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아 사파리 - 5
황제의 방문에 온 게르마니아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동안 제국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으로 거의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였던 이곳에 황제가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시민들은 큰 힘을 얻었다.
호노리우스가 아그리피넨시스를 지나는 동안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민들이 생에 처음으로 보는 황제에게 환호를 보냈다.
“듣기와는 아주 다른데.”
“무엇이 말입니까?”
“듣기로는 완전히 버려진 황무지 같은 곳이라고 했는데···. 조금 낙후되긴 했어도 좋은 곳 같아.”
“폐하, 모든 게 제 덕분입니다.”
“뭐? 하하하하···. 하나도 안 변했네.”
꼬맹이···. 아니 이제는 꼬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커버린 호노리우스는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아들이고 웃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는데 말이다.
“황제 폐하 만세!”
“마리우스 총독 각하 만세!”
“로마 만세!”
“게르마니아 대추장 마리우스 전하 만세!”
중간중간 이상한 게 들려왔지만, 일행이 총독관저로 들어갈 때까지 환호성은 끊이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하나도 안 변했네!”
“폐하께서도 어릴 적 모습 그대로입니다.”
내 말에 호노리우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닌데, 키도 엄청나게 크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똑똑해졌다고!”
“그러시겠죠.”
“이걸 안 믿네···.”
믿을 리가 있나.
“게르마니아의 밤은 춥습니다. 말은 여기 있는 코프루스에 맡기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코프루스 부탁하지.”
말에서 내리니, 폴로와 가우덴티우스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오랜만이네, 마리우스.”
“폴로, 가우덴티우스 경.”
몇 년 동안 어디 가지도 못하고, 게르마니아에 처박혀 있었더니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세월이 흐르기는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판노니아에서 같이 구르던 폴로의 모습은 어느덧 전장을 제집 안방처럼 굴러다니는 장군의 모습이 물씬 풍겼고, 가우덴티우스는 완숙한 장군에서 어느덧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이게 몇 년 만입니까.”
“3년? 4년 정도 되었지요.”
“그동안 연락 한번 없다니, 자네도 참으로 매정한 사람이야···.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요. 마리우스 장군께서는 여자와 돈 말고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폴로, 그동안 나 없이 즐거웠던 모양이군. 그런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장군이 없으시니? 아주 제 세상을 만난 것 같더군요! 하하하···.”
그렇게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바짓단을 붙잡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제 갓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있었다.
꼬마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연신 입을 우물거렸지만, 부끄러웠는지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응? 뭔가 할 말이라도 있니?”
“아에티우스, 이분이 마리우스 장군이란다. 얼른 인사드려야지?”
“장군이라니요. 이제는 각하라고···. 잠깐, 이 꼬마가 장군의 아들입니까?”
“예, 지난번에 이름도 정해주지 않았는가? 아에티우스 말이야!”
고개를 돌려 꼬마를 바라봤다.
조막만 한 손으로 내 바짓단을 붙잡고 있는 꼬마는 갈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날카로운 표범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 꼬마가 수십 년 뒤에 신의 채찍이라고 불리면서 로마를 뒤집어놨던 전설적인 유목제국의 왕 아틸라를 물리치고, 수많은 반란을 진압하면서 로마를 구하여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리게 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였다.
두 손으로 꼬마를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앉혀주니, 아에티우스는 까르륵 웃음소리를 내며 이를 즐겼다.
“어때, 내 아들놈이 좀 싹수가 보이는가?”
“장군의 아들인데 그런 건 안보다도 뻔한 게 아니겠습니까? 분명 위대한 장군이 될 겁니다.”
“그래? 그거참 다행이로군.”
“이거야 원···. 아들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자네는 결혼부터 하지 그래.”
“각하, 제 슬하에 딸만 셋입니다.”
“크흠···.”
폴로의 시선을 피해 꼬마를 올려다봤다.
어린 아에티우스는 눈을 빛내면서 총독관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임총독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궁전같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총독관저의 모습에 매료된 듯 보였다.
“슬슬 들어가실까요. 날이 춥습니다.”
“그러지. 아에티우스 이만 내려오려무나.”
“조금만, 조금만 더 있을래요.”
“어허, 장군께서 힘들어하시는 게 안 보이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군이 아니라 총독 각하라고 해주시죠.”
“뭐, 자네가 괜찮다면야···. 힘들면 말하게나.”
******
알렉산드리아의 혼란은 언뜻 가라앉은 듯이 보였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이었다.
시민들은 지난 광장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다.
아이깁투스의 총독과 알렉산드리아 의회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주변에 구원요청을 보냈다.
제일 먼저 구원요청을 받은 곳은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도시들이었다.
일부 도시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구원요청에 응했지만, 대부분 도시는 이를 거절했다.
로마제국의 오랜 숙적인 페르시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있었던 페르시아 왕궁 내부의 암살사건으로 바흐람 4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이 새롭게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페르시아의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적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고, 대부분 도시는 어차피 자기들한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저 방관하기를 선택했다.
“지원군이···. 이게 다인가?”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신이 우릴 버렸군···.”
“로마가 우릴 버린 겁니다.”
“내 진작에 콘스탄티우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내 그릇된 판단이 도시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구나···.”
“각하, 우선은 적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대한···. 최대한 오래 버티다 보면, 희망이 있을 겁니다.”
“다시금 콘스탄티우스에게 전령을 보내고, 라벤나와 콘스탄티노플에 쾌속선을 띄워!”
“예, 각하!”
