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아 사파리 - 7
“뽑아.”
“진심입니까? 차라리 돌아가셔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어허, 잔말 말고 뽑아. 이런 거로 죽을 거였으면 판노니아에서 수십 번도 더 죽었어.”
내 상처 치료에 동원된 의무관은 잔뜩 긴장했는지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물에 흠뻑 빠진 것처럼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의무관은 손바닥의 땀을 닦아내고는 집게를 들고 조심스레 화살을 잡고는 다른 손으로 조그마한 단검을 들고 상처를 후벼팠다.
“쓰읍···. 살살 좀 하게.”
“그냥 화살을 뽑았다가는 상처 주변이 크게 상할 겁니다. 아프더라도 지금은 살을 째는 게···.”
“알았네, 더는 말하지 않지.”
한참이나 상처를 후벼 파던 의무관은 어느 정도 처리가 끝났는지 심호흡을 하고서는 말했다.
“그, 그럼 뽑겠습니다.”
곁에서 흉흉한 기색으로 지켜보는 브레누스와 게지카, 그리고 사루스의 모습에 잔뜩 긴장한 의무관이 있는 힘껏 힘을 줘서 화살을 뽑아냈다.
“으음···!”
화살은 생각보다 쑥하고 빠져나왔다.
그러자 막혀있던 피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와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 튀었다.
“지, 지혈을···.”
“괜찮으십니까?”
“아니, 죽을 것 같군.”
“그러기에 제가 앞장서지 말라고 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끄응···. 수십, 수백 번이나 죽을뻔하고 살아남은걸 보면 신께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니겠나?”
“허···. 무슨 신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할 일 없는 신인 것 같습니다.”
“어허, 불경죄로 혼이 나고 싶은가?”
“각하께서 저를 가두시려면 안전한 후방으로 돌아가시겠지요.”
역시 사루스였다.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의 모습에 두손 두발 다 들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안이랬는데···. 매번 데키무스와 투덕거리면서 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께서는 아그리피넨시스에서 계셔야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안 그래도 자네들에게 말하려고 했네, 브리타니아에 일이 생겨서 자네들의 힘이 필요한데···. 같이 가주겠나?”
“브리타니아···?”
“저나 브레누스는 상관없지만···. 다른 부족들도 함께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관없네, 자네 둘과 이번에 사로잡은 색슨족까지 포함하면 얼추 2만 명 정도는 나오지 않겠나.”
“2만 명으로 브리타니아를 도모하시려는 겁니까? 적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사루스는 늘 그렇듯이 반대부터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상처 때문에 끙끙거리고 있던 터라 기분이 상했다.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게르마니아로 돌아가서 새롭게 병사들을 모집해서 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안돼, 돈이 없다.”
“지금 무턱대고 브리타니아로 넘어간다면, 보급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합니다.”
“보급이야 적한테서 취하면 그만이지.”
“진심입니까?”
사루스는 굉장히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다.
“농담이니 표정 풀게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끄응···. 보급이 발목을 잡는군···.”
“브리타니아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시는 겁니까?”
“아칸, 그놈이 브리타니아에 있어.”
“그놈은 또 누구입니까.”
“쳐 죽여야 될 놈이지,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알아들었습니다.”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게지카가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색슨족 녀석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전부터 브리타니아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던 녀석들이었습니다.”
“아,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녀석들이 매번 카, 카···.”
“카물로두눔.”
브레누스의 모습에 게지카가 한마디 했다.
“맞아! 거기서 도자기를 약탈해와서 게르마니아 이곳저곳에 팔고는 했습니다.”
“그래?”
귀가 쫑긋해지는 제안이었다.
다른 게르만족이 로마가 혼란한 틈을 노리고 국경을 넘어왔다면, 색슨족 녀석들은 기회만 되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던 듯싶었다.
이러니 로마가 망하고 얼마 안 가서 브리타니아에 여러 왕국이 생겨났던 건가?
“각하, 그러면 이번 원정에서는 색슨족을 선봉대로 보내서 브리타니아에 거점을 마련한 뒤에 다른 게르만 병사들을 옮기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게 맞는다고 봅니다. 제 병사들은 배를 타본 이가 적어서 뱃멀미에 취약할 겁니다.”
“뱃멀미라···. 하긴, 그러면 당장 전투는 힘들겠어.”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색슨족이 과연 순순히 협조할지가 의문입니다.”
브레누스의 말에 이 자리에 모여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놈들의 지도자를 죽였으니, 아무래도 적개심이나 그런 게 있지 않겠습니까?”
“음···. 브레누스가 저런 말도 할 줄 몰랐습니다.”
“솔직히 저도 놀랐습니다.”
“그럼 일단은 녀석들에게 한번 권유해봐야겠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한참이나 지형을 하고 있던 의무관이 다급히 외쳤다.
“전하, 이제야 겨우 피가 멎었습니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피가 멎었으면, 대중 붕대라도 감아주게.”
“안 되는데···.”
의무관은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금세 붕대를 감아줬다. 얼마나 꽁꽁 싸맸는지 숨쉬기 불편할 정도였지만,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색슨족이 잔뜩 모여있는 공터로 가니, 수천 개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내게로 향했다.
“다들 잘 쉬었나.”
나름대로 긴장을 풀려고 한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다들 잔뜩 긴장한 채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용건만 듣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살고 싶으면 내 휘하로 들어오고 아니면 실레누스와 같이 죽어라.”
색슨족은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때쯤 웅성거리면서 내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법했는데,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흠···. 진짜로 할 말이 없는 건가? 아니면 전부 길레누스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건가?”
“전하! 저희는 처음부터 전하의 편이었습니다!”
“음? 방금 누구지?”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갈색의 거친 머리칼만큼이나 거친 인상의 청년이었다.
