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86/187)

하이아 사파리 - 8

해안가에 배가 닿자마자 준비를 마치고서 대기 중이었던 색슨족 병사들이 배에서 뛰어내렸다.

해안가에서 방어를 위해 나와 있던 소수의 병사가 화살을 쏘고 돌과 창 따위를 던지면서 거칠게 저항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전하, 제 뒤로 오시지요.”

“으음···. 또 화살에 맞으면, 부인들이 날 죽이려 들겠지···. 잠시 신세 좀 지겠네.”

“영광입니다.”

이름 모를 색슨족의 늙은 병사들이 내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나를 호위했다.

젊고 혈기 넘치는 병사들이 싹 청소해놓은 길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최선두에서 달리고 싶었지만, 상처가 아물지 않은 탓에 잘못했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전투는 굉장히 싱겁게 끝이 났다.

해안선에서 아군을 막지 못한 적 병력은 그대로 성까지 도망갔고, 그 뒤를 용맹한 색슨족의 병사들이 뒤쫓아서 그대로 성까지 뚫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성문이 뚫리자 병사들은 두 손 들고 항복했고, 성주는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고생 많았네.”

“감사합니다. 평소보다도 병사들이 적어서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병력이 적다고?”

“예, 보통은 해안가에 수백 명의 병사가 저희를 기다리고는 했는데, 오늘은 고작해야 백 명쯤? 예,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성내에 병사가 적었던 게, 전투에서 많이 죽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보군.”

그러고 보니 성안에 있는 병사들이 매우 어리거나, 늙수그레한 것이 제법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브리타니아의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전령이 움직였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지만, 적에게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우선은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을 감옥에 가둬라. 지금은 뒤따라올 본대를 기다리는 게 우선이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일단 도시를 확보했다.

이제는 본대를 기다리면서 브리타니아의 정보를 수집하고, 콘스탄티누스와의 연결점을 찾아봐야 했다.

******

오랜만에 평화롭고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던 아칸은 갑작스레 불안감을 느꼈다.

이 의미 모를 불안감은 무엇일까, 아칸은 한참을 어슬렁거리며 고민했지만,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가, 각하!!”

그리고 전령이 도착했을 때,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카물로두눔이 함락됐습니다!”

“갑자기 말이냐? 콘스탄티누스가 병사를 빼돌려서 공격하기라도 하기라도 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픽트족이 날개라도 달려서 내려왔다는 것인가?”

“로마군이었습니다!”

“로마군이라니, 적들이 바다라도···. 건너온 모양이로군···.”

아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어떻게든 로마본토에서 자신이 브리타니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노력했던 것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본국에서 눈치를 채고 병력을 보낸 이상, 브리타니아는 위험했다.

“적의 규모는···.”

“오천 명을 조금 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천? 그게 확실한가!”

“아, 아마 확실할 것입니다.”

역시 신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아칸은 그렇게 확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도시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고, 에보라쿰을 공격 중인 헤라클리우스와 카티우스의 부대를 뒤로 물려서 카물로두눔으로 보내!”

******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티마시우스의 출병 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티마시우스가 동부 전역에서 불러들인 3만 명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콘스탄티노플 시내로 모여들었고,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티마시우스는 선언했다.

“우리는 지난 5년여간의 어두운 시절을 벗어나서 이제야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저건 무슨 소리래요?”

“몰라, 그냥 들어.”

티마시우스의 뜬금없는 말로 시작된 출정식 연설에 시민들과 병사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티마시우스를 올려다봤다.

이에 티마시우스는 숨겨뒀던 편지 한 장을 꺼내 대중 앞에 흔들면서 소리쳤다.

“다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이건 저 황궁에서 똬리 틀고 있는 추악한 에우트로피우스를 몰아내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담긴 친서다!”

“황제의 친서라는데?”

“뜬금없이 에우트로피우스임을 몰아낸다고.?”

“그럴 필요가 있나···?”

“그것보다 방안에 틀어박혀만 있던 황제가 편지를 썼다고?”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티마시우스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한 것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장군께서 왜 저러시는 거야?”

“반란이라도 일으키시려는 건가···?”

“그럼, 우리 반란군 되는 거야?”

“황제 폐하께서 지시하셨다는데, 그럼 반란이 아닌 거 아닌가?”

“그런데 에우트로피우스님도 폐하께서 임명하신 거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티마시우스는 목이 터지라 소리치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제군들이여! 무기를 들고 황궁으로 가자, 가서 간신 에우트로피우스를 몰아내고 황제 폐하를 되찾자!”

“와 아아아아-!”

티마시우스가 미리 심어둔 바람잡이들이 함성을 지르자, 주변에있던 병사들도 마지못해 함성을 질렀다.

이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티마시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서 황궁으로 향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두려워하며 집으로 숨어들었다.

티마시우스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신의 휘하에 수많은 병사가 있었고, 자신은 황제의 외삼촌이었다.

조카가 위험에 처했으면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겸사겸사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황제를 곁에서 잘 보살펴주는 것이야 당연했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정지!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파비우스 경 아닌가, 그동안 잘 지냈나?”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까, 제대로 대답하십시오.”

“사람 참 깐깐하기는···. 나 티마시우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만하고 길을 열어주시게.”

티마시우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넘어가려 했지만, 파비우스는 단호했다.

“세 번째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을 때는...”

