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아 사파리 - 4
길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병사들을 밀어 넣었고, 결국 견디다 못한 키레네의 시민들은 백기를 내걸고 길도의 부대에 항복했다.
키레네의 시민들은 자비를 원했지만, 길도는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 도시는 너희들의 것이다. 일주일 동안 시간을 줄 테니 마음껏 즐겨라.”
일주일 뒤 키레네의 시민들이 반쯤 죽고 나서야 병사들의 약탈이 끝났다.
키레네에서 병사들을 얼추 무장시키고 보급수요를 충당한 길도는 다시금 알렉산드리아를 향해서 동진을 계속했다.
키레네 공성전에 매운맛을 본 길도는 조금 더 신중하게 병력을 운용했는데, 알렉산드리아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란 도시는 지나치지 않고 모두 함락시키면서 진군했다.
저항하는 도시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짓밟았으며, 항복하는 도시들 또한 예외는 없었다.
길도의 소문이 들려올수록 도시들의 저항이 격렬해졌고, 그에 따른 병사들의 손실과 피로도도 높아져만 갔지만, 길도는 병사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면서 이를 잘 무마시켰다.
그리고 길도가 온다는 소식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독과 의회는 발칵 뒤집혔다.
“길도는 바다를 통해서 우리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올 게 분명합니다! 당장 서부와 동부 로마의 모든 함대를 끌어모아서 이를 막아내야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추론이군요. 길도의 부대는 수십만이라고 하는데, 그 많은 병사를 태울 배들을 어디서 구한다는 말입니까?”
“그야, 여태까지 함락했던 도시들에서···.”
“이보세요! 이 바다에서 가장 많은 함선을 보유한 곳이 알렉산드리아예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리 공격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오!”
지적받은 의원이 목을 가다듬으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외쳤다.
“길도는 지금 육로를 통해서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의 충성스러운 도시들이 길도에 저항하면서 시간을 벌어주고 있지요.”
“시간을 벌기는 무슨···.”
한 의원이 핀잔을 줬지만, 그 의원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알기로는 길도의 군대가 3주 전에 어피르거스를 공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파라이토니움에 닿지 않았겠습니까!”
“파라이토니움이면 이곳에서 일주일 거리인데···!”
의원들의 웅성거림이 켜졌다.
“도시를 버리고 피난 가는 편이···.”
“이곳을 버리면, 우리 재산은 누가 지켜줍니까?”
“지난번에 서부의 장군이 요구했을 때 들었어야 했는데···.”
“저는 하고 싶었는데, 다른 의원분들이 반대하시기에···.”
“제가 뭐랬습니까? 진작에 군대를 일으켰으면 알렉산드리아가 불타오를 일도 없었을 것을···. 쯧쯧···.”
“그만! 그만!”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의원 한 명이 다른 이들을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입니까! 당장 적들이 몰려오는데 이를 막을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오만, 당장 해결책이 없지 않습니까.”
“당장 총독께 요청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무장시키고, 훈련해서 전투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적들은 대군입니다! 대군!”
“적이 아무리 많아도 알렉산드리아의 높은 벽을 쉽게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른 의원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다들 결사 항전보다는 재산을 챙겨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군대를 모아봤자 얼마나 된다고···.”
“총독이 앞장서서 도망갈 게 뻔합니다.”
“차라리 알렉산드리아를 싹 비우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의회가 시끄러워졌다.
의회가 이럴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거리 또한 만만치 않은 혼란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식량을 사재기하고 있었고, 폐쇄된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치었다.
“왜 못 나가게 막는 겁니까!”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뵈러 간다는데 왜 막는 거요!”
“오늘까지 물건을 대주지 않으면 내가 파산한다니까!”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알렉산드리아는 당분간 봉쇄되었습니다!”
“그럼 봉쇄는 언제쯤 풀리는 것입니까!”
“그건 의회와 총독 각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 다들 총독궁으로 가서 총독께 물어봅시다!”
“어어···.”
단순히 실랑이로 끝날 것 같던 우발사건은 길어진 봉쇄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다.
봉쇄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빈민들, 거래를 망친 상인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식료품값에 분노한 시민들까지 합류해서 총독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시민들이 들고일어난단 말이야!”
“각하께서 성을 봉쇄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럼 저들이 화난 이유가 성을 봉쇄해서 그런 것이라 이 말인가?”
“예, 각하.”
아이깁투스의 총독은 상황을 오판하고,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
“저들은 길도가 보낸 첩자들임이 틀림없다! 감히 의회와 내 명령을 거부하고 소란을 일으켜?!”
“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병사들을 동원해서 전부 해산시켜!”
총독궁을 향해 진군하던 시위대 앞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나자 시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고, 곧 그들이 검을 뽑아 들자 공황에 빠졌다.
그들 중 맨 앞에 선 장교가 검을 뽑아 들고는 외쳤다.
“이자들은 총독에 반하는 적의 첩자들이다. 반항하는 자는 모두 참살해도 좋다는 총독의 명이다.!”
“우,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입니다! 단지 총독에게 우리의 억울한 사연을 말하고자···.”
“전원 진압준비!”
“그만! 이게 무슨 횡포요!”
시민들 사이에서 수도복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군인들을 엄히 꾸짖었다.
