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87/187)

하이아 사파리 - 9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이 한 달 하고도 이주쯤 흘렀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성벽 위에는 여전히 로마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길도가 시민들의 머리를 베어 투석기에 날림으로써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가족을 잃은 복수심과 항복하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더해진 알렉산드리아의 방어군이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병사들의 희생이 늘어나기만 했다.

지금에서야 연신 투석기를 혹사하면서 성벽 너머로 돌을 날려댔지만, 그렇게 쏘아 보낸 돌들이 적들의 투석기를 통해 돌아오고 있었다.

즉,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방법을 생각해내란 말이다!”

“공성전은 자고로 진득하게 기다리는 쪽이 이기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포위만 하고 있어도···.”

“적은 바다를 통해서 물자를 보충받고 있는데, 뭘 기다린다는 말이야!”

“커흠···.”

“그렇다고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 커질 것입니다.”

“병사들이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냥 돌아가자는 건가?”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아···.”

길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오면서 자신이 깨트린 성이 몇 개에 쳐부순 마을이 몇 개였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았지만···. 정작 목표로 했던 알렉산드리아를 앞에 두고 돌아가려니 망설여졌다.

그런 길도의 마음을 꿰뚫어 본 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과거 트로이에서 했던 대로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트로이? 트로이의 목마를 말하는 것인가?”

“정확히는 알렉산드리아 내부에서 우리와 협력할만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협력이라···. 그럴만한 인물이 있을까?”

“아무리 알렉산드리아가 외부와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적도 많이 지쳐있고···.”

“겁을 집어먹었겠지.”

“바로 그겁니다.”

부하의 말에 우울했던 길도의 얼굴이 쫙 펴지면서 입가에는 다시금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성 밖에서 길도의 일당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알렉산드리아 성안의 상황도 바깥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거리 곳곳에는 썩어가는 시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이를 치워야 할 인부들이나 병사들은 밤낮없이 벌어지는 전투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에는 시체와 오물들이 쌓여만 갔고, 결국 성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웩-”

“괜찮아?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데.”

“으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지럽지···?”

“어제 너무 늦게 자서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백인 대장님한테 잘 말할 테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그, 그럴까···? 고마워.”

알렉산드리아 이곳저곳에서 이상한 증세를 보이는 병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벽을 보수하던 인부들에서 시작했지만, 전염병은 이내 병사들에게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도시에는 비상이 걸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모종의 돌림병이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씻지도 못하고 전투를 계속한지라···.”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닐세, 대책을 세워야 할 게 아닌가!”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력 있는 의원들을 환자들에게 붙여놓고, 환자들과 병사들을 격리해뒀습니다.”

“그걸로 끝인가?”

총독의 싸늘한 말에 부관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우선은 거리에 있는 시체들을 소각하고 환자가 나온 건물을 깡그리 불태웠습니다.”

“으음···. 일단 초동조치는 제대로 취한 것 같으니 다행이네···. 그래서 지금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

부관은 대답이 없었다.

이에 총독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괜찮네,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해뒀다네.”

“사, 사···.”

“사천 명? 맙소사···.”

“......”

부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천 명이 아니라 삼천 명입니다.”

“삼천 명이라고···?”

총독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만을 훌쩍 넘기던 병사들이 어느샌가 삼천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성벽을 제대로 지킬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다가···!”

“돌림병에 병사들이 앓아누운 탓입니다. 다행히도 아직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의원의 말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사망자가 쏟아져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젠장! 젠장! 젠장!”

총독은 애꿎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화풀이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건가?”

“콘스탄티노플은 아직 소식이 없지만, 로마에서는 카르타고를 점령했다고 전해왔습니다.”

“카르타고를···?”

“지난번에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콘스탄티우스라는 장군이 기습해서 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래?”

총독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그, 그 뒤에는 뭘 하고 있다던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적들의 뒤를 쫓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총독은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펼치면서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를 대충 가늠했다.

아무리 빨라도 3주, 못해도 한 달은 걸릴 거리였다.

한 달.

그 기간만 버티면 도시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총독은 그렇게 믿었다.

“한 달만 버티면 된다. 병자들은 배에 태워서 인근의 도시들로 옮겨서 치료받게 하고, 가능하면 지원군과 군용물자도 받아오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은 저무는 석양을 바라봤다.

그 아래에서 검게 피어오르는 시체 태우는 연기도 함께했다.

******

“오른쪽! 오른쪽에 적 발견!”

“어디서 오른쪽!”

“네 오른쪽 멍청이야!”

카르타고는 솥안의 끓는 물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강경 진압을 지시한 콘스탄티우스는 저항세력을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쳐부쉈다.