파비우스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티마시우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아, 간신 에우트로피우스를 처단하러 가는 길이네! 여기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있네!”

“편지요? 흠···. 처음 듣습니다만···.”

“보면 알 걸세.”

파비우스는 병사가 전해준 편지를 들고선 한참을 음미하듯이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편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감히 폐하의 친서를···.”

“이건 폐하의 친서가 아닙니다.”

파비우스의 말에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까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들었어?”

“편지가 가짜라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원···.”

병사들이 동요하자 티마시우스는 이를 무마하고자 검을 뽑아 들었다.

“파비우스 네 이놈! 감히 황제 폐하의 친서를 훼손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닥쳐라! 보아하니 네놈도 간신 에우트로피우스와 붙어먹은 놈이구나!”

“쯧···. 이제는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저는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여기를 지나가시려면 저희를 모두 처리하셔야 할 겁니다.”

파비우스가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자 지붕 위에 숨어있던 궁수들과 골목골목에 숨어있던 친위대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포위된 형국에 티마시우스는 당황했고, 뒷줄의 병사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답답해했다.

“티마시우스.”

파비우스는 티마시우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손가락으로 티마시우스를 가르치며 소리쳤다.

“반역자 티마시우스! 장군은 해임되셨소이다!”

“뭐, 뭣이···!”

“장군,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편지가 정말로 거짓이었던 겁니까?”

티마시우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크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모두 숨을 죽이면서 그를 바라보았고, 한참이나 웃던 티마시우스는 돌연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파비우스, 뒷골목 거지 출신이 제법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장군, 추하게 그러시지 말고 떳떳하게 가시지요.”

“추해? 나는 일생을 로마를 위해 봉사했고, 로마를 위해 외적과 싸웠다.”

티마시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내 말이 틀렸는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티마시우스는 이어서 소리쳤다.

“일평생을 로마를 위해 살아온 내가, 황제 폐하의 친서를 조작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됩니다!”

“모두 검을 들어라···. 지금부터 적들을 꿰뚫고 황제 폐하를 구하러 갈 것이니!”

“와 아아-!”

티마시우스의 일장 연설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무기를 들었다.

뒷줄에 있던 병사들은 진즉에 친위군단에 의해 무장해제된 상태라 괜찮았지만, 티마시우스가 이끌고 있던 선발대병력 삼천 명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흉흉한 기색을 비쳤다.

“굳이 피를 보셔야겠습니까.”

“파비우스, 그 질문 그대로 돌려주겠네! 굳이 피를 봐야겠나?”

“...결심하셨군요.”

“지금이라도 길을 비킨다면, 없던 일로 해주겠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파비우스가 손을 내려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지붕 위에서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크악!”

“끄으으···.”

“억!”

화살이 쏟아지고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티마시우스는 화살이 쏟아지기 전에 말에서 내리고는 말을 방패 삼고서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방패를 들어라! 이대로 뚫고 간다.!”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냈다.

열심히 시위를 당기던 궁수들이 지치면서 점차 화살이 잦아들자, 이번에는 대기 중이던 친위대 병사들이 진영 한가운데로 난입했다.

파비우스의 휘하에서 훈련받은 동방친위대의 위용은 서방친위대보다는 못했지만, 마리우스가 설계해준 대로 매일같이 훈련을 받은 정예병들이었다.

하지만, 티마시우스의 병사들 또한 여러 전투를 거친 베테랑들인지라 쉽게 밀리지는 않았다.

거리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고, 거리는 다시금 피에 물들고 있었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티마시우스가 저기 있다!”

“장군을 지켜라!”

“더러운 반역자들에게서 황제 폐하를 구해라!”

“황제 폐하를 위하여!”

아이러니하게도 황제를 지키는 친위대가 황제의 이름을 외치며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로마를 지키는 군단병들은 황제의 이름을 외치면서 싸웠다.

둘 다 황제를 위해서 싸우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에 관해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단지 눈앞의 적을 죽이는데 한껏 집중한 채로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장군, 적들의 기세가 너무나도 거셉니다. 일단은 몸을 피하시고 후일을 도약하시지요.”

온몸에 피를 묻힌 부관의 말에 티마시우스는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도망친다고 길이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길은 파비우스를 쓰러트리고 늙은 환관을 죽이는 것! 그것뿐이다.”

“장군!”

“저기다! 티마시우스가 저기 있다!”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온 파비우스는 피로 물든 거리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평화롭게 티마시우스를 체포하는 것에서 끝날 일이었건만 상황이 너무 커져 버렸다.

같은 편인 로마군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황도는 다시금 피로 물들었다.

“장군, 저기 티마시우스입니다.”

“아직 살아있었군···.”

티마시우스는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 친위대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궁수들을 준비시켜라···. 준비가 끝나면 친위대 병사들을 뒤로 물리는 것도 잊지 말고.”

“티마시우스를 생포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희생이 더 커지기 전에 죽인다.”

곧 후퇴를 알리는 검은 깃발이 올라갔고, 경쾌한 나팔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자 친위대 병사들이 눈치를 살피면서 뒤로 물러났다.

“장군, 적이 물러납니다.”

“뭔가 이상해···.”

“적이 물러난 틈에 빨리 피하시지요.”

“아니야···. 이건···. 이건···.”

티마시우스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건물 옥상에서는 조금 전의 궁수들이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패를···!”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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