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88/187)

하이아 사파리 - 10

카몰로두눔은 전형적인 로마식 도시였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주변에 깊게 파놓은 해자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기존의 6군단이 주둔하던 주둔지도 멀쩡하게 남아있어서 도시안에 병사들을 주둔시키기도 안성맞춤이었다.

다 좋았다···. 다만···.

“본대가 늦는군,”

“바람이나 물때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이거야 원···. 본대보다 적들이 먼저 도착하겠어.”

“그래도 성이 튼튼하고, 해자가 깊으니 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공성전은 이제 신물이 나···.”

“예?”

“아무것도 아닐세, 병사들의 사기는 좀 어떤가?”

“애초에 자주 들렀던 곳인지라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괴롭히는 건 없고?”

“예,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일 처리가 확실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색슨족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긴, 한 부족을 이끌 정도라면 이 정도 수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알레피우스, 적들의 동태는 파악했나?”

“그건 아직···.”

아직 완벽한 건 아닌 듯싶었다.

데키무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진즉에 정찰병들을 뿌려둬서 적들의 움직임을 감시했을 텐데 말이다.

“정찰병들을 내보내서 인근을 샅샅이 탐색하라고 해. 아마도 적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몰려올 것 같다.”

“벌써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병사들 모으는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알레피우스, 여긴 게르마니아와는 다르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내 말에 알레피우스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제나 긴장을 유지한 채로 조심하라는 거야. 너의 한순간의 실수로 부하들이 전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아,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병사들을 둘러보고 챙기게.”

“네!”

“명령했던 거 잊어버리지 말고.”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도 않는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했다.

이래서 내가 따라온 거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음이 쓰였다.

전투에서는 제법 머리가 굴러가고 시키는 일은 잘했지만,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능력은 좀 떨어지는 듯했다.

“어휴···. 내 팔자야.”

성벽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헤라클리우스는 그의 휘하에 있는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서 에보라쿰에서 물러났다.

갑작스레 포위를 풀고 물러난 적의 모습에 콘스탄티누스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빨리 성벽을 보수하고, 인근에서 물자를 충당해야 한다. 서둘러라!”

당장은 살아남았지만, 또 언제 몰려드는지 모르는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병사들과 주민들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반면에 에보라쿰에서 물러난 헤라클리우스는 곧바로 린든으로 향하여 보급품을 다시 챙기고, 보충병을 보충받은 뒤에 곧바로 카몰로두눔으로 향했다.

아칸에서 받은 명령은 카몰로두눔에 상륙한 로마군을 처리하라는 것 단 하나였지만,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 가능하겠나?”

“장군, 이미 최대속도로 행군 중입니다. 여기서 더 속도를 높였다가는 병사들이 죄다 낙오해버릴 겁니다.”

“쯧···. 그럼 쓸모없는 짐들은 전부 버리고 무기와 장비, 간단한 식량만 챙겨서 이동한다.”

“장군! 병사들을 노숙하게 만드실 셈입니까?”

“지금 시간이 없단 말일세! 한 시간이라도, 아니 하루라도 더 빨리 카몰로두눔에 도착해서 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라면, 그곳에 도착할 때쯤에는 병사들이 전부 뻗어버려서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할 겁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갑갑함을 느끼며 병사들을 돌아보았고, 병사들의 지친 얼굴과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부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급한 마음에 너무 병사들을 재촉했다.

하마터면 부관의 말대로 작전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탈진하게 생긴 판이었다.

“장군, 이미 일주일 거리를 나흘 만에 주파했습니다. 이제 더는 무리입니다.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군···. 오늘 행군은 여기까지 하고, 이 장소에서 오늘 하루 푹 쉬고 행군을 계속하겠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한 주일 안에는 카물로두눔까지 가야 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별일이야 있겠나?”

******

티마시우스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죽음에도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다가 전원 전사했다.

그런 과정에서 친위대 병사들의 희생이 늘어났고, 도시의 민심 또한 흉흉해졌다.

“그래서 결국엔 누가 진짜였던 거야?”

“티마시우스 장군이 편지를 위조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누가 그래! 티마시우스 장군이야말로 이 나라의 애국자셨단 말이여!”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티마시우스 장군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까 정당한 절차 없이 병사를 일으킨 것 아닌가?”

“뭐가 어쩌고 어째?!”

이번 티마시우스의 반란은 루피누스의 반란보다 피해는 적었지만, 시민들의 평가는 크게 갈리고 있었다.

기존에 티마시우스를 알고 있거나, 그 휘하에서 복무했던 퇴역 병들은 파비우스가 황제의 친서를 훼손한 것에 대해 에우트로피우스를 비난하며 티마시우스를 칭송했다.

반면에 에우트로피우스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위조된 편지로 국정을 혼란케 하고, 나아가 반란까지 일으켜서 큰 손해를 끼친 티마시우스를 비난하며 에우트로피우스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티마시우스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가 뿌린 잔불들이 콘스탄티노플 이곳저곳에서 아직 불타고 있었다.

“수고 많았네.”

