭔가를 자꾸만 빼앗아 가려고하네.”
“내 인생의 20년을 군에서 보내고, 이제야 가정을 꾸려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돈을 더내라고?”
“로마는 우리의 헌신만을 바라지, 대가를 준적이 없지 않은가!”
스틸리코는 시민들을 설득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렇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을 가진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다.”
스틸리코는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할 뿐이었다.
그렇게 말많고 탈많았던 특별세가 걷히자, 재정에 숨통이트인 스틸리코는 지체없이 갈리아에 주둔중이던 군단을 빼와서 대규모함대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
그리고 이 대규모의 원정군을 지휘하는 것은 스틸리코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