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아 사파리 - 6
대관식준비로 훈훈하던 연회장은 금세 작전회의실로 바뀌어있었다.
역시 일이 잘 풀리면 뭐든지 잘된다더니만, 복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
아칸의 목이라면, 대관식 문제로 삐졌을 장인어른의 화를 풀어주기 딱 맞았다.
다만···. 주변에 경쟁자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가 직위가 올라가니,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창을 휘두르며 활개 치고 다닐 수가 없었다.
아마 이번 원정에서도 나 대신, 다른 녀석이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스틸리코의 화를 다스리려면 아칸의 목이 필요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슬쩍 빠져나가기로 했다.
병사들이야 이미 색슨족 토벌을 위해 모여있으니, 그들을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하인들과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에 나는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다들 브리타니아 소식에 정신이 팔려서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싶었다.
“당신, 어디 가는 거예요?”
나가는 길에 에우독시아와 마주쳤다.
바루스와 놀아주고 있던 그녀는 나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연회장에 고기가 없어서 한 마리 잡아 오려고 했는데···. 당신도 갈래?”
“고기가 없다고요? 제 사촌오빠가 오는 길에 한가득 가져왔던 거로 기억하는데···.”
“다들 워낙에 식성이 좋아서 그런지, 벌써 다 먹어치웠지~”
능청스럽게 넘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의심은 여전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여기 있으세요. 다른 사람을 불러서···.”
“아, 아니야! 황제 폐하께 대접하는 건데 내가 직접 가야 맞지 않겠어?”
“그래도 이 밤중에 사냥이라니···. 위험할 텐데···.”
“위험할수록 희열이···.”
그녀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낼 것 같은 얼굴에 뒷말을 얼버무렸다.
“느껴지는 게 제일 위험한 법이지···. 조심해서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마.”
“기다릴게요.”
“좀 늦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마.”
혹시라도 삐졌을까 봐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떠나려니, 그녀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몸조심해요.”
회의실로 변해버린 연회장에서 호노리우스가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첫 업적이 시작되겠네.”
“아칸이나 픽트족쯤이야 이 중에 누가 가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호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전쟁에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경력이 모자라는 폴로조차도 지난 아칸의 반란이나 메디올라눔 공성전에서 크게 활약해서 이름이 높았으니, 이들의 수준을 알만했다.
호노리우스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브리타니아가 발칵 뒤집혔네.”
“폐하, 지금이라도 병력을 모아서 브리타니아에 보내야 합니다.”
“지금 병력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이 있나?”
황제의 질문에 폴로가 답했다.
“갈리아의 총독들에게 병사들을 모으게 하면 늦습니다. 마침 마리우스 각하께서 폐하를 환영하기 위해 병사를 모았으니 이를 이용하시지요.”
“그건 무리입니다!”
그런 폴로의 말에 데키무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 지금의 게르마니아 재정으로는 이런 대규모 원정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바다를 건너가려면 새로운 배가 필요한데, 이 배들을 만드는 것도 오래 걸릴뿐더러 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음···. 그것도 그렇네.”
“그 말은 브리타니아를 포기하자는 겁니까?”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시간을 두고 지켜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설마 브리타니아를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건···.”
“자, 자···. 다들 감정싸움은 그만하고 마리우스의 의견을···. 마리우스?”
호노리우스가 마리우스를 찾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돌려 마리우스를 찾았지만,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 연회장의 주인인 그가 보이질 않았다.
“아, 주인님이라면 조금 전에 사냥을 나가신다고 호위병을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코프루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냥? 무슨 사냥.”
“자세히는 말해주시지 않았지만, 늙은 사슴을 잡아 온다고 하셨습니다.”
“늙은 사슴···?”
“아!”
“아하하하···.”
데키무스와 폴로만이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당황하고 웃고 있으니, 이에 궁금해진 호노리우스가 물었다.
“자네들은 뭔가 알고 있나?”
“지금 당장 각하를 붙잡아야 합니다!”
“붙잡기는 무슨···. 이번 일은 이미 해결되었으니, 다들 신경 쓰지 않고 놀고 있으면 될 일입니다.”
둘의 말이 엇갈리자, 가만히 지켜보던 세르비우스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황제 폐하의 앞에서 뭐 하는 짓들인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겠는가!”
“폐하, 제가 먼저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말해봐.”