“선량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두 귀를 틀어막은 채로 사람들을 깔아뭉개려고만 드는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의 모습에 곁에 있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오필루스 주교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기만 하면 모습을 드러내는군.”
“잘못했다가는 총독께서 이교도라는 의혹을 뒤집어 쓰실 수가 있으니, 일단은 조심해야 합니다.”
“저놈이 이번 시위의 주동자임이 틀림없다. 안 그래도 최근에 거들먹거리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군.”
“장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무언가, 예정대로 전부 진압한다.”
병사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로마군이 점점 가까워지자 시민들이 돌멩이를 집어 던지거나 손에 들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악-!”
“장군! 의원을 불러라 장군께서 쓰러지셨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장교가 눈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니, 병사들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고 광장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오···. 신이시여···.”
“주교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렉산드리아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
게르마니아에서는 데키무스와 내가 눈에 불을 켜고서 금이 나올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라인란트인가 뭔가 하는 지방에서 철광석이 많이 나온다고 들었지만, 그건 미래의 지명이었다.
지도를 살펴봐도 죄다 오래된 지도거나 정확성이 의심되는 지도들뿐이었다.
그래서 의심 가는 곳부터 일단 들쑤시고 봤는데···.
“금은 안 나왔지만, 대신 은이 가득 잠들어있는 곳을 찾았는데···.”
“국경지대 밖이군.”
“예, 거기다가 우리와는 우호적이지 않은 부족이 점거하고 있습니다.”
“말은 통하나?”
데키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답은 하나였다.
“병사들 보내서 전부 쫓아내.”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재정상태가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군대를 움직이기는커녕 월급도 겨우 대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나?”
“당분간은···. 예, 그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예 존재 자체도 몰랐으면 모를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건들 수가 없다는 건 굉장히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노천 탄광과 질 좋은 철광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었다.
처음에 검은 돌, 그러니까 석탄에 대해 들었을 때는 겨울에 난방을 석탄으로 대신하고, 남는 나무들을 팔아치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데키무스가 가져온 석탄은 난방용으로 쓸만한 무연탄이 아니라 공업용으로나 쓰는 역청탄이었다.
눈앞에 철광석과 석탄을 두고서 고민했다.
이론상으로는 이 두 개만 있다면, 아주 원시적인 제철소를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다만, 그 방법을 내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과거로 날아올 줄 알았으면, 학부생 시절에 수업도 열심히 듣고, 쓸만한 기술들도 마구마구 기억했겠지만 말이다.
“음···.”
“다행히도 철광석의 품질이 아주 좋습니다. 장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가져가려고 난리더군요.”
“그건 다행이군···. 상품성이 좀 있나?”
“글쎄요···. 노리쿰에서 나오는 품질 좋은 강철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건 맞지만, 아시다시피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여러 곳과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가격을 후려치면 되지 않겠나, 우리가 일개 상단들 보다 밀릴게 뭔가.”
“기술력이 부족하고, 자본도 부족하며, 대량생산은커녕 아직 제대로 된 채굴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데키무스의 팩트폭력이 매섭게 가슴을 두들겼다.
역시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돈을 써서 돈을 복사하는 일뿐이란 말인가···.
가난뱅이는 돈 벌 수 없는 이 더러운 세상 같으니!
“아, 그러고 보니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또 국경에서 이민족들이 들여보내 달라고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그거야 매일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건 아니고 더 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한일? 그거보다 중요한일이 뭐가 있나.”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타서 보리차를 들이켰다.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으니, 데키무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프우우웁···. 뭐, 뭐라고?”
입안에 머금고 있던 보리차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데키무스의 얼굴을 덮쳤지만, 데키무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얼굴을 닦았다.
“황제 폐하께서 각하의 대관식을 참관하러 오신다고 합니다.”
“아니, 그거 진짜로 하는 거였어?”
“그런 모양입니다. 출발했다는 전령이 어제 도착했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저도 이제 들었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노리우스의 일행이 아그리피넨시스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시켜놨던 병사들은 황제가 지나갈 때마다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황제를 향해 경례를 올렸고, 이후에는 한 몸처럼 행군하면서 도시를 빠져나갔다.
나는 병사들의 대열이 끝나는 곳에 서서 호노리우스를 환영했다.
“게르마니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폐하!”
“위대한 호노리우스 황제 만세!”
“로마 만세!”
이윽고 미리 대기시켜줬던 시민들이 병사들 사이로 걸어 나와 일행에게 꽃가루를 뿌려주었고, 안토니나 또한 쫄래쫄래 달려가 호노리우스에게 금으로 만든 월계관을 건네주었다.
“이렇게까지 환영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는데 어찌 준비를 소홀히 하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환영 행사를 준비한다고 내 사비를 털어서 저택 하나 값을 쏟아부었다.
며칠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병사들을 훈련했고, 장인들을 닦달해서 금으로 된 월계관을 만들었다.
다행히도 그렇게 돈을 쓴 보람이 있었다.
호노리우스는 굉장히 만족했다는 얼굴이었고, 같이 따라온 폴로와 가우덴티우스는 감탄한듯한 모습이었다.
“하하하···. 오랜만이야 마리우스.”
“오랜만입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