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80/187)

하이아 사파리 - 2

밤낮없이 서쪽을 향해 내달린 우르겐과 그의 부하들은 어느덧 로마군이 알비스 유역에 설치한 새로운 방어선을 맞닥뜨렸다.

수비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훈족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우르겐은 태평하게 강가에 세워진 방벽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방비가 철저하군, 병사들은 잘 조련되어 있고, 목책들도 제법 높고 튼튼해 보여.”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강을 따라서 건설된 탓에 쉽게 넘어가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로마놈들이 여기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을 줄 몰랐는데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전부 로마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드문드문 게르만족 녀석들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부관의 말대로 방벽 위에서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게르만족이 XIX이라는 숫자와 황소 그림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야릭, 저 벽을 넘을 수 있겠나.”

“노력해보겠습니다.”

“됐네,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너무 오랫동안 주군의 곁을 비워뒀어.”

“드디어 돌아가는 겁니까?”

“그래, 언젠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서 이 주변의 지도를 만들면서 돌아간다.”

“예.”

******

브리타니아의 요새 도시 에보라쿰에서는 수천 명이 넘는 로마군이 여기저기 쓰러져 죽어 있었다.

성벽은 곳곳이 무너져내려 있었고, 도시 이곳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여전히 로마의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에보라쿰 공략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의 저항이 거센 탓에 아군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방법이 없겠나? 아군은 다수이고 적들은 소수인데, 무슨 방법이 있지 않겠냐 이 말이야.”

카티우스의 말에 헤라클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장군의 지휘는 너무나도 미숙합니다. 이런 대규모의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너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장군께서는 진입해야 할 곳에서는 물러나고, 물러나야 할 곳에서는 진입하시니 병사들은 혼란스럽고 지휘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 그건 다 생각이···.”

“생각이야 다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그 생각을 전장에서 구현하는 게 지휘이고 지휘관의 능력입니다.”

헤라클리우스의 지적에 카티우스의 얼굴이 붉어지며 몹시 흥분한 어조로 그를 꾸짖었다.

“여긴 내 전선이고, 내 병사들이야! 자네가 얼마나 뛰어난 장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스틸리코에게 지고서 꼬리를 말고 기어들어 온 게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자네는 내가 물어볼 때 대답만 하면 돼! 알겠어?!”

헤라클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관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건가? 그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쯧···. 적당히 하십시오. 이번 전투를 말아먹으신 분이 왜 이렇게 목소리가 크신 겁니까? 병사들이 다 듣겠습니다.”

“왜! 병사들이듣···.”

카티우스는 천막 밖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병사들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헤라클리우스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리고는 천막을 나가버렸고, 그제야 밖에서 눈치를 보던 그의 부관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쯧···. 나리께서도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뭐가 말입니까?”

헤라클리우스는 카티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새끼가 아군에 미치는 해악이 어마어마한데도 저런 녀석을 아직 살려두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예전 같으셨으면 바로 쳐냈을 텐데 말이야.”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매번 그러셨잖습니까.”

“어쩌면···. 나리께서도 바뀐 걸 수도 있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셨으니 변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하죠.”

“병사들에게 물러날 준비를 하라고 일러둬. 카티우스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테니까 말이야.”

“저희는 모두 장군을 지지한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헤라클리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보라쿰의 성벽을 올려다봤다.

흩날리는 붉은색 깃발 아래 콘스탄티누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군!”

“무슨 일인가.”

“화살이 떨어졌습니다.”

“적의 화살을 수거해서 재활용해.”

“이미 하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적들은 금방 물러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나저나 픽트족의 움직임은 어떤가.”

“지난번에 패퇴한 이후에는 숨죽이고 이쪽 상황을 염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전에 둘러보니, 서문의 성벽이 조금 무너져있던데 빨리 보수해놓게.”

“시민들을 동원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는 말게, 어찌 되었건 우리에게는 그들의 지지가 필요해.”

“세심하게 다루겠습니다.”

부관이 경례를 올리면서 가려고 하자, 콘스탄티누스가 그를 불러세우며, 한 가지 일을 더 시켰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겠나.”

“갈리아는 힘들겠지만···. 게르마니아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으음···. 지금 게르마니아의 총독이 누구였지?”

“카티우스 이후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에 바깥소식을 접한 것이 없어서···.”

“우선은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보게, 게르마니아 총독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곳 사정을 알리는 게 중요해.”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적들은 곧 물러날 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보지.”

“예, 장군.”

콘스탄티누스는 고개를 돌려 마을 쪽을 바라봤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길이 치솟고 있는 마을에서 병사들과 시민들이 뛰어다니면서 불을 끄고,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아칸의 병사들이 번번이 에보라쿰을 공격하고 있었고, 픽트족들이 드문드문 경계를 넘어서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무나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콘스탄티누스의 희망을 담은 전령이 에보라쿰을 떠났다.

******

게르마니아에 불어닥친 교육의 열풍은 구석구석 가리지 않고 고루고루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야지에서 평화롭게 살던 게르만족들도 대추장, 아니 게르마니아 대왕의 새로운 정책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고, 돈까지 준다는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자식들을 들이밀었다.

물론 이런 모습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전하라고 해도 우리의 전통을 무너트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교육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전사가 될 자질을 평가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닌가?”