데키무스는 목을 가다듬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게르마니아에는 색슨족이라는 게르만 부족이 있습니다. 그들이 요 몇 달간 우리의 명령도 거부하고 국경지대를 번번이 침탈하여 이번 기회에 대규모 토벌군을 보내게 되었는데···.”
“아, 짧게. 핵심내용만 말해주겠나?”
“...각하께서는 색슨족을 정리하시고, 그들을 앞잡이로 삼아 바다를 건너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우스는 지금 단독으로 움직여서 브리타니아로 가고 있다···. 이 말인가?”
“아마도···. 브리타니아의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시고···. 단독으로 움직이신 듯싶습니다.”
데키무스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에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맨몸으로 가출하는 지휘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황제 폐하의 앞이라 적당히 돌려 말했지만, 황제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다른 문제였다.
호노리우스는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황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내 명령도 없이 단독으로 출전했다라···.”
“폐하, 그것이···.”
“역시 마리우스야! 고민이 생길 틈도 없이 해결하려고 움직이는구나, 음···. 아주 좋아.”
호노리우스는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역시 마리우스야! 언제나처럼 내게 고민거리가 생기자마자 바로 처리하러 가는 걸 보니 로마에 다시없을 충신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마리우스 각하야말로 진정으로 로마를 생각하시는 분이시지요···.”
다들 호노리우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곳에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마리우스의 행보를 지적하면서 그를 비난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마리우스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호노리우스야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지냈고, 실시간으로 그의 재산을 축내고 있었으니 마리우스를 나쁘게 볼 게 없었고 말이다.
“이거 다 치워! 놀던 거나 마저 놀자고!”
“폐하, 아무리 그래도···.”
“다들 잔들 채우시고···.”
호노리우스는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게르마니아의 새로운 왕 마리우스를 위하여!”
“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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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누스와 게지카는 대군을 이끌고 색슨족들의 주거지들을 휩쓸었다.
그들은 바람처럼 군대를 몰아, 방심하고 있던 색슨족을 깨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색슨족의 공작 길레누스가 살아남은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그들에게 대적하려 했지만,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모인 병사들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꼴이 아주 보기 좋구나.”
“그동안 우리를 괴롭히고, 물건을 빼앗아갈 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느냐?!”
“시끄럽다! 네놈들은 로마놈들의 뒤나 닦아주고 사는 녀석들이 아니냐! 입에서 똥내가 나서 견디지를 못하겠구나!”
“저, 저놈이···!”
브레누스는 당장에라도 달려나가려 했지만, 게지카가 이를 말렸다.
“우리를 도발하려고 저러는 것일세, 괜히 열 내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
“어으···! 속 터져서 더는 못 참겠네!”
“그럼 참지 말게나.”
“뭐? 어떤 새···.”
브레누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그곳에 마리우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다.”
“전하!”
“아니, 이곳까지···.”
브레누스는 언제 화났냐는 듯이 굉장히 기쁜 얼굴로 나를 반겼고, 게지카 또한 놀란 얼굴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뭐···. 일이 생겨서 왔다고만 해두지.”
“으하하. 전하께서 함께하시니 저 버르장머리없는 색슨족 놈들을 모조리 쳐 낼 수 있겠군요!”
“그런데 왜 여기서 어물쩍거리고 있나, 빨리 저놈들을 혼내주러 가야지?”
“적들이 단단하게 진을 치고 있어서 쉽게 쳐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게지카의 말에 브레누스가 말했다.
“각하,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당장 병사를 이끌고 가서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겠습니다!”
“머리통 깨는 건 내 주특기지···. 내가 앞장서겠다. 다들 따라오기나 해!”
“전하, 그건 좀 위험···. 전하!”
브레누스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에 올랐고, 태연하게 말을 몰아서 색슨족의 군영을 향해 돌진했다.
“전하를 모셔라! 모두 움직여!”
조금 전까지 빈둥거리던 게르만족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마리우스의 단독행동에 화들짝 놀라면서 무기를 챙겨 들었다.
마리우스를 따라온 호위병들 또한 갑자기 치고 나가는 주인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다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전하와 말머리를 함께하고 달릴 줄이야···. 이놈이 참으로 출세했습니다!”
“출세는 무슨···. 브레누스, 앞으로는 더 좋은 일과 재밌는 일이 가득할 거야!”