총독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길도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험난한 여정을 증명하듯이 길도의 부대는 출발할 때보다 제법 줄어 들어있었고, 병사들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벽 앞에 도착한 길도의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숙영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했군.”
“참으로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위태롭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길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수의 호위병력만을 데리고 성벽을 둘러보았다.
한편, 카르타고에 주둔 중이던 콘스탄티우스의 상황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카르타고에 주둔 중이던 마르켈의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의 가슴 깊이 자리 잡은 로마를 향한 적대감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이봐 헥터···?”
밤마다 순찰 나간 병사들이 살해당하는 건 기본이었고, 낮에 순찰 중인 병사들의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지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렇게 카르타고에 주둔 중인 병사들이 하나둘씩 죽거나 크게 다쳐나가자, 콘스탄티우스는 이 일의 배후를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시민들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드러난 일에 배후가 어디 있겠는가, 애꿎은 시민 몇 명이 처형당한 뒤에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씨발, 도대체가 이 땅은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장군, 진정하시고 본토에 지원병력을 요청해보시지요. 우리끼리는 절대로 이 넓은 도시를 제어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그동안 우리가 너무 유순하게 움직였던 것 같다.”
“예?”
“놈들이 카르타고로 돌아가겠다면, 우리도 과거의 찬란했던 그 시절의 로마로 돌아가야지.”
“자, 장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관이 겨울바람을 쐰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제부터 반항하는 이들은 모두 즉결처형시키고, 그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한 관련자들까지 깡그리 죽인다.”
“너무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그런 방법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지금 튀어나오려는 놈들을 모두 억눌러놔야 나중에 편해진다는 것도 모르겠나?!”
“장군,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카르타고의 시민들을 전부 죽이지 않는 이상은···.”
“필요하다면.”
콘스탄티우스의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
황제의 방문을 환영하는 연회가 이어졌다.
호노리우스가 연회 내내 안토니나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녀와 말을 섞어보려고 했지만, 안토니나는 생각보다 호노리우스를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에티우스를 보고는 동생처럼 아끼면서 같이 놀아주며 호노리우스를 피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에티우스가 안토니나를 많이 따르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내친김에 둘이 이어주는 건 어떤가?”
“에이···. 나이 차이가 몇인데.”
“나이 차이가 중요한가? 둘이 마음만 맞으면 그만 아니냐 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안토니나가 훨씬 나이가 많을 텐데, 어떻게 결혼을 시킵니까.”
“끄으응···. 그럼 나중에 태어날 자네 딸 중에 한 명과 내 아들놈을 결혼시키는 건 어떤가?”
가우덴티우스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던 사람이 이러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번호표 뽑습니까? 싫습니다. 싫어요.”
“자네도 내 아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가서 내 아들놈 같은 신랑감은 못 구할걸세.”
그건 맞았다.
저기서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저 꼬마가 미래에 로마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이자 위대한 장군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만한 신랑감이 어디 있겠는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장군답지 않습니다.”
“크흠···.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데, 내가 전쟁터에서 콱 죽어버리면 저 어린 것을 누가 돌봐주겠나.”
“으음···.”
잠시 고민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건 딸이 태어나고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래, 자네 편할 대로 하게.”
“그나저나···. 장군께서는 뭐 아시는 것 없습니까?”
“뭘 말인가?”
“제 즉위식 말입니다. 사실상 로마에서 반쯤 독립하겠다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걸 스틸리코나 황제 폐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 의문입니다.”
“으응? 합하께서 설명 안 해주신 모양이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또 나만 빼고 설명해준 모양이다.
속 좁은 양반 같으니, 이러니까 하루가 다르게 주변에 정적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나.
“합하께서는 거대해진 제국을 황제 개인이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계시네.”
“으음···. 그렇긴 하지요. 저도 게르마니아를 몇 년이나 굴려봤는데도 아직도 제대로 굴러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자네를 시험 삼아서 제국의 행정단위를 재편하려는 모양이야.”
“행정단위의 재편이라···.”
나름 고급정보를 들었다.
어디 가서 함부로 못들을 그런 정보 말이다.
“또 없습니까?”
“그 뒤로는 합하께서 설명을 안 해주셔서 잘 모르겠네, 듣기로는 판노니아를 수복한다는 말도 있고, 아칸을 찾기 위해 정보원들을 끌어모은다는 말도 있···.”
“각하!!!”
그때, 데키무스가 연회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연회 장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란스럽던 연회장의 소음이 뚝 하고 끊기더니, 이내 데키무스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무슨 일인가.”
“브리타니아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 무슨 전령 말인가.”
“아, 아칸이···.”
“아칸? 그 이름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데키무스는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이고 있었다.
“숨 좀 고르고 천천히 말해봐. 아칸이 뭐?”
“아, 아칸이···. 브리타니아에 있답니다!”
“흠···. 결국 거기까지 기어들어 간 모양이구먼.”
이정도야 얼추 예상하고는 있었다.
스틸리코가 눈에 불을 켜고 제국 전역을 뒤지고 있는데도 안 나온 걸 보면,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 같은 변방으로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브리타니아의 6군단이 아칸의 편으로 돌아섰고, 소수의 병사만이 콘스탄티누스의 휘하에서 아칸에 대항하며 싸우고 있다 합니다!”
“돌겠네.”
“거기에···.”
“끝이 아니야?”
“픽트족이···. 대규모의 픽트족이 남하해서 브리타니아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쫓아내고 있다 합니다.”
오늘도 정말 어메이징한 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