카르타고의 거리에는 길도를 지지하는 반란분자들과 로마군과 끊임없는 전투로 시끄러웠다.

도시의 지리에 능숙했던 반군은 도시를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로마 병사들을 습격하고는 했다.

하지만 로마군이라고 멍청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로마 병사 한 명이 죽으면, 그 부근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잡아들였고, 당사자가 잡히면 그자의 가족들을 붙잡아다가 눈앞에서 아는 걸 전부 불 때까지 고문했고, 그 고문에는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는 상관없었다.

“끄아아악-!”

“아버지!”

“저게 다 네놈이 입을 열지 않아서 그런 거다. 아버지를 살리고 싶으면 네게 벽돌을 집어 던지라고 시킨 이들의 이름을 대.”

“전부 나 혼자 벌인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쯧쯧쯧···. 기회를 줘도 차버리는군.”

“잠, 잠깐!”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로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히려 길도의 지지자들이 보이면 근처의 로마군에게 제보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지나가자, 그동안 끈질기게도 원정군을 괴롭히던 반란군이 얼추 정리되었다.

시민들은 로마 병사들만 보면 오줌을 지려버릴 정도였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오히려 이편이 통치하기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장군, 알렉산드리아가 포위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나 보군···. 스틸리코 장군으로부터는 소식이 없나?”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병사들 보내주시겠다고는 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되겠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스틸리코 장군께서 이번 반란 토벌에 칼을 뽑아 들겠다고 하셨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것이···.”

스틸리코는 오랜만에 원로원에 출석했다.

원로원의원들은 사전에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스틸리코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섭정 공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행차하셨는지 모르겠군요.”

“합하의 정치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잘 굴러가던 게 아니었던지요?”

“저는 여러분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왜 오신 겁니까? 저희를 조롱하러 오시기라도 했다는 말씀입니까?”

의원들은 잔뜩 날 선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협조를 구하러 왔습니다.”

“협조? 무슨 놈의 협조 말입니까!”

“이번에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섭정 공께서 엉뚱한 곳을 건드리다가 결국 일이 터진 것 아닙니까?”

“허어···. 일은 섭정 공께서 벌여놓으시고, 수습은 우리보고 해라 뭐 그런 겁니까?”

간만에 꼬투리 잡을게 생겼다는 생각에 원로원의원들이 신이 나서 스틸리코를 물어뜯었다.

사방에서 의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하자, 금세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스틸리코가 손을 들자, 의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저는 여러분에게 협조를 구하러 온 것이지 구걸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크흠···.”

“다들 무슨 말인지 들어나 봅시다.”

스틸리코의 매서운 눈이 주변을 훑고 지나가자 의원들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장내가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스틸리코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북아프리카의 반란상황은 전에 없이 심각합니다. 길도라는 인물이 카르타고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봉기하더니, 북아프리카 속주의 해안 도시들을 차례대로 불태우며 알렉산드리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으음···. 벌써 알렉산드리아라니···.”

“그곳에 묶여있는 재산이 얼마인데···!”

의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그 모습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1만의 병사들을 보냈지만, 적의 수는 그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족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추가로 병사를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스틸리코가 말을 흐리자 눈치 빠른 의원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에게 돈을 빌리러 오신 거로군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만 이탈리아 반도 내의 시민들에게 특별세를 걷고자 하는데···. 듣자 하니 이런 건 원로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트, 특별세···?”

“부디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

한편, 브리타니아에서는 헤라클리우스와 카티우스와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카물로두눔을 되찾아야 합니다.”

“에보라쿰이 조만간 우리 손에 떨어질 텐데, 조금 늦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많이 달라집니다! 아칸 님께서 지금 론디니움에 계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헤라클리우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그곳에서 아칸 님이 계신 론디니움까지는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3~4일 거립니다! 반면에 저희는 아무리 빨라도 2주는 걸리는 위치란 말입니다!”

“쯧···.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론디니움에는 수비대가 없던가? 그들이 버티고 있을 때 우리가 내려가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게···. 허어···.”

헤라클리우스는 도저히 카티우스와 대화가 안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말없이 천막을 빠져나갔다.

“저, 저 성질 하고는 쯧쯧···.”

헤라클리우스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던 부관이 다가왔고, 헤라클리우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병사들은 전부 장악했나.”

“예, 카티우스 휘하의 해병들 또한 장군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좋아, 전부 따라와.”

헤라클리우스가 다시금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범벅이 된 헤라클리우스가 걸어 나왔다.

부관과 병사들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헤라클리우스를 바라봤고, 이에 헤라클리우스가 말했다.

“짐 싸라. 전부 남쪽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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