“로마인의 유약한 생각에 아이들이 물들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아이들을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이들 중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보내지 않은 집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

라인강 인근에 거주하는 게르만족들은 아그리피넨시스나 모군티아쿰 같은 대도시로 아이들을 보냈고, 심지어 소문을 들은 알비스 너머의 부족들까지 게르마니아의 새로운 왕을 모시겠다면서 국경을 넘어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또다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길래 남의 밭을 질근질근 밟고 다니냐?”

“그러는 너희야말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남의 사냥터에는 무슨 일이냐.”

“여기는 우리 밭인데 무슨 놈의 사냥터야!”

“그게 무슨 소리냐!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우리 부족이 사냥터로 이용하던 곳이야!”

너도나도 강을 건너서 이주하다 보니,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부족들과 새롭게 이주해온 부족 간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새끼길래 남의 땅에 발을 들여놓고 지랄이야!”

“여기 땅이 다 네 땅이야?!”

그리고 이런 분쟁들이 점점 격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피를부르···. 지는 않았다.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던 게르만족은 그대로 마리우스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억울함을 해결하려 했다.

“전하, 저 근본도 없는 천것들이 제 땅을 마구 침범하면서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습니다.”

“강을 건너온 놈들이 여기저기 마구 시비를 걸고 다닙니다요···. 벌써 제 부족민이 다섯 명이나 다쳤습니다.”

“강을 건너온 놈들이 너무나도 흉포합니다!”

“말도 안 듣습니다!”

“그냥 싫습니다. 쫓아내 주십시오!”

애초에 건너오는 부족들을 잘 제한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이미 교육문제로 잔뜩 삐져버린 의회가 마구잡이로 승인도장을 찍어댄 결과였다.

그 결과 나뿐만 아니라 의회도 이 일에 엮여 들어갔지만, 그들은 웃고 있었다.

“크크크···. 보셨습니까? 총독 각하께서 일에 치이시다 보니 관저에는 이틀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하는군요···.”

“하하하! 그것참 잘된 일입니다. 암요! 우리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 때문에 우리 일이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뼈를 주고 살을 취한 의원들이 우울한 얼굴로 서류에 서명하고 있을 때, 마리우스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돈 준다니까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이미네, 두더지 잡기도 아니고 원···.”

“두더지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나?”

“전하, 저들은 침략자들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당장에 병사들을 몰고 가서 전부 내쫓겠습니다!”

브레누스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강을 건너온 이들 대부분이 살기 좋은 프랑크족의 땅을 마구잡이로 침범하면서 여러 해악을 끼쳤으니 그럴만했다.

“그래도 제 발로 걸어온 이들인데 어찌 힘으로 때려잡겠나, 다른 의견은 없나?”

“전하, 소신이 한번 말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너무 무게잡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크흠···. 죄송합니다.”

“그래서 의견이 뭔데.”

“의견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불만 사항입니다.”

“불만?”

게지카가 불만을 말할 정도면 어지간한 일이 아닌 듯싶었다.

“색슨 놈들 말입니다.”

“그 해적 놈들이 왜? 또 해적질한다고 설치다가 자네 영지에 쳐들어왔나?”

“예, 녀석들의 행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은 겉으로는 전하의 아래에 복속되어있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끼리 왕을 칭하고 있다 합니다.”

“슬슬 손봐줄 때가 되긴 했어.”

“각하, 지금당 장은 병사들을 동원할 여력이···.”

데키무스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뭐? 여력이 없어?

“브레누스, 게지카.”

“예, 전하.”

“지난 계약대로 게르마니아에 있는 병사들을 불러모아, 겸사겸사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녀석들도 동원해서 혼내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 휘하에 있는 모든 병사를 긁어모으겠습니다!”

그동안 색슨족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게지카와 브레누스는 잔뜩 흥분해서 횡설수설 거리더니 이내 집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데키무스는 이제는 별생각이 없는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력 동원 문제는 해결되었군요.”

“지난번에 저들과 계약을 맺지 않았었나.”

“예, 사실 각하라면 어떻게든 병사를 마련하실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렇지, 역시 데키무스야!”

“그럼 전쟁은 저들에게 맡기고, 다시 업무를 보러 가시겠···.”

“전쟁터에 내가 빠지면 쓰나!”

“각하!”

호탕하게 웃으면서 회의장을 벗어나려고 문을 열었는데, 그 앞에는 에우독시아가 있었다.

바루스를 안고 있는 그녀는 말없이 아이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바루스를 받아 품에 안아 들었다.

“못가요.”

“아니···. 색슨족 놈들이 우리 애들을 마구 괴롭혔다니까? 아일라 내 말 들어봐···.”

“듣긴 뭘 들어요. 이번에는 부하들한테 맡기고 얌전하게 있어요.”

“그게···. 저···.”

“저도 이번만큼은 그 말에 동의해요.”

“아멜리아···!”

테르만티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당신 대관식을 허락하셨어요.”

“뭐라고···?”

“대관식이요. 왕관 쓰는 거.”

“그게 왜···? 아니, 굳이 대관식을 왜···?”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에 아버지께 보고서 올리셨잖아요.”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적어도 내가 쓸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아멜리아, 설마 당신이···.”

“나도 이제 왕비 소리 들어보겠네요?”

그녀는 방긋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역시 남자는 부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어머니의 옛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0