“그렇습니까? 역시 전하와 함께하니 즐거운 일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제 삶에서 전하와 함께한 시간은 짧으나 가장 즐거운 시간인 것 같습니다!”
“자네, 어디 죽으러 가냐? 그런 말들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네!”
“으하하하! 늙으니 쓸데없는 소리가 는 것 같습니다. 사죄의 마음으로 제가 먼저 앞장서서 전하의 적을 베도록 하지요!”
브레누스는 있는 힘껏 말 배를 걷어차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새롭게 게르마니아에 보급된 등자가 그를 능숙한 기병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 적이 옵니다!”
“저 미친놈들은 뭐야.”
“대족장, 어찌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활을 쏴서 쫓아버려라.”
“예? 저기에 마리우스 각하도 있는데···.”
부하는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흐렸다.
길레누스는 그런 부하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놈은 저 로마놈의 부하라도 되는 것이냐!”
“따지고 보면, 부하 아닙니까···? 대족 장께서도 마리우스 전하에게 직위를 하사받으신 게···.”
“하기 싫으면 말아! 내가 직접 한다.!”
길레누스는 성큼성큼 뛰어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에게서 활과 화살을 뺏어서 시위를 당겼다.
곁에 있던 병사들과 족장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길레누스는 재빠르게 마리우스를 조준하고 한 발 쐈다.
“음?”
“전하!”
잠깐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만에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가슴팍에 꽂혔다.
다행히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화살이 깊숙이 박히면서 마리우스가 말에서 떨어졌다.
“좋아!”
“전하!”
길레누스는 미소를 지었고, 브레누스와 색슨족 병사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작 당사자인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화살을 내려다봤다.
“예전이면 쳐내거나 피했을 텐데, 역시 너무 놀았더니 몸이 굳어버렸어.”
가슴팍에 틀어박힌 화살이 갈비뼈라도 건든 것인지 욱신거리는 고통이 참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뿐이었다.
고통 뒤에 몰려드는 것은 허탈함과 분노였다.
주인을 버린 채로 한참이나 달려가던 말이 돌아올 때쯤, 브레누스와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와 내 주변을 둘러싸며 말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길레누스 저런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난 괜찮으니 소란피우지 말고 무기를 들어라.”
“전하?”
바람처럼 뛰어서 말에 올랐다.
그리고는 걸리적거리는 화살을 반으로 부러트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전부 따라와!”
“전하, 위험합니다!”
브레누스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면서 막으려 했지만, 내 행동이 한걸음 빨랐다.
매섭게 말을 몰아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니, 다시금 활시위를 당기는 길레누스의 모습이 보였다.
“뭣들 하나! 달려오는 저놈을 쏘란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왕을 쏘라는 건···.”
“네놈들의 지도자는 나다!”
“게르마니아의 주인은 마리우스 전하십니다요···.”
색슨족의 병사들은 우물쭈물했다.
그동안 마리우스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색슨족이었지만, 그가 자신들을 잘 대우해줬음을 모르는 멍청이들은 아니었다.
매번 주변 부족들을 약탈하고 싸우는 것이야, 게르마니아에서는 항상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왕이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게르마니아 통합을 이뤄낸 마리우스와 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끽해야 색슨족 몇몇 부족을 통합한 길레누스와 게르마니아를 통합한 마리우스.
저울질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그만두십시오!”
“아무리 대족장이래도 이건 아닙니다!”
“이놈들···!”
길레누스 휘하의 족장들이 하나둘씩 길레누스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길레누스에서 등을 돌렸다.
그의 목에 창날이 들이밀어서 질 때쯤.
마리우스가 군영에 도착했다.
살짝 기울어진 태양을 등지고 나타난 마리우스는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은 갑옷을 입은 마리우스의 모습에 모두가 압도되었다.
“길레누스.”
“저, 전하···.”
길레누스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마리우스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길레누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자 앞에선 토끼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길레누스는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항복해라. 그러면 너만 죽을 것이다.”
분명 화살에 맞는 것을 보았건만, 마리우스의 모습이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모습에 길레누스가 겁을 먹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항복하겠나.”
“하, 항복하겠습니다···. 제 가족들과 부족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길레누스는 이윽고 도착한 브레누스와 병사들에게 붙들린 채로 끌려갔고, 자신들의 대족장이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색슨족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