“자네로군. 이름이 뭔가?”
“엘라피우스입니다.”
“그래, 엘라피우스···. 자네는 처음부터 나를 따랐다고?”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작은 욕심으로 주변 부족들과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건 게르마니아의 일이지 전하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군···. 그렇지?”
내 말에 색슨족 병사들과 족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자네들이 내 연회에 초대받은 이들이라면 예절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말하기를 이웃을 아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쯤 하지, 다만 자네들의 잘못이 내 심기를 거슬렸다는 게 문제야.”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가족들만큼은 죄가 없습니다.”
“아니, 나는 자네들에게 벌을 주려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야. 오히려 자네들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을 주기 위함이지!”
내 말에 엘라피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
알렉산드리아가 포위된 지 한 달이 흘렀다.
포위가 시작되기 전에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노약자들을 모조리 내보낸 뒤라 도시에는 싸울 수 있는 병사들과 남자들뿐이었다.
덕분에 식량을 아낄 수 있었고 말이다.
수많은 공성전에서 피비린내 나는 교훈을 얻은 길도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매번 공격을 할듯 말듯 움직이면서 수비병력의 진을 빼놓기도 했고, 땅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적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대놓고 도발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직접 성벽을 넘는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해군이 있었다면, 바닷길까지 완벽히 틀어막을 수 있었을 텐데···.”
길도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미 병사들을 보내서 등대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동로마 해군과 알렉산드리아 수비대가 다리를 끊어버린 탓에 별다른 성과도 없이 병사들을 물려야 했다.
지난 한 달간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성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제 남은 건 정공법뿐이었다.
“공성 병기들은 준비되었나?”
“예, 문제없을 겁니다.”
“그래···. 일단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적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줘야겠다.”
“공포감 말입니까···?”
길도가 손짓하자 사람 머리가 가득 쌓여있는 수레가 군영으로 들어왔다.
“아, 아니 이건···!”
“요 며칠간 주변에서 모은 것이라네.”
“서, 설마···. 이걸 날리실 건···?”
길도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부하는 길도의 행각에 경악하며 말했다.
“각하,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머리를 투석기에 담가 던지겠다니요!”
“어차피 전쟁터에서 사람시체 굴러다니는 게 뭐가 문제인가,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아니···.”
******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낸 쾌속선이 콘스탄티노플에 닿자, 궁정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도대체 스틸 리코는 무엇을 했기에 알렉산드리아가 위험해진단 말입니까!”
혼란한 정국 속에서 티마시우스는 자연스럽게 의원들을 달래면서 군자금을 확보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선 구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도 재산을 조금 내놓겠습니다. 다른 의원님들도 병사를 움직일 돈을 기부해주시지요.”
티마시우스의 말에 의원들이 재산을 턱턱 내놓았고, 에우트로피우스는 조용히 숨죽이고 그런 티마시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군자금을 모은 티마시우스는 당장 동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을 끌어모으면서, 이들을 수송할 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알렉산드리아를 구원할 구원병을 끌어모으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내일모레, 새벽쯤에 에우트로피우스와 그 일당들을 제거한다.”
“폐하의 뜻입니까?”
“그래, 얼마 전에 황궁에서 편지가 한 통 날아왔어.”
티마시우스의 저택 깊은 곳에 은밀하게 마련된 방에 모인 사람들은 티마시우스가 내미는 편지를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폐하께서 악독한 에우트로피우스의 손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지···.”
“이제는 그 시간도 끝이지.”
“황도의 경비대는 이미 포섭이 끝난 상황입니다.”
“황궁을 지키는 친위대와 인근의 친위군단은 황제 폐하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못 본 척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가 많았네···. 거사 일은 내일! 출병 식이 끝나자마자다.”
티마시우스는 미소짓고 있었다.
******
카물로두눔은 브리타니아 동부의 대표적인 해안 도시로써 그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물론 로마에서 역사가 깊지 않은 도시가 없었지만, 이곳은 로마에 정복되기 전부터 상당히 발전되어있던 도시였다.
로마에 정복된 이래로 근래에 색슨족의 침공이 있긴 했지만, 수백 년간 이어지던 카물로두눔의 평화가 오늘에서야 끝을 맺었다.
“수, 수평선에 배가 잔뜩 있습니다!”
“아군인가?”
“그, 그건 저도 잘···.”
“일단은 정지신호를 보내라! 저들이 아군인지 적인지 확인될 때까지 강의 입구를 틀어막아!”
“하, 하지만···.”
“하지만 뭐! 똑바로 말해!”
“카티우스님께서 해군용 함선으로 쓰신다고 배들을 모두 가져가셔서 남은 거라고는 어부들이 쓰는 작은 배들뿐입니다···.”
“아···.”
선단의 최선두에서 파도를 가르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배의 선미에 서서 바닷바람을 느꼈다.
작은 파도에도 요동치는 배에서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난간을 붙잡으며 저 멀리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도시를 바라봤다.
“평소에 영국여행을 해보고 싶었는데···. 수천 년쯤 빨리 와버렸군.”
“예?”
“아무것도 아니야 알레피우스, 파도가 심상치 않은데 병사들은 좀 괜찮은가?”
알레피우스는 호방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정도 파도는 늘 있었던 겁니다. 다행히도 이번 원정에서는 낙오되는 인원 없이 전부 잘 따라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여기서부터는 제가 지휘해도 되겠습니까?”
알레피우스는 열정적인 눈빛으로 정중히 부탁했다.
“그래, 해전이나 상륙전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감사합니다.”
알레피우스는 선미의 가장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돛을 펼치고 노를 집어넣어라! 이제부터 순풍을 타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갈 것이다!”
“우오오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돛이 활짝 펴지자 배는 날개라도 돋친 듯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브리타니아여 내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