“병사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티마시우스의 병사 중에 일부가 너무 격하게 저항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에우트로피우스는 울적한 표정의 파비우스를 애써 위로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는지가 의문입니다.”

“뭐가 말인가.”

“미리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러면 차라리 재판에 넘겨서 티마시우스를 추방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파비우스의 말에 에우트로피우스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티마시우스를 반역죄로 재판에 부쳤다고 쳐보지···. 지금의 로마군부를 손안에서 굴리고 있는 그가 붙잡혀가면···. 군부가 어떻게 나오겠나?”

“그거야 황도에 있는 병사들을 풀어서···.”

“그들을 모두 잡아들이면, 그다음은? 밀려 내려오는 훈족들과 고트족은 어떻게 막을 건가.”

“그건···.”

파비우스가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에우트로피우스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자네 말대로 지휘관들을 전부 붙잡았다고 치지···. 그럼 우리 중에 군대를 통솔할만한 사람이 누가 남는 거지? 자네?”

“......”

“자네가 그 막중한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건가?”

파비우스는 말이 없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런 파비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다독였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고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네, 이번만 하더라도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이 물론 있었겠지···. 하지만 자네 그거 아는가?”

“뭘 말입니까.”

“티마시우스가 내게 타협을 요청했다면 나는 받아들였을걸세, 어찌 되었건 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지.”

파비우스는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입을 꾹 닫고 에우트로피우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 것 같나?”

“저 같은 놈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만심 때문이지, 그놈은 모든 일이 자기 계획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어땠는가?”

“합하께서 모두 계획하신 대로 이뤄졌다. 뭐 그런 겁니까?”

“하하하···. 내가 그런 걸 전부 예측했다면 왜 여기 있었겠나,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겠지. 나는 그저 큰 틀에서 대충 때려 맞춘 것에 불과해.”

“그건 티마시우스도 똑같지 않습니까.”

“자네가 황제 폐하의 친서를 왜 찢어버렸는가, 어차피 자네는 글도 못 읽는 까막눈이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어찌 황제 폐하의 친필을 알아봤지?”

“그거야···. 합하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마시우스의 부대를 막아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에우트로피우스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바로 그거지, 티마시우스 놈은 자기의 뜻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기를 원해. 그래서 사소한 문제가 생겨도 일이 어그러지기 마련이야···. 그러나 그 친구는 그런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어.”

“자만심이로군요···.”

“그래, 자만심이지. 이제 좀 알겠나?”

파비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치는 어렵군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한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게 뭔가.”

“에우트로피우스님과 마리우스 님은 비슷한 듯싶으면서도 다르시다는 걸 말입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칭찬인가? 아니, 대답하지 말게 그냥 칭찬으로 들을 테니까 말이야.”

“마리우스 님이시다면, 아마 좀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군요.”

파비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우트로피우스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트로피우스는 이번 반란의 책임이 군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군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총독과 군단장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와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만 했고, 그들의 가족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쯧···. 우리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는군.”

“이래서 정치인들이란···. 쯧쯧쯧.”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게 아닐세, 우리도 힘을 합쳐서 항의해야 하지 않겠나?”

“항의는 무슨 놈의 항의···. 그냥 지나갈 때까지 몸이나 바짝 엎드리고 있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말이야.”

“아니, 그러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말인가?”

“참지 않으면 어찌할 건가? 루피누스나 가이나스처럼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건가!”

“흥, 못할 것도 없지.”

이에 다른 장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거면 자네 혼자 하게, 괜히 나까지 엮여 들어가서 죽고 싶지는 않군.”

“아르바자키우스! 자네 이러긴가!”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한다네.”

당연하게도 군부에서는 불만과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반란 시도는 대부분 조기에 진압되었는데, 그 이유는 에우트로피우스가 미리 군부에서 매수해놓은 인물들 덕분이었다.

“자네 덕분에 오늘도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네.”

“별말씀을···.”

“약속한 대로 섭섭지 않게 넣어뒀네.”

에우트로피우스는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에 보석과 상아로 장식된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 가득한 금화들을 보며, 장교가 에우트로피우스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지요.”

“마음에 들었나 보군.”

“최근에 돈 들어갈 곳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래,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게 내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 말이야.”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가시게, 아르바자키우스.”

에우트로피우스의 지배하에 콘스탄티노플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하는 한 가지 의문은 영영 풀리지 않았다.

‘황제의 편지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

지평선 너머에서 길을 따라 행군하는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마군의 깃발을 들고 있었지만, 아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오는군.”

“병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알레피우스가 다급히 뛰어 내려가려는 걸 막았다.

“기다리게, 어차피 저놈들은 오늘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역시···. 전하께서는 상황을 꿰뚫···.”

“아, 그만하고 그냥 병사들이나 준비시키게. 괜히 붙잡은 모양이구먼.”

“예, 알겠습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알레피우스를 내려보내고 저 멀리 다가오는 병사들의 수를 가늠했다.

깃대위에서 포효하는 황금빛의 독수리가가 네 마리, 못해도 2만 명은 